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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조선말의 문신으로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의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그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는 방대한 저작으로 우리나라 및 중국의 고금(古今) 사물에 대하여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했다. 임하필기8편 人日編에서, '人日'이란 사람의 일상을 말하는것이니,선현(先賢)들의 좋은 말과 훌륭한 행동을 엮어서 수신(修身)의 요체로 삼고져 했는데 그 내용이 현대에 살고있는 후인들에게도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고전번역원 역문.
숙흥(夙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반드시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어머니께 문안드리고 나와 서재(書齋)에 가서 진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꼿꼿이 앉아 강론(講論)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녁에 잠자리를 정해 드릴 때에도 예법대로 하였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가묘(家廟)가 딴 곳에 있었는데, 날마다 한 번씩은 반드시 갔다. 비록 공무로 바쁘거나 바람이 불든지 눈이 오든지 춥든지 덥든지 간에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음식을 먹을 적에 말소리나 수젓소리를 내지 않았다. 제자들이 앞에 나아가 배울 때에는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였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부분이 없이 분명하였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항상 검약(儉約)하였으며, 놀이나 즐기는 행동을 하지 않고 오직 독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권태로우면 글씨를 익혀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밤에 잘 때나 병이 들었을 때가 아니면 눕거나 기대면 안 된다. 낮에 졸리면 이 마음을 각성시켜서 충분히 살펴야 하며, 잠이 많이 쏟아지면 일어나 이리저리 걸어다녀서 잠이 깨게 해야 한다.” 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말하기를, “학문할 적에는 먼저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정신을 잘 보존하며 뜻을 전일하게 해서 지기(志氣)는 항상 맑고 의리(義理)는 밝게 드러나게 하여야 하니, 이는 공맹(孔孟) 이후 첫째가는 문(門)이다.” 하였다.
퇴계 이황이 일찍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분발하여 학문에 몰두하느라 밤낮으로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다가 결국 고질병을 얻어 폐인(廢人)이 되고 말았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의 기력(氣力)을 헤아려서 잠잘 때에는 잠자고 일어날 때에는 일어나 어느 때 어느 곳이든 늘 살펴서 이 마음을 방일(放逸)하지 않게 한다면 괜찮다.” 하였다.
야매(夜寐)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촌음(寸陰)도 아꼈다.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혹 밭에서 소를 먹여 기를 때에도 책을 놓은 적이 없었고, 날마다 땔나무를 해다가 그 불에 비춰 책을 읽었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묻기를, “선생이 청량산(淸涼山) 절에 계실 때에, 아무리 캄캄한 밤중이라도 혼자 절 밖으로 나갈 때에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뜻이 없으셨으니,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안정되고 이치에 밝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소년이었을 때 멋대로 행한 일이니, 비록 달리 두려운 것은 없었지만 유독 사나운 짐승에 대한 걱정도 없었겠는가.” 하였다.
퇴계는 평소 잠자리와 독서하는 곳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아 강학(講學)하거나 응대(應對)해야 할 때가 아니면 좌우에 사람이 없이 조용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혼자 완락재(玩樂齋)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았더니, 달은 밝고 별은 희미한데 강산(江山)은 텅 비고 몹시 고요해서 천지가 나뉘기 전 상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게으르면 욕정(慾情)이 성하게 일어나서 편안히 쉬지 못하니, 오직 공경해야 심기(心氣)가 맑아지고 안정되어 편안하게 지내며 호흡을 고르게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편안히 쉴 때에도 게을리 하지 말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면 함께 공경의 이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지 저녁에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하기를, “밤중에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가 있으니, 절대로 많이 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용문(龍門) 조욱(趙昱)은 경(經)의 뜻을 강론하다가 밤이 깊어 등(燈)이 다하게 되면 홀로 앉아 심사숙고하였다. 그러다가 의심스러웠던 뜻에 대하여 자득(自得)하게 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문인(門人)이나 자제들로 하여금 경전(經傳)에서 뽑아내어 확인하게 하였다. 하룻밤에도 두세 차례씩 이와 같이 하고 더러는 새벽까지도 잠을 자지 않았으니, 경전을 힘껏 궁구한 것이 이와 같았다.
독서(讀書)
율곡이 말하기를,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께 공손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애하는 도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음미하여 힘껏 실행하라. 그 다음에 《대학(大學)》과 《혹문(或問)》을 읽어서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에 대하여 하나하나 참으로 알아서 실천하라. 그 다음에 《논어(論語)》를 읽어서 인(仁)을 구하고, 자신을 위하며, 본원(本原)을 함양하는 공부에 대하여 하나하나 정밀히 생각하여 깊이 체득하라. 그 다음에 《맹자(孟子)》를 읽어서 의리(義理)를 밝게 분변해서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분명하게 살펴서 확충하도록 하라. 그 다음에 《중용(中庸)》을 읽어서 성정(性情)의 덕과 미루어 극진히 하는 공부와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잘 길러지는 오묘함에 대하여 하나하나 완미하고 찾아서 터득하라. 그 다음에 《시경(詩經)》을 읽어서 성정(性情)의 옳고 그름과 선악(善惡)을 기리고 경계한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깊이 연구하여 선한 것에 대해서는 감동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악한 것에 대해서는 징계하라. 그 다음에 《예기(禮記)》를 읽어서 천리(天理)의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의 도수(度數)에 대하여 하나하나 강구하여 확립하도록 하라. 그 다음에 《서경(書經)》을 읽어서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에 대하여 하나하나 요점을 잡아 근본을 추구하라. 그 다음에 《역경(易經)》을 읽어서 길흉(吉凶), 존망(存亡), 진퇴(進退), 소장(消長)의 이치에 대하여 하나하나 관찰하고 완미하여 깊이 연구하라. 그 다음에 《춘추(春秋)》를 읽어서 성현이 선악(善惡)에 대하여 상주고 벌주며, 억양 조종(抑揚操縱)한 미사 오의(微辭奧義)에 대하여 하나하나 정밀하게 연구하여 깨닫도록 하라. 송(宋)나라 선정(先正)이 지은 책으로 《근사록(近思錄)》, 《가례(家禮)》, 《심경(心經)》,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어류(語類)》와 그 밖의 성리서(性理書) 같은 것들을 틈나는 대로 정밀하게 읽어라. 또한 사서(史書)도 읽어 고금(古今)의 사변(事變)에 달통하도록 하라. 그러나 이단(異端)과 잡류(雜類)의 부정한 책들은 잠시라도 읽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독서할 때에는 다른 뜻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 다만 본문(本文)에 나아가 현재 있는 뜻을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
한훤당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니, 《소학》을 주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모두 여기에 있다.” 하였다.
서봉(西峯) 유우(柳藕)가 말하기를, “《대학》은 바로 덕에 들어가는 큰 틀로서 예를 들면 집의 간가(間架)에 해당하고, 그 밖의 육경(六經)과 《논어》, 《맹자》, 《중용》은 창문, 벽, 문, 차양으로 꾸미는 것과 같으니, 비록 다른 경을 읽더라도 이 책 1부(部)를 곁에 두어 수시로 보는 것이 좋다.” 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주역(周易)》은 바로 이치의 연원(淵源)이 되는 책이니, 참으로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학자(學者)에게 간절하여 날마다 해야 하는 공부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만 못하기 때문에 선정(先正) 가운데 혹 ‘급히 배울 책이 아니다.’ 하였으나, 실은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극진히 하는 학문에 있어서 이 책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문을 알고자 한다면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쉽게 힘쓸 곳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체단(體段)을 알아야 한다.” 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글을 많이 가르쳤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19세에 처음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얻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 권 읽었다. 깊이 생각하여 몸소 깨달아 점점 문로(門路)를 얻게 되었고, 비로소 의리(義理)의 학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하였다.
상론(尙論)
정도가(鄭道可.정구)가 묻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죽음은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하였는데, 퇴계가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허물 있는 것 가운데서 허물없는 것을 찾아야지 허물없는 것 가운데서 허물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포은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천지와 우주의 근간이 될 만한데, 세상에서 의논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 공격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끊임없이 떠들어 대니, 매번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사자(寫字)
퇴계는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글자를 반듯하게 써서 비록 과문(科文)이나 잡서(雜書)를 베낄 때라 하더라도 대충대충 베낀 적이 드물었다. 일찍이 손자 이안도(李安道)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모든 일은 삼가야 한다. 지금 네가 김이정(金而精.김취려)에게 준 편지를 보니, 글자를 크게 쓰면서 흘려 썼더구나. 조심해서 추잡하고 멋대로 하는 행동을 하지 마라.” 하였다.
작문(作文)
소고(嘯皐) 박승사(朴承仕)가 중년 이후에 시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길, “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만일 도에 뜻을 두었다면 과거 공부하는 것도 일상생활의 한 가지 일이다. 그런데 근래 사자(士子)들의 공통된 병통은 게을러서 스스로 ‘도학(道學)에 뜻을 두어 사모한다.’ 하면서 과거 공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 두 가지 다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글을 지었는데, 퇴계가 말하기를, “말은 의사만 충분히 전달되게 하면 되니, 학자는 문장(文章)에 대해 몰라서는 안 된다. 만약 문장에 대해 알지 못하면 비록 문자(文字)를 안다 하더라도 자기의 뜻을 말로 제대로 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유가(儒家)의 의미는 각별하니, 문예(文藝)를 전공하는 것이 유가가 아니며,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유가가 아니다. 세간(世間)의 허다한 영재(英才)들이 속학(俗學)에 빠져 있으니, 다시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위학(爲學)
율곡(栗谷)이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하지 않으면 참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도 이상하고 별다른 일이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해야 하며,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해야 하고, 부부간이 되어서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형제간이 되어서는 우애가 있어야 하고, 젊은 사람은 어른을 공경해야 하며, 붕우가 되어서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상생활하는 동안에 하는 일에 따라 각각 합당하게 할 뿐이니, 마음을 현묘한 데에 치달리게 하여 기이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사람은 심지가 막히고 식견이 어둡다. 그러므로 반드시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게 된 뒤에야 조예(造詣)가 바르게 되고 행동이 중도(中道)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멋대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할 일이라고 미룬 채 스스로는 자포자기하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입지(立志)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말하기를, “뜻이 먼저 확립되면 행동이 뒤따르게 되는 법이니, 반드시 고(鼓)ㆍ무(舞)ㆍ진(振)ㆍ작(作) 이 네 글자를 가지고 항상 스스로를 격앙(激昻)시켜야 한다.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은 비록 아름다운 자질이 있다 하더라도 성공할 이치가 없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뜻은 기운의 장수이니, 뜻이 한결같으면 기운이 움직인다. 학자들이 종신토록 책을 읽으면서도 능히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뜻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이 확립되지 못하는 데에는 세 가지 병통이 있다. 첫째는 믿지 못하는 것이니, 성현의 말을 사람들을 꼬이기 위하여 말한 것이라고 여겨서 다만 그 글을 완미하기만 하고 몸소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스스로 자질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겨서 쉽게 물러나 나아가면 성현이 되고 물러나면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셋째는 용맹스럽지 못한 것이니,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과 기질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조금 알기는 하지만 이전에 하던 버릇을 편안히 여긴 채 분연히 떨쳐 일어나지 못하여 어제 했던 것을 오늘 바꾸지 못하고 오늘 좋아하던 것을 내일 고치기를 꺼려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하여 한 치 앞으로 나아가고 한 자 뒤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용맹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병통이다. 사람에게 이러한 세 가지 병통이 있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에 나오지 않으며 육경(六經)이 빈말이 되는 것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변화 기질(變化氣質)
율곡이 말하기를, “사람은 용모가 못생긴 것을 곱게 바꿀 수 없고, 힘이 약한 것을 강하게 바꿀 수 없으며, 키가 작은 것을 크게 바꿀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정해진 분수이므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심지(心志)만은 어리석은 것을 지혜롭게 만들 수 있으며, 불초한 것을 현명하게 만들 수 있으니, 이는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타고날 때 받은 것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궁리(窮理)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18세에 《대학(大學)》을 읽었는데,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있다’는 구절에 이르러 개연히 탄식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사물의 이치를 먼저 궁구하지 않으면 독서한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에 천지 만물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 가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이미 통달한 뒤에는 또 다른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였는데 먹어도 음식 맛을 알지 못했고 길을 걸어가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으며, 낮인지 밤인지 더운지 추운지 따지지 않고 한방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6년 동안 모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가 제행(制行)이 매우 높더라도 본 것이 만약 분명하지 않다면 끝내 괜찮은 사람이 될 뿐이고, 또 결국은 퇴보하게 된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였다.
퇴계가 팔진도(八陣圖)를 언급하여 말하기를, “이것도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한 가지 일이니, 독서하는 겨를에 연구하면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성찰(省察)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니, ‘하늘을 섬기는 데에 미진한 점이 있었는가?’ ‘군주와 부모를 섬기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모든 악(惡)은 모두 근독(謹獨)을 하지 않은 데에서 나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근독을 한 뒤에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는 매번 한적하게 혼자 있을 때에도 예복을 입고 엄숙하게 앉아 더욱더 조심하고 삼갔다. 내자(內子)가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공경을 극진히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위에서는 하늘이 밝게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는 땅이 내 몸을 싣고 있으며, 그윽한 곳에서는 귀신이 가득하고, 밝은 곳에서는 처자(妻子)가 곁에 있으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극치(克治)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말하기를, “침잠(沈潛)한 사람은 반드시 강(剛)으로 다스려서 일을 해내야 하니, 천지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어느 일이건 간에 모두 해내는 것이다.” 하였다.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말하기를, “극기(克己)는 학문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가는 공부이다. 이른바 ‘기(己)’라는 것은 내 마음은 좋아하는데 천리(天理)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상생활할 적에 자세히 살펴 조금이라도 사(私)가 있는 것을 깨달으면 단칼에 잘라서 조금의 싹도 남김없이 심지(心地)를 깨끗이 씻어야 하니, 그렇게 하면 자연히 천리가 밝게 드러나고 인욕(人欲)이 물러나 천리의 명을 따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정암(靜菴)이 말하기를, “학자(學者)의 급선무는 의(義)와 이(利)를 분변하는 것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 사욕의 싹은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마음으로 생각하는 데에서부터 뿌리를 뽑아 버린 뒤에야 편안히 학문할 수 있다. 일찍이 ‘정승 허조(許稠)가 책상을 마주하고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한밤중에 도둑이 방으로 들어왔다. 공(公)은 깨어 있었는데도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도둑이 간 뒤에 집안사람들이 이를 알고는 아쉬워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적(賊)이 마음에 와서 싸우니, 어느 겨를에 밖에서 온 적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선배들의 극기(克己) 공부가 이와 같았다.” 하였다.
논경(論敬)
퇴계가 말하기를, “경(敬)에 대해 말한 것이 비록 많지만, 정자(程子), 사현도(謝顯道), 윤순(尹淳), 주자(朱子)의 설보다 간절한 것은 없다. 초학자(初學者)를 위한 방책으로는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히 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찾아서도 안 되고 안배(安排)해서도 안 된다. 다만 올바른 법도에 입각하여 잠깐 동안이나 은미한 사이에도 계신 공구(戒愼恐懼)하여 이 마음이 방일(放逸)하게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렇게 오래 하면 자연히 흐릿하지 않고 깨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남명은 항상 금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성성자(惺惺子)’라고 불렀다. 때때로 흔들어서 정신을 환기시켰다.
이단(異端)
퇴계는 산승(山僧)이 시를 청하면 비록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노을이나 안개, 물과 돌의 경치만 묘사했지 ‘승(僧)’ 자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또한 이런 작품 자체가 드물었다. 또 말하기를, “진백사(陳白沙.진헌장)와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은 육상산(陸象山)에게서 나왔다. 진백사의 학문은 그래도 완전한 선학(禪學)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기를, ‘성현의 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번다한 것을 버리고 핵심적인 것을 구한 뒤에야 마음의 본체가 드러나서 일상생활할 때에 각각 두서(頭緖)가 있고 확연히 자신이 있게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깨달음에 들어간 곳은 결국 선(禪)의 방법이었다. 왕양명에 이르러서는 학술이 매우 어긋났으니, 인의(仁義)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힌 이는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마음이 바로 이[心卽理也]’라는 설을 주창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다만 내 안에 있고 사물에는 있지 않으니, 학자는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려고 힘써야 하지 사물에서 이치를 구해서는 안 된다. 비록 오륜(五倫)처럼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며 깎아 버려도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어찌 불가(佛家)의 가르침과 다름이 있겠는가. 궁리(窮理)의 학문을 배척하고자 해서는 주자(朱子)의 설을 홍수나 맹수의 재해와 같다고 하였고, 번다한 글의 폐해를 없애고자 해서는 진시황(秦始皇)이 책을 불사른 것이 공자가 시를 산정(刪定)한 뜻을 터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이와 같은데도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광혹(狂惑)하고 마음을 상실한 사람이 아니다.’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불씨(佛氏.석가)의 폐해는 외적이 침략한 것과 같고, 육씨(陸氏.육구연)의 폐해는 간신이 나라를 그르친 것과 같다.” 하였다.
성의(誠意)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칼을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칼로 의리(義利)의 관건(關鍵)을 끊어서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구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기(養氣)
정암(靜菴)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안자(顔子)가 되기를 바라면 또한 안자가 될 수 있다.’ 하였는데, 요체는 마음씀이 강(剛)한가에 달려 있으니, 마음이 강하면 선을 행하기가 어렵지 않다. 나 같은 사람도 맑은 밤 고요할 때에는 간혹 지기(志氣)가 맑아질 때가 있다. 만일 그것을 잃지 않고 잘 기른다면 옛사람같이 될 수도 있지만, 마음씀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날 도로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조존(操存)
퇴계가 말하기를, “심기(心氣)의 병통은 바로 이치를 살피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여 쓸데없는 데에 공연히 힘을 쓰고 마음을 잡는 방법이 어두워 억지로 조장하는 데에서 연유하니, 자기도 모르게 심력(心力)을 수고롭히다가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초학자(初學者)들의 공통된 병통이니, 빨리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그 병통이 고질화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우선 세간(世間)의 궁통(窮通), 득실(得失), 영욕(榮辱), 이해(利害)를 모두 도외시하여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수작(酬酌)을 적게 하고 기욕(嗜欲)을 절제하여 텅 빈 마음으로 한가로움과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고, 참으로 내 마음과 합치되어 깨달음을 주는 도서(圖書)나 화초(花草), 계곡이나 산, 물고기와 새 같은 것들을 싫어하지 않고 항상 접하여 이 심기가 항상 편안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다. 책을 볼 때에는 마음을 수고롭히지 말고 많이 보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다만 뜻에 따라 맛을 즐기며 이치를 궁구하여 일상생활 가운데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깨달아 익숙하게 하고, 이미 알게 된 것을 충분히 음미하여 뜻을 쓰는 것도 아니고 뜻을 안 쓰는 것도 아닌 사이에서 오랫동안 살피고 잊지 않는다면, 자연히 융회관통(融會貫通)하여 터득하는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더더욱 금해야 할 것은 집착하고 속박해서 빠른 효험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일욕(逸欲)
남명 조식이 말하기를, “천하에서 제일 넘기 어려운 관문(關門)은 바로 화류관(花柳關.여색에 빠지는 것)이다.” 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울 때에 욕심이 가장 잘 옮겨지는 법이다. 나는 일찍이 이 점에 힘을 썼는데, 사인(舍人)이 되었을 때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들이 앞에 가득하자, 곧 좋아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한 자락 있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통렬하게 욕심을 막고자 하더라도 겨우 최악의 상황만을 면할 뿐이니, 그 기틀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밭을 사면서 값을 따질 적에 공평하게 하는 것은 이치상 면할 수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곧 이로 인하여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정신을 집중하여 의(義)와 이(利)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군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바로 소인(小人)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선을 행하여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이심(利心)이니, 군자는 담을 넘어가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나쁘게 본다. 그러니 불선(不善)한 짓을 해서 이익을 취하는 짓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기량(器量)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관대(寬大)하기를 힘써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의 과거 잘못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어린아이나 종들이 죽 늘어서서 울고 소리 질러도 조금도 꾸짖거나 금하지 않았다. 일찍이 요좌(僚佐.소속 관리)를 불러다 일을 의논하고 막 붓을 적셔 문서를 쓰려고 할 적에 어린 종이 그 위에 오줌을 누었는데, 공은 다만 손으로 그것을 문질러 닦을 뿐이었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과 동향(同鄕)으로 본부(本府)의 교관(敎官)이 된 사람이 와서 공을 뵙고 가다가 길에서 이서(吏胥)를 때렸다. 부사(府使)가 이 소문을 듣고 직접 죄를 따지자, 교관이 황급해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권공(權公)이 한 것입니다.” 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이서를 매질해서 사사로움을 이루는 짓을 권상(權相)도 한단 말인가?” 하면서 꾸짖는 말을 계속하였으나 공은 끝내 변론하지 않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행실은 돈후(敦厚)한 것이 귀하고, 뜻은 용맹스럽게 행하는 것이 귀하며, 학문은 순정(醇正)한 것이 귀하니, 충신(忠信)과 독실(篤實)을 위주로 해야 한다.” 하였다.
경신(敬身)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는 9세 때에 항상 장기를 두었다. 그의 아버지가 보고서 아내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이미 무익한 일을 배웠으니, 어떻게 훌륭하게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울면서 고하기를, “우연히 배웠는데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몸에 해가 된다면 어찌 감히 배워서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평생토록 장기를 두지 않았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방 안에 혼자 앉아서 본원(本原)을 함양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비록 오만한 기색을 두지 않았지만 절로 범하기 어려운 기색이 있었다.
회재(晦齋)는 크게 정력(定力.번뇌와 망상을 제거한 禪定의 힘)이 있어서 아무리 갑작스럽게 일이 닥치더라도 말을 빨리 한다거나 안색을 바꾼 적이 없이 정정(靜正)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전주(全州)에 있을 때 절일(節日)에 민간 놀이가 행해졌는데, 감사(監司)인 김공(金公)은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었는데도 가끔 돌아보며 웃었지만, 선생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초연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도봉산(道峯山) 망월암(望月菴)에 올라가서 마음을 거두고 무릎 꿇고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마침 승려들이 당(堂) 안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자 일어나 그 쪽을 쳐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스스로 뉘우치기를,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었으니, 어떻게 공부를 하겠는가.” 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문인을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제1보(步)를 걸으면 마음이 제1보에 있고, 제2보를 걸으면 마음이 제2보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근언(謹言)
회재는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동료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하루종일 말이 없었는데, 이는 지경(持敬) 공부가 깊어서이지 억지로 꾸며서 한 것은 아니었다.
퇴계는 논변(論辯)할 적에 기운은 온화하고 말은 유창하며, 이치는 분명하고 의리는 안정되어서 비록 여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말을 하더라도 뒤섞여 말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저들의 말이 그치기를 기다려 천천히 한마디 말로써 조리 있게 분석하였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자신만 옳다고 하지는 않고 다만 “나의 의견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만 말하였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평생 괴이한 언행을 싫어하였다. 고을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온종일 말하고 웃었지만 그가 괴이한 말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은 조정(朝廷)의 이해와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하여 비록 말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함께 대응하지 않았다. 한 조사(朝士)가 와서 시사(時事)를 말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산 속에서는 산 속의 말을 해야 한다.” 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말하기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시에, ‘세상일 거침없이 논할 필요 없으니, 산 얘기 물 얘기만 해도 할 얘기가 많다네.[捫虱何須談世事 談山談水亦多談]’ 하였고,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시에, ‘사람 만나 산속 일 얘기하기가 싫으니, 산속 일만 얘기해도 사람을 거스르네.[逢人不喜談山事 山事談來亦忤人]’ 하였는데, 뒤의 시가 더욱 고상하다.” 하였다.
퇴계는 친구의 허물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정색(正色)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안처함(安處諴)이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말하기를, “30세 이후에 감시(監試)를 보고 40세 이후에 동당시(東堂試)를 볼 것이니, 그 이전에는 절대로 응시하지 않겠다.” 하였다. 무인년에는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이 사마시(司馬試)를 보라고 명하자, 대답하기를, “군자의 한마디 말은 천 년이 지나도 바꿀 수 없는 법이니, 어려서 벗과 한 말을 지금 바꿀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의복(衣服)
정암(靜菴)이 말하기를, “의장(衣章)은 한 몸의 의표(儀表)이니, 깨끗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월천 조목은 관을 바로 쓰지 않은 자제(子弟)를 보고 엄하게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에 관영(管寧)이 풍파(風波)를 만나자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평생 다른 죄는 없고, 다만 세 번 새벽에 민머리인 채로 관을 쓰지 않고 지냈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매우 나쁜 일이다. 삼가서 이와 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은 몸을 감쌀 정도로만 옷을 해 입었고, 항상 개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었으며, 명주로 만든 옷은 몸에 걸치지 않았다.
음식(飮食)
상국(相國) 안현(安玹)은 베로 만든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평생을 보냈다. 하루는 손님이 공을 방문하여 밥상을 내왔는데, 오직 콩잎국뿐이었다. 공이 맛을 보지도 않고 밥을 마니, 손님이 말하기를, “만약 국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맛도 보지 않고 먼저 밥을 맙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국이 만약 입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말하기를, “술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다. 지금 다행히 병 때문에 술을 끊었는데, 이는 정신을 잘 길러서 편히 장수(長壽)할 징조이다. 아주 통렬하게 술을 끊어서 누룩이나 술잔, 술동이 따위를 일절 집 안에 두지 말 것이니, 출전(出戰)할 때에 가마솥을 부수고 집을 태우거나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불살라 버리듯이 단호한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기욕(嗜欲)에 뜻을 빼앗겨 한번 입 언저리에 대면 옛 맛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니, 매우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정가(正家)
한훤당(寒暄堂)은 생각하기를, “우리나라 사대부들 가운데 가훈(家訓)을 세운 이가 드물기 때문에 감화하여 인도하는 것이 처자(妻子)에게 미치지 않고, 가르침의 은택이 종들에게 내려가지 않는다.” 하고, 이어서 내칙(內則)을 모방하여 의절(儀節)을 만들었다. 내외(內外)의 남자 종이나 여자 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녀를 구분하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정한 다음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는가 게을리 하는가를 보아서 권면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는 규칙을 만들었고, 경비가 드는 길사(吉事)와 흉사(凶事) 때에는 많이 줄 것인가 적게 줄 것인가를 조절하였으며, 매번 초하루와 보름에 국법(國法)을 읽어 정돈하게 하였다. 이것이 그의 가훈(家訓)이었다.
제사(祭祀)
퇴계가 말하기를, “기일(忌日)에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마을 사람들을 부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청송 성수침은 묘제(墓祭)를 번갈아 제사 지내는 것이 간혹 정성스럽고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묘제법(墓祭法)을 세웠다. 묘전(墓田)과 종을 두고, 묘 아래에 집을 지어 물품을 보관하는 각(閣)을 두고 곡식을 넣어 둘 창고를 두었으며, 음식을 마련할 부엌을 만들고 치재(致齋)할 방을 만드는 따위의 모든 설비를 다 갖추었다. 그리고 상석(床席)과 기용(器用) 등 자잘한 것까지 모두 빈틈없이 계획하였고, 장부를 만들어서 장구한 계책으로 삼았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은 제사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제반 기용(器用)은 별도의 장소에 보관하였고, 집안 식구와 집사(執事)들은 모두 미리 목욕하고 입과 코를 베로 막은 뒤에 그릇을 닦고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우물도 미리 깨끗하게 청소하여 다른 사람들이 긷지 못하게 하였고, 술과 장류(醬類)도 따로 마련해 두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부모 기일(忌日) 때마다 쌀 한 톨도 먹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눈물을 흘렸다.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부모의 기일이 되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원령(圓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치재(致齋)하였다.
부부(夫婦)
남명(南冥)이 말하기를, “평상시 지낼 때에 처자(妻子)와 함께 처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자질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점차 거기에 빠져서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부부(夫婦)는 인륜의 지극함이고 온갖 복의 근원이다. 비록 지극히 친밀하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삼가야 할 관계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우하고 공경할 것을 잊어서 대번에 서로 지나치게 가깝게 되어 마침내 업신여기고 능멸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두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아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의당 처음을 삼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에, 일곱 살이 넘으면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수숙(嫂叔.형제의 아내와 남편의 형제) 간에는 서로 안부를 묻지 않게 하였으니, 혐의를 구별하고 은미한 데서 삼가는 뜻이 지극히 치밀하고 자세하였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뒷날의 혐의를 막을 방법이 없어서 음란하고 방종하게 되는 단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친척이 서로 만났을 때에 구별을 하면 곧 ‘친척 간에 화목이 부족하다.’ 하고, 질서도 법도도 없는 집안을 가리켜 ‘친척 간에 사이가 좋다.’ 하면서, 심지어는 무릎을 대고 앉고 같은 상(床)에서 먹으면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 대고 멋대로 웃어서 점점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 들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비방이 뜻밖에 일어나기도 하고 변고가 집안에서 생기기도 하여 자신이나 집안이 망하게 된 뒤에야 후회를 하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퇴계의 가서(家書)에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아직까지 안에서 지낸다고 들었는데, 《예기(禮記)》에 ‘남자는 열 살이면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거주한다.’ 하였다. 지금 이 아이가 이미 열서너 살인데, 아직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형수를 만나면 비록 하루에 여러 번 보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절하고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어하(御下)
조린(趙遴)은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에 말을 빠르게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가르쳐 준 뒤에 형벌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말로 형벌을 대신해야 좋다.” 하였다.
치산(治産)
퇴계의 가서(家書)에 말하기를, “생산(生産)을 경영하는 등의 일은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된다. 이 아비도 평생 비록 서툴기는 했지만 어찌 하나도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내면으로 운치 있고 고상한 것에 전념하면서 혹 밖으로 일에 응하면 사풍(士風)이 실추되지 않아 해(害)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일 격조 있고 고상한 것을 완전히 잊고 경영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바로 농부(農夫)의 일로서 향리(鄕里)의 속인(俗人)이 될 뿐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대체로 군자는 의당 풍소(風素.풍채와 소양), 문아(文雅)와 염담(恬淡), 과욕(寡欲)으로 스스로를 처신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생업에 미치면 해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일 세속의 일에 끌려서 뜻으로 삼은 일을 폐한다면 끝내 향리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검약(儉約)
퇴계는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검소하였다. 도자기에 세수를 하고, 부들 자리에 앉았으며, 베옷을 입고 끈으로 띠를 하며, 칡으로 만든 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는 등 마음이 담박하였다. 시냇가에 있던 집은 겨우 십여 가(架)로서 매서운 추위와 더위, 비 올 때에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는데, 선생은 여유 있게 그곳에 거처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서 말하기를, “고인(古人)은 ‘궁(窮)’ 자에 ‘고(固)’라는 글자 하나를 더 놓았으니, 고(固)는 바로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지키는 것이 이미 굳으면 점점 의미(意味)를 깨닫게 될 것이니, 어찌 탄식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천명(天命)처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바로 스스로 힘써야 할 부분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가난이 비록 선비의 일반적인 분수지만, 극도로 가난하게 되면 또한 스스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오직 이러한 상황을 잘 대처한 고인(古人)을 생각해서 스스로 견뎌 내면 또한 아주 편안해져서 손상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중용(中庸)》에서 말한 ‘군자가 빈천에 처해서 빈천에 맞게 살면 어느 것을 하든지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와 같은 것은 또한 특별한 경지이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내 가슴속에 이러한 생각을 항상 갖고 있으면 또한 청량산(淸涼散)을 한 번 복용한 것과 같아질 것이다.” 하였다.
지신(持身)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말하기를, “자신을 보존하는 데는 삼가는 것이 가장 좋으니, 《주역(周易)》 64괘(卦) 가운데 겸괘(謙卦)에만 흉함이 없다.” 하였다.
권질(權礩)은 퇴계의 장인인데, 집이 서울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었다. 일찍이 이 집을 퇴계에게 주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에 서울에 들어가서 다른 집에서 임시로 머문 적은 있었지만 거기에서 머문 적은 없었다.
조수(操守)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이 정순붕(鄭順朋)이 아뢴 것 때문에 파직되자, 도성 안이 술렁거리며 두려워하였다. 사위 홍인수(洪仁壽)가 달려와서 공을 뵈었는데, 사위를 대하는 말과 안색이 평소와 같았다. 그 뒤 죄가 더해져 태천(泰川)에 유배되자, 고을 사람들이 와서 이별하였는데,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손을 잡고 목이 쉬도록 우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장부라고 여겼는데,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하는가.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천명이다.” 하고, 태연히 길을 떠났다. 의금부 낭관이 말을 달려 와서 일행들이 놀랐는데, 공은 정색(正色)을 하고 꾸짖었다. 도착해서 보니, 삭주(朔州)로 옮겨 유배된 것이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김안로(金安老)에게 미움을 사 귀양 갔었는데, 김안로가 죄를 받게 되자 소환되었다. 종이 조보(朝報)를 가지고 급히 와서 한밤중에 귀양지에 도착했는데, 쓰러져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자제가 황공(惶恐)해서 주머니 속의 소식을 꺼내 보니, 바로 좋은 소식이었다. 공에게 아뢰니, 공은 “그런가.”라고만 말하고, 숨소리를 크게 내면서 달게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그 글을 보았다.
의명(義命)
일두(一蠧) 정여창(鄭汝昌)은 종성(鍾城)에 귀양 가 뜰에서 횃불을 붙이는 일을 하였다. 사자(使者)가 종성부(鍾城府)에 들어올 때마다 반드시 몸소 불을 살랐는데, 7년 동안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다.
한훤당 김굉필은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어 화기(禍機)를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선생은 태연하게 처신하면서 평소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갑자년(1504, 연산10)에 죄가 더해지자, 선생은 명을 듣고는 목욕하고 관디를 갖춘 다음 신색(神色)을 바꾸지 않고서 형(刑)을 받았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이기(李芑)에게 미움을 사서 마침내 사형이 내려졌다. 사자(使者)가 문에 도착하였을 때가 마침 공의 생일이어서 친족과 문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온 집안 식구들이 목놓아 울었다. 그러나 공은 신색(神色)을 바꾸지 않고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었는데, 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았다. 아들에게 글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를 경계 삼지 말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술과 여색을 경계하여 구천(九泉)에 있는 원혼(冤魂)을 위로하라. 부끄러운 채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마침내 태연하게 죽음에 나아갔다.
사수(辭受)
율곡이 말하기를, “신하와 인군과의 관계는 자식과 아버지와의 관계와 같으니, 부자 사이에 무슨 말인들 다 말하지 못하며 무슨 생각인들 다 진달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이 편치 않으면 사직하고, 몸에 병이 있으면 사직하고, 분수상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면 사직했으되 번거롭게 아뢰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군부(君父) 된 이도 사직한 내용에 따라 모두 잘 처리해 주어 반드시 그 도를 극진히 함으로써 군신(君臣) 간에 마음이 서로 미덥게 되도록 하였다.”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말하기를, “붕우가 서로 도와주는 것은 고인(古人)이 독실히 행했던 일이다. 다만 자기의 형편에 알맞게 도와주고 자기의 능력을 헤아려서 구제해야 하니, 요점은 그 마음을 서로 극진하게 할 뿐이다. 그런 뒤에야 주는 자가 베푸는 데에 잘못되지 않고, 받는 자도 염치(廉恥)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한갓 도와주려는 성의만 가지고 도와줄 적절한 방법을 헤아리지 않아 능력상 할 수 없는데 억지로 구제하려 하고 재정상 힘이 부치는데도 굳이 베풀려고 한다면, 받는 자는 참으로 의(義)에 상처받고, 베푸는 자도 이(理)에 해가 될 것이다.” 하였다.
출입(出入)
퇴계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고 단정하게 지내서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사문(斯文)의 고상한 술자리나 동리(洞里)의 잔치에는 또한 때때로 갔다. 친척 간에 만약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경사(慶事)나 조사(弔事)가 있으면 가까운 곳은 반드시 직접 갔고, 먼 곳은 사람을 시켜 예를 표하게 하였는데, 늙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벼슬에 나가 서울에 있을 때에 사람들에게 끌려서 매일 술자리에 나아가 술을 마셨는데, 조금 한가한 날이면 문득 무료(無聊)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밤에 생각해 보면, 마음에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또 자중(子中) 정유일(鄭惟一)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기를, “현재의 효상(爻象)은 정혼(定婚)만 하고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자(處子)와 같으니, 어찌 경솔하게 스스로 가서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안으로는 만 길이나 되는 절벽같이 우뚝하게 뜻을 세우되 세상에 행할 때에는 매번 남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머리 하나만큼 낮추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만 한다.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천명(天命)을 따르기를 이와 같이 했는데도 혹 험난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명(命)이라고 할 것이니, 자기가 불러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의 문에 오를 적에 주인(主人)은 비록 믿을 수 있지만, 문하에 있는 빈객(賓客)들이야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발짝 내딛거나 한마디 할 때에 칭찬을 받지 않으면 반드시 비난을 받으니, 비난을 받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만 칭찬을 받는 것은 더 걱정스러운 일이다. 고인(古人)이 후진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오늘 인군 앞에서 표창을 받고 내일 재상이 있는 곳에서 칭찬을 받으면, 이로 인하여 스스로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절실한 의논이다.” 하였다.
장유(長幼)
퇴계가 말하기를, “나이가 나보다 많을 경우, 아버지로 섬기거나 형으로 섬기거나 하는 차등이 있는 것은 대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사이에 다시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 될 현우(賢愚), 귀천(貴賤), 분의(分義), 융쇄(隆殺)의 차등이 있으니,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므로 한 가지 설로 억지로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사문(師門)의 필찰(筆札)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손을 씻은 뒤 예복(禮服)을 입고, 향을 사르고 두 번 절한 다음에 읽었다. 또 심부름 온 노비에게도 빈례(賓禮)로 대우하였다.
정도가(鄭道可.정구)가 묻기를, “어렸을 때 글자를 조금 가르쳐 준 스승에게도 모두 절해야 합니까?” 하였는데, 퇴계가 답하기를, “고인(古人)이 스승을 위해 입는 복(服)을 두지 않은 것은 경중(輕重)을 일정하게 하기 곤란하여 미리 법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니, 절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하였다.
송재(松齋) 이우(李堣)는 정암(靜菴)이나 충암(沖菴)과 함께 도의(道義)로 교제하여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이들을 만나 커다란 이불을 펴고 긴 베개를 베고서 같이 잤다. 항상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현자(賢者)들과 국사를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치고, 초야에서는 유일(遺逸)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니, 이는 모두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다.” 하였다.
접빈(接賓)
퇴계가 말하기를, “사람을 대하는 도는 각각 상대에게 달려 있으니, 어떻게 노소(老少)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일체 다 공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처음부터 홀만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가장(家長)이 나가서 손님을 맞이하라고 시키면, 저는 나가서 손님에게 절하지 않고 손님이 들어와 좌정(坐定)한 뒤에 절을 해야 합니까?”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존장(尊長)을 대신하여 손님을 맞이하면서 절하지 않는 것은 의리상 온당치 않다. 만약 어른이 직접 맞이한다면 우선 피하고 절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퇴계는 비록 문인(門人)이나 손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 멀리 떠나게 되면 반드시 술자리를 베풀고 당(堂)을 내려와 전송하였으며, 평상시 왕래할 때에는 다만 자리에서만 일어나 절하였다. 만약 존귀한 손님이 오셨을 경우에는 관복(官服)을 갖추되 사모(紗帽)는 쓰지 않은 채 대문 밖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는데, 오르내리고 읍양(揖讓)하는 것들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손님이 오면 항상 술과 고기를 차렸는데, 반드시 미리 집사람에게 마련하게 해서 손님 앞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에 맞추어서 비록 존귀한 손님이 왔다 하더라도 성대히 음식을 차리지 않았고, 항렬이 낮거나 나이 어린 사람이 왔다 하더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에는 주량(酒量)에 따라 즐겼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명(李銘)이 와서 선생을 뵐 적에, 오만하고 무례하여 태연히 침을 뱉고 병풍과 족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서화(書畫)를 평론하였지만, 선생은 묻는 대로 대답하고 조금도 기미(機微)를 내색하지 않았다. 정완(鄭浣)은 정려(旌閭)를 만나면 반드시 몸을 숙이고 용모를 고쳤다.
독의(篤義)
상국(相國) 상진(尙震)은 뜰에서 완상(玩賞)할 만한 벌레나 짐승은 반드시 놓아주면서 말하기를,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은 너나 나나 같은 마음이다.” 하였고, 맛있는 요리가 될 만한 것들은 반드시 살릴 방도를 찾으며 말하기를, “어찌 차마 산 것을 대하여 먹기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처세(處世)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가 정암(靜菴)을 경계시킨 글에서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무리지어 살면서 높게 날거나 멀리 달려서는 안 되니, 반드시 세속과 조금 맞추어야 사람들의 질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둔 고을 사람이 품관(品官)의 반열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퇴계가 말하기를, “향당(鄕黨)은 부모와 종족이 계신 곳이니, 나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비록 아래에 거한다 하더라도 예(禮)로 보나 의(義)로 보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 반드시 하호(下戶)보다 먼저 세금을 실어 보냈는데, 이서(吏胥)들은 영달한 집안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시냇가에 앉아 있었는데, 색부(嗇夫)가 와서 고하기를, “올해 잣나무 숲을 단속하는 일은 나리 댁이 맡았나 봅니다.”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고을의 집강(執綱.이장이나 면장)을 만나면 비록 연소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예를 표하였다. 퇴계가 일찍이 한성(漢城)에 있을 때에, 이웃집 밤이 뜰 가운데에 떨어지면 주워서 돌려주게 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이웃이 상을 당하면 비록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죽을 먹었는데, 배부르게 먹은 적이 없었다.
녹사(錄司) 양성의(梁成義)가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었을 때에, 퇴계는 백성의 주인이 된 자에 대한 예를 극진히 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공경하였는데, 양성의는 도리어 수령의 존귀함을 빙자하여 매우 거만하게 말하였다. 이를 들은 자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화를 냈지만, 선생은 끝내 그의 잘못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사군(事君)
포은 정몽주가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하고자 하였으므로 태종대왕이 잔치를 열고 그를 초대해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술을 권하면서 그의 의중을 살폈는데, 공이 화답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어찌 다할 리 있으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沒埋也]” 하니, 태종은 공이 절개를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의논하여 제거하였다.
거관(居官)
학봉 김성일이 고을 수령이 되었을 때에, 상관(上官)이 올 때마다 반드시 공복(公服)을 입고 관문 밖에서 기다렸다.
사단(四端)
정암 조광조가 말하기를, “사람은 천지의 중(中)을 받아서 태어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만 갖고 있을 뿐이니, 어찌 천리(天理)에 악한 것이 있겠는가.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기 때문에 어긋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고식적(姑息的)이거나 나약(懦弱)한 것은 인이 어긋난 것이고, 포학하고 사나운 것은 의가 어긋난 것이며, 아첨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예가 어긋난 것이고, 간사하고 속이는 것은 지가 어긋난 것이다.” 하였다.
도통(道統)
우리나라의 학문(學問)은, 기자(箕子) 시대에는 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三國) 시대에는 천성(天性)이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의 공효가 없었으며, 고려(高麗) 시대에는 비록 학문을 하기는 하였지만 문장만을 위주로 하였다. 고려 말의 우탁(禹倬)과 정몽주(鄭夢周) 이후에야 비로소 성리학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서야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게 새로워졌다. 동방(東方)의 학문이 서로 전해진 차례를 말하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가 되고, 길재(吉再)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淑滋)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절로 연원(淵源)의 전해짐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