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는 울고 있다. 두려워서 울고, 아파서 울고, 배가 고파 울고, 목이 말라 울고 있다. 울면 소리가 난다.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아이티 하늘을 울릴 것 같지만 아이티에서 통곡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울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이티에 규모 7.3의 지진으로 10만 명 사망’이란 뉴스를 접하고 1월 13일 저녁 3만 달러를 들고 우리 팀 4명은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서 하룻밤을 자고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해 구호품을 구입했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목사님에게서 3만 달러를 보내겠다는 전화가 왔다. 구호금이 6만 달러로 늘었다. 링거주사액 1만 3천 병을 비롯한 의약품 두 트럭, 쌀과 물 등 먹을 것 두 트럭을 구입했다.
구호품을 트럭 4대에 싣고 1월 15일 육로로 아이티를 향했다. 다섯 시간을 달려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 국경을 한 시간 거리에 남겨 두고 아이티에서 경찰관 다섯 명이 성난 아이티 사람들에 의해 죽었고, UN창고도 털렸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방금 아이티에서 나온 사람을 통해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 날 아침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발행되는 신문 첫 화면에 실린 사진이 떠올랐다. 수많은 시신들 사이에서 가족을 찾고 있는 한 사람 사진이 1면에 크게 실렸다. 사진 속 시신들을 처음에는 환자인 줄 알았다. 나중에 기사를 보고서야 그것이 시신인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속 가야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가? 우리 팀과 동행하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 주재 아이티 영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영사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이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차를 함께 타고 있던 일행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을 하루 두 세시간 밖에 자지 못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이티 국경을 밤에 넘었다. 아이티는 깜깜했다. 강진과 함께 전기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다.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을 지날 때는 차가 속도를 냈다. 말이 없었다. 국경에서 1시간쯤 달리자 아이티 수도 포르토 프랭스가 나타났다. 지진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있었다. ‘지진 피해를 입은 불쌍한 사람들’로 보여야 하는데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들’로 보였다. 자유무역지대인 소나피공단에 도착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을 비롯한 몇 나라에서 온 NGO들이 그 공단 안에 캠프를 설치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UN군이 공단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 아침 구호계획을 세우기 위해 지진현장을 차를 타고 둘러보았다. 지진 피해가 심하다는 주요 네 지역을 돌아보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거리에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 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티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도 마당이나 길에서 잔다. 집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도 집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지금도 여진이 있다.
시내로 들어서자 강진의 흔적이 나타나기 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참상은 이내 눈앞에 펼쳐졌다. 큰길가는 시신들을 대부분 치웠지만 안쪽 길로 들어가자 여기 저기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천에 싸인 시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그 앞을 사람들이 코를 막고 지나가고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시신이 부패되면서 나는 악취를 막지는 못했다. 이렇게 길가에 널린 시신들은 사람들이 수습하지 못하고 중장비를 이용해 처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시신이 쓰레기와 같이 처리되는 기가막힌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우리 팀은 현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구입해 가지고 온 의약품 두 트럭을 몇 개의 병원에 전달했다. 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우리에게 마취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고 있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마취제를 찾았다. 마취제를 구호품 목록에서 마지막에 제외시킨 것이 가슴 아팠다.
1월 17일 트럭 두 대에 실린 쌀과 물 그리고 크래커와 생리대를 폴 운동장에 있는 이재민들에게 직접 나눠주기로 했다. 이석진목사님이 선발대로 갔다. 오전 10시, UN군 13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재민 9천명 정도가 모여있는 폴 운동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UN군이 우리 팀을 데려다 준 곳은 국립운동장이었다.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현장 상황이 구호품을 직접 나눠주기에는 무리였다. 구호캠프로 되돌아왔다. 안전을 고려해서 구호품 전달 방식을 직접에서 간접으로 바꾸어 구호품 전달을 마쳤다.
1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팀이 현지에서 사역하는 동안 봉사단 계좌로 5천만원이 들어와 있었다. 도미니카공화국 주재 아이티 영사와 현지에 있는 김현철선교사님에게 연락해 마취제를 중심으로 의약품 4만 달러어치를 구입해 22일 아이티로 들어가도록 했다.
유난히 슬픈 역사가 많은 나라, 아이티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
[2010 아이티강진긴급구호](5)시내 지진피해 현장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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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세 특파원 아이티 취재기(2010. 1.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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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전 "물 한병, 라이터 두라" 조언들어 WP는 위험지역취재 지원팀 운영하는데…
아이티로 들어가는 길목은 정체됐다. 지진발생 이틀째, 아침에 부장의 전화를 받고, 오후에 곧바로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 도밍고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호전되지 않는 포르토프랭스 공항의 상황에 발목이 잡혀 도미니카 공화국 서쪽의 이사벨라 공항에서 하루를 허비했다. 유엔에 부탁해 유엔 특별기를 탈 예정이었지만, 늘 그렇듯 유엔이 하는 일에 확실한 것은 없었다.
도미니카 주재 한국 영사관은 "지금 안전을 위해 교민들을 소개하는 상황인데, 거꾸로 들어가려고 한다니…“라며 만류했고, 아이티에서 막 빠져나온 현대중공업 등 직원들은 “거기는 지진나기 전에도 치안이 위험한 곳인데…”라고 겁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아이티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는 것이었다.
일은 뜻밖에 풀렸다. 저녁을 먹으러 잠시 들른 산토 도밍고의 한국식당에서 의약품을 들고 다음날 새벽 포르토프랭스로 들어가는 한국 선교사 일행을 만났다. 트럭 3대와 버스 1대가 들어가는 행렬은 도미니카 주재 아이티 대사가 안내했다. 산토 도밍고에서 하루를 지체하는 동안 한국 취재진은 점점 늘어나 혹처럼 길게 이 버스에 붙었다. 새벽에 울린 부장의 전화가 귀를 맴돌았다. “다른 신문과 차별화를 했으면 좋겠는데….” 같은 동선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쓸 수 있을 것인가.
아이티 영사와 그의 약혼녀이자 비서가 같이 타고 가는 지프에 무조건 올라타기로 작정했다. 10년이 넘은 고물 지프는 천장 내부 지붕이 벗겨졌고, 오른쪽 헤드라이트 등이 깨져 있었다. 영사와 약혼녀는 도미니카에서 각각 의대를 졸업하고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들도 아이티에 있는 부모와 가족들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러 들어가는 귀향길인 셈이었다. 뒷좌석은 물병과 의약품, 비상식량으로 가득 찼지만, 이를 뒤쪽으로 밀어 수북이 쌓아올려 놓고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 앉았다. 한자리 더 남은 공간엔 구호단을 이끄는 조현삼 목사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약 8시간의 독점 취재 기회가 제공된 것이다. 영사 커플의 부모들은 아이티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에 살았다. 속으로 ‘아이티 외교관 커플의 비극의 귀향’이라고 지레 제목을 뽑고 있었다. 하지만 얘기를 할수록 이들에 대한 연민이 깊어지면서 고민이 생겼다.
아이티에 도착한 다음날, 차 안에서 미리 확보한 휴대폰 번호를 들여다보며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 나는 사망소식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들의 부모가 생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혹시 기쁨보다는 실망이 묻은 내 목소리를 발견하고 그들은 배반감을 느끼지 않을까. 결국 전화를 걸었지만, 아이티에서 전화는 터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 커플의 부모들은 다행히 모두 살아있었다. 지프에 올라탄 것이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사의 지프는 가는 도중, 고장 난 버스를 만났고, 이 안에 타고 있던 나디아라는 아이티 여인을 한명 더 태웠다. 4살 난 딸을 찾은 나디아의 스토리는 ‘3000㎞의 모정’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됐다.
지진이 뒤집어 놓은 아이티는 집과 거리, 평상과 비상, 삶과 죽음이 뚜렷이 나뉘지 않았다. 무너진 대통령궁에는 아이티 국기가 속살을 드러낸 철골에 겨우 걸렸지만, 총을 메고 어슬렁거리는 경비군인은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의 마스크에만 관심이 있었다. 궁에서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광장은 사람들이 쳐 놓은 천막으로 빼곡했고, 지린내가 진동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숯을 피워 밥을 지어먹고, 노점상들은 물과 불어터진 스파게티와 망고를 팔았다. 산 사람들은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의 시쳇더미와 뒤엉켜 살았다. 거적으로 덮어놓은 시체들은 마네킹처럼 살았을 때 마지막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삐져나온 여자 시신의 발에 걸친 하얀색 샌들이 오히려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시체 더미 옆에서도 역시 불을 피우고 밥을 지었다.
아이티에선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이 분명하지 않았다. 취재를 위해 빈민가인 씨티솔레이의 뒷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아이티인들은 집에서 나와 양쪽으로 열을 짓기 시작하며 수가 불어났다. 앞에서 한 흑인이 더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뒤돌아 나왔다. 바로 이 지역에서 다음날 한국인 선교사 다섯 명이 총을 들이댄 아이티인들에게 여권과 돈을 빼앗겼다.
물과 식량을 실은 한국 구호단의 차량이 시내 중심가를 지날 때,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엔군의 호위에도 불구하고, 길 양쪽의 아이티인들은 정글 칼을 휘두르며 버스를 위협했다. 유엔군은 약속과 달리 구호차량을 스타디움에 내려주고 사라져버렸다. 전날 구호 현장에서 폭도로 변하는 아이티인을 본 유엔군 소속 브라질 군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먼저 챙겼다. 고립됐던 버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만약 그 안에서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물과 전기가 부족한 아이티의 인프라도 불편했다. 묵었던 한국인 선교사 집은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내고 지하수를 끌어올렸지만, 성능이 신통치않았다. 물을 끓이려고 전기밥솥을 꽂자 전기가 나갔다. 생라면에 수프를 뿌려 저녁을 때웠고, 물이 나오지 않아 화장실은 이틀간 사용하지 못했다.
여진의 공포도 컸다. 컴퓨터로 기사를 쓰는데 발밑이 흔들려 수시로 마당으로 대피했다. 겁을 먹은 아이티인들은 아예 마당에서 잤다. 마당에서 올려 본 아이티 밤하늘엔 별이 크고 많았다.
아이티에선 전화는 되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인터넷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밤 기사를 쓰다가 국제부 여시동 선배에게 메신저로 “발밑이 흔들려 수시로 밖으로 대피하곤 한다”고 하자, “10년 전 대만 지진 취재를 갔을 때와 비슷하다”며 물 한 병과 라이터를 가까이 두라고 했다. 매몰됐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15년전 삼풍사고 취재 때가 떠올랐다. 당시 생존자들이 살아나온 구덩이를 보면서 “나 같으면 못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시 뉴욕에 복귀해서, 집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다가 “아차 물이 나오나” 하는 착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같이 사람 사는 세상이지만, 직항으로 4시간 거리엔 너무 다른 세상이 있다.
출장기간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걱정하고 격려해주신 동료와 선후배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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