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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님네들, 모두 건강하신가요? 69011 이창식입니다. 두 해 전 번역가 생활 접고 집에서 손자 보며 "하찌의 육아일기"란 책을 출간했는데, 짓이 나서 이번엔 아예 "배꼽마당 아이들"이란 동화책을 썼네요. 대구 동촌 변두리 달동네에서 자란 내 어린 시절 얘기를 동화로 엮어본 건데, 써놓고 보니 내 이야기지만 바로 벗님네들 얘기인 것 같기도 하네요.
배꼽마당 아이들
이창식
1. 달밤 숨바꼭질
2. 산딸기 있는 곳에
3. 개구리헤엄
4. 반편이 끝분이
5. 먼저 울면 진다
6. 나비같이 춤추자
7. 개구리 낚시
8. 말총 올가미
9. 오다리 칭칭
10. 종이 계급장
11. 칼싸움 놀이
12. 통발 때문에
13. 폭풍우 지난 후
추천사
이 동 하
이 책의 지은이는 오랫동안 영미소설들을 번역해온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번역한 작품은 아마 100권도 넘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서너 해 전에 엉뚱한 책을 한 권 내놓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찌의 육아일기(터치아트 간행)]라는 책인데, 아마 할아버지(하찌)가 쓴 육아일기로는 첫 책이 아닐까 싶군요. 사연인즉 외손자를 돌보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글을 쓰게 되었다는군요. 마침 육아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가정이 많아선지 이 책은 전국의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었고, 덕분에 지은이는 생전 처음 텔레비전(KBS 아침마당)에도 얼굴을 디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번엔 아예 동화책을 내놓았습니다. [70대를 위한 동화, 먼저 울면 진다]가 바로 그 책입니다. 놀랍고 호기심 나서 읽어본 나는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아하, 그런 마음에서 썼구나! 싶었지요.
이 책에 실린 열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도시 변두리 마을을 배경으로 한, 지은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70대 할아버지들이 더 재미있어 할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신들의 얘기니까요.
동화에 등장하는 배꼽마당 아이들은 들판이나 강변을 쏘다니며 개구리를 사냥하고 나비나 매미나 잠자리를 좇아 하루해를 보내곤 합니다. 때로는 이웃마을 아이들과 코피 터지게 싸우기도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읽어보면 ‘헐! 우리 할아버지들에겐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놀라겠죠. 하지만 70대 어른들이 보면 ‘그래, 우린 그때 그렇게들 놀았지,’ 하며 매우 즐겁고 행복한 추억에 잠기게 될 겁니다. 여운도 아주 길게 남을 거고요.
(소설가. 전 중앙대 교수)
1. 달밤 숨바꼭질
달동네 꼭대기에 손바닥만 한 배꼽마당이 있어요. 동네가 들어서기 전 이곳은 초가집 십여 채를 기슭에 품은 야트막한 산이었대요. 언제부턴가 인근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둘 흘러들어 산등성이에 판잣집과 토담집을 얼기설기 짓기 시작했죠. 성냥갑 같은 판잣집과 마구간 같은 토담집이 산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올라가더니, 마침내 기계총 먹은 아이 머리통처럼 꼭대기만 빠끔하니 남더래요.
“어무이요, 마당이 저래 큰 데 와 배꼽마당이라 카는교?”
시원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사람 배꼽맨쿠로 뽈쏙 튀어나왔응께 그라겠제. 아매도 거인의 배꼽인갑지.”
엄마가 웃으며 설명했지만, 아들은 여전히 통 모르겠다는 표정입니다.
달동네 사는 엄마 아빠들은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아이들은 가난이 뭔지도 몰랐어요. 아랫마을 토박이 몇 집을 뺀 나머지는 모두 똑같이 가난했거든요.
아이들은 간장 한 숟가락 퍼 넣은 찬물에다 보리밥 한 덩이 푹 말아 먹고 나면 부리나케 배꼽마당으로 달려 나가곤 했습니다. 그곳엔 친구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함께 구슬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말뚝박기 등을 하며 놀다 보면 날 저무는 줄도 몰랐고, 배고픔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답니다.
놀이는 식구들이 찾아 나와 저녁밥 먹으라고 고래고함을 질러대야만 겨우 끝이 났어요. 대개는 동생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놀이에 정신이 빠진 형이나 누나한테 엄포를 놓곤 했죠.
“힝아야, 지끔 와서 밥 안 묵으마 딸딸 끌거 묵고 한 숟가락도 안 냉기준다 카더라!”
동생 인태의 전갈에 엉덩이를 실룩대며 제기차기를 하던 팔만이가 돌아보며 묻습니다.
“누가 그카더노?”
“아부지가.”
“알것다고 여쭈어라.”
군것질거리 하나 없는 달동네 아이들한테 보리밥 한 그릇 못 얻어먹게 되는 것만큼 큰 벌도 없었습니다. 까칠한 밀기울에 당원 버무려 쩌 낸 벌건 개떡도 없어서 못 먹을 형편이니까요. 얼른 집으로 달려가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와야지, 안 그랬다간 다음날 아침 허기져서 지게작대기를 짚고 일어나야 할지도 몰라요.
“밥 묵고 금방 나오께.”
“퍼떡 와야 된데이. 꾸물대마 니 빼놓고 우리끼리 말뚝박기 할 끼다.”
“알았다 카이.”
저녁밥 먹었다고 놀이가 다 끝난 게 아니에요. 뒷산 봉우리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면 배꼽마당이 대낮처럼 환해지거든요. 그때쯤이면 저녁밥을 다 먹은 아이들이 배꼽마당으로 하나둘 다시 모여들죠. 아이들은 환한 달빛 아래서 술래잡기 놀이를 벌이곤 했답니다.
가끔 놀이 도중에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집에 들어가 쿨쿨 자는 녀석도 있었어요. 철뚝곰보 같은 녀석 말예요. 그 녀석은 술래가 “못 찾겠다, 꾀꼬리!” 하고 목 아프게 외쳐대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못 찾겠다, 코따까리!”
팔만이가 고래고함을 질러대네요. ‘못 찾겠다, 꾀꼬리!’를 아무리 외쳐대도 철희 녀석이 도통 나타나지 않으니, 울화통이 터져 꾀꼬리 대신 코딱지라고 부른 거죠. ‘이 코딱지 같은 녀석아, 빨리 나와!’란 뜻이죠.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다 말고 혼자 집에 들어가 쿨쿨 자는 녀석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잖아요?
암튼 그 녀석은 다음날 저녁 배꼽마당에 나오면 다른 아이들한테 꿀밤을 한 대씩 얻어맞아야만 했죠.
“니 어제 숨바꼭질 하다 말고 집에 들어가 코잤제? 대갈통 내밀어.”
돌아가며 꿀밤 세례를 받은 철뚝곰보가 한바탕 엄살을 떨고 나면, 이번엔 그 녀석이 술래가 되어 숨바꼭질 놀이가 다시 벌어지곤 했답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목청으로 불러대던 "숨바꼭질"이란 동요가 있었는데요. 환한 달밤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배꼽마당을 가득 채운 뒤 별이 총총한 밤하늘로 아득히 퍼져나갔습니다.
눈 감기고 발발발
요리조리 찾는다
나 요기 숨은 줄 모르고
요리조리 찾는다
2. 산딸기 있는 곳에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언니는 그러지만
나는 안 속아
내가 따라갈까 봐
그러는 게지
“내 지끔 산딸기 따로 가는데, 니도 같이 안 갈래?"
맹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던 시원이는 산딸기 따러 가자는 철뚝곰보의 말에 귀가 번쩍 띄어 곧장 따라나섰습니다.
“산딸기가 어데 있는데?”
“산에 있지 어데 있어.”
“산딸기 있는 데를 니가 알어?”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철희는 으스대며 앞장을 섰습니다. 어릴 때 마마를 앓아 얼굴이 살짝 얽은 데다 철희란 이름 때문에 철뚝곰보란 별명을 갖게 되었죠.
달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철희와는 달리, 시원이는 도시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산딸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막상 철희를 따라 마을 뒷산에 올라갔을 때,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먼저 발견한 쪽은 시원이였답니다. 하지만 산딸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긴가민가해서 냉큼 따질 못하고 철희한테 물어본 게 대실수였죠.
"혹시 이기 산딸기 아이가?"
"아이다."
철뚝곰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답했어요.
“아이라꼬?”
“아이라 카이끼네!”
시원이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자 철희는 번개같이 몸을 홱 돌리더니 산딸기나무를 잡아채며 소리쳤습니다.
"싫다 카마 내가 묵지롱!"
시원이는 그제야 깜박 속았다는 걸 알았죠.
“이 문디 짜슥. 내가 언제 싫다 캤노? 산딸기 아이라 카이 그런 줄로만 알았제. 니는 오늘 내 손에 죽었다!”
화가 나 철희 녀석을 쥐어박으려던 시원이는 꾹 참았어요. 그보다는 살살 구슬려서 산딸기를 나눠먹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철뚝곰보한테 말했습니다.
"내가 찾은 겅께 절반씩 농갈라 묵자."
“좋다. 그라자마.”
산딸기는 반씩 나눠 먹었지만, 시원이는 기분이 나빴어요. 철뚝곰보한테 속은 생각이 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죠. 녀석을 슬슬 골려먹기 시작한 건 바로 그날부터였습니다. 철희가 질질 짜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아진 것도 그날부터였고요.
“니 와 또 찔찔 울미 들오노? 요분엔 또 누가 때맀는데?”
밖에 나갔던 늦둥이 아들이 허구한 날 징징 울며 들어오는 꼴을 보는 엄마 마음이 어떻겠어요? 속이 터져 물어볼 때마다 “시원이가, 잉잉!” 하고 울며 대답하는 막내를 보면 기가 찼겠죠.
특히 제대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취직도 못하고 매일 술만 퍼마시고 다닌다는 철희 큰 형님은 이를 북북 갈며 벼르고 있었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시원이를 붙잡아 혼내주려고 벌써 몇 차례나 마을 고샅길을 샅샅이 뒤지기까지 했대요.
“이 문디 깡철이 겉은 새끼, 뿥잡히기만 해봐라. 손목딩이를 딱 뿌라 뿔 끼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죠? 꼭 그대로였습니다.
어느 날 탱자나무 울타리 고샅길을 혼자 쭐레쭐레 걸어가던 시원이는 마침내 철희 큰 형님과 딱 마주치고 말았어요. 서른 살쯤 된 그 형님은 그날도 어디서 한잔 걸쳤는지 시큼한 술내를 확확 풍겼어요. 벌건 얼굴에 충혈 된 눈알로 시원이를 보자마자 대뜸 따귀부터 한 대 철썩 올려붙인 뒤 소리쳤습니다.
"이 문디 새끼! 니 와 우리 철희 맨날 개롭히노? 앞으로 또 그랄 끼가, 안 그랄 끼가?"
시원이는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는 것 같았어요.
그 형님이 불끈 쥔 바위 주먹을 시원이 코앞에 내밀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니 하문만 더 그라마 칵 쎄리 지기뿐다! 알겠제? 알겠나, 모리겠나?"
시원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야 철희 큰 형님은 멱살 잡은 손을 놓아 주었어요. 그리곤 온천지에 술내를 푹푹 풍기며 휘적휘적 고샅길을 돌아 사라졌습니다.
가여운 시원이는 울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사립문 앞에 이르자 손등으로 눈물을 말끔히 닦고 얼굴 표정도 환하게 바꾸었어요. 집에 들어가 남한테 맞았다고 하소연해봐야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매 맞고 다닌다고 야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죠.
아니나 다를까. 울어서 빨개진 아들의 눈을 본 시원이 아버지는 "누구한테 맞았구먼." 하시더니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누구한테 무슨 일로 맞았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셨어요.
시원이는 그런 아버지가 참 서운했습니다. 다른 아버지들 같으면 당장 아들 손목을 붙잡고 철희네 집으로 쳐들어갔을 거예요. 철희 큰 형을 불러내어 아이들 쌈에 어른이 끼어들어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며 한바탕 따졌을 텐데 말이죠. 그러면 시원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시원이가 다른 집 아이를 때려 코피를 쏟게 했을 때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떽, 다시는 그라지 마라!" 하고 한마디 하시면 그걸로 끝이었거든요.
시원이가 "산딸기" 노래를 부를 때마다 철희 큰 형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술내를 확 풍기며 따귀를 때리던 그 얼굴 말이에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시원이는 학교 운동장에서든, 교실에서든, 배꼽마당에서든, 철희와는 절대 놀지 않았습니다.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하며 어떤 놀이에도 끼워주지 않았죠.
시원이의 어린 생각에도 철희 큰 형님은 참 못났다 싶습니다. 동생이 울며 들어올 때마다 속을 부글부글 끓이다가, 열 살짜리 어린애한테 화풀이를 하고야 만 그 형님은 아무래도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거든요. 차라리 아들이 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오든, 다른 집 아이 코피를 터트리고 들어오든, “아이들 쌈이 어른 쌈 된다.” 하시며 가볍게 넘겨버리는 아버지가 훨씬 더 점잖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3. 개구리헤엄
달동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는 배꼽마당이지만 마을 뒷산과 논밭, 마을을 휘감고 도는 강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동산이에요. 아양교 밑으로 흐르는 옥 같이 맑은 물은 아름다운 대자연 속의 청정 수영장이랍니다.
동무들과 함께 물놀이 갈 때는 낚시 도구 외에도 꼭 챙겨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성냥과 소금이죠. 물고기를 잡으면 소금을 살살 뿌려가며 불에 구워 먹어야 하거든요.
파리낚시질을 하려면 먼저 강바닥에 말뚝을 열 개쯤 단단히 박아야 해요. 그런 다음 긴 낚싯줄에 두 뼘 간격으로 파리낚시를 스무 개쯤 매달아 말뚝에다 묶어 물속에 띄우면 준비가 끝나죠. 동무들과 강가에서 물장구치며 실컷 놀다 들어가 보면 붕어, 가물치, 피라미, 갈겨니 등이 나란히 파리낚시를 물고 있답니다.
한나절쯤 잡으면 그물망에 물고기가 제법 그득하죠.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강변 돌멩이를 차곡차곡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 뒤 잡은 물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구워냅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물고기에 소금을 살살 뿌려가며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몰라요.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는 배꼽마당 아이들에겐 그보다 더 큰 즐거움도 없죠.
“으아, 지긴다! 억수로 맛있다, 그쟈?”
팔만이가 커멓게 탄 물고기를 후후 불어가며 소리칩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철뚝곰보도 누가 한 마리라도 더 먹을까봐 뜨거운 물고기를 급히 씹어 삼키네요.
“쫌 천처이 묵어라. 조딩이 디겠다.”
시원이도 한마디 거들고요.
“하이고, 니는? 꼬랑지도 안 띠내고 꿀떡꿀떡 생키미서.”
난옥이도 지지 않고 한마디 보태네요.
팔만이, 철희, 시원이, 난옥이는 검댕이 묻은 시커먼 입으로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립니다. 시커멓게 탄 물고기를 한 마리라도 더 먹으려고 서로 경쟁을 벌였죠.
물고기로 허기를 달랜 아이들은 다시 물놀이에 열중합니다. 팔만이와 철희는 헤엄을 물고기보다 더 잘 쳐요. 아양교 콘크리트 교각 위로 기어 올라가 시퍼런 강물 속으로 풍덩 다이빙을 하기도 한다니까요.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시원이는 깊은 물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못 내요. 교각 아래는 물이 어른 키를 넘길 만큼 깊거든요. 그래서 물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하류에서 찰방찰방 개구리헤엄을 익히곤 했죠. 그런데 머리가 자꾸만 물속으로 처박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헤엄은 깊은 물에서 쳐야 퍼떡 배우는 기라. 얕은 데서 백날 찰방거리 봐야 말짱 도로묵이라 카이.”
팔만이가 아양교 아래로 시원를 잡아끌며 말했습니다.
“저 교각 받침대까지 무조건 헤엄쳐 가라꼬. 물에 빠지마 내가 건지 줄 낑께 암 걱정 말고.”
“니 참말이제?”
시원이는 팔만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다짐을 받고 또 받았어요.
“하모. 내가 책임진다 안 카나. 교각 받침대에 손이 닿커들랑 몸을 쑥 솟구쳐서 그 우로 올라갑뿌라. 문제없이 해낼 수 있을 끼다마.”
“물에 빠지면 꼭 건지 조야 해. 약속?”
“알았다 카이. 혼차 똑똑한 척하는 늠이 겁은 억수로 많데이.”
시원이는 수면 위로 드러난 콘크리트 교각 받침대를 노려봤어요. 눈대중으로 재어 보니 대략 3미터쯤 되는 것 같아요. 머리를 물속에 처박은 채 두 손으로 미친 듯이 물을 긁어대면 숨을 쉬지 않고도 거기까진 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죠. 혹시 방향이 빗나가 받침대에 닿지 못하면 팔만이가 뒤따라와 잡아줄 테니 물에 빠져 죽을 염려는 없겠죠. 큰 맘 먹고 모험을 한 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팔만이와 함께 물에 뛰어들기 전에 시원이는 심호흡을 두어 번 했습니다. 둘은 “하나, 둘 셋!” 하고 동시에 풍덩 뛰어들었어요. 시원이는 머리를 물속에 처박은 체 죽자 살자 물을 긁어댔고, 팔만이는 평형으로 천천히 뒤따라갔어요. 시원이는 손끝이 콘크리트 교각 받침대에 닿자마자 가장자리를 붙잡고 머리를 수면 위로 불쑥 내밀었습니다. 뒤따라 온 팔만이가 큰 소리로 외쳤어요.
“돼았다! 인자 몸딩이를 훅 솟구쳐서 그 우로 올라갑뿌라!”
시원이는 두 발로 물을 힘껏 걷어차며 교각 받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성공한 거죠.
작지만 위대한 그 성공은 시원이를 맥주병에서 개구리로 만들어 주었어요. 혼자만의 힘으로 두 길도 넘는 깊은 물을 건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뿌듯했죠. 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팔만이가 시원이의 등을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죠.
“우리 몸띵이는 물속에서 둥둥 뜬다 아이가. 물 밖으로 대가리 쏙 내밀고 숨 쉴 줄만 알믄 절대로 빠져 죽을 일이 없다 카이. 두 손으로 물을 할퀴며 그 반동으로 대가리를 쏙 내밀면 되는 기라.”
시원이는 물속에서 머리를 쏙 내미는 연습을 하루 종일 했습니다. 실수로 물을 몇 번 마시긴 했지만, 저녁 무렵엔 개구리헤엄을 제법 잘 칠 수 있게 되었죠.
그러자 사뭇 다른 아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젠 누가 물에 던져 넣어도 빠져 죽지 않을 자신이 생겼거든요. 물에 빠지면 죽는 아이와 죽지 않는 아이는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팔만이와 여름 한 철을 강에서 살다시피 한 시원이는 개구리헤엄뿐만 아니라 자유형과 평형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알고 나니 비결은 간단했어요. 아무 두려움 없이 몸을 물에 맡겨버리는 것이었죠. 물을 무서워하면 우리 몸은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거든요.
4. 반편이 끝분이
“아이고, 배고오파아~”
반편이 끝분이가 울부짖는 소리에 시원이는 방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이웃집 끝분이 누나가 쪽마루에 걸터앉아 구슬픈 가락으로 울부짖고 있네요. 사흘에 한 번 꼴로 벌어지는 일인지라, 시원이의 대꾸는 시큰둥합니다.
“그래서 나더러 우짜라꼬?”
“아이고, 배고오파아~”
끝분이가 또 울부짖자 시원이도 구슬픈 가락을 그대로 흉내 내어 소리칩니다.
“나도 배고오파아~”
반편이 끝분이는 열서너 살쯤 된 처녀예요. 반편이란 말은 또래의 다른 처녀들에 비해 지능이 많이 모자라 반쪽짜리라는 뜻이래요. 배꼽마당 아이들이 누나뻘인 끝분이더러 “반피이! 반피이!” 하고 놀릴 때마다 끝분이 엄마가 눈을 허옇게 치뜨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죠.
끝분이는 심심하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아이고, 배고오파아~” 하고 구슬프게 울부짖곤 했어요. 그렇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답니다. 구슬픈 그 노래는 밥이든 누룽지든 개떡이든 먹을 게 나올 때까지 이어지곤 했죠.
하지만 가난한 달동네에 어느 집엔들 먹을 게 넉넉해야 말이죠. 내 자식 먹일 것도 없는데 사흘들이로 그러는 반편이한테 선뜻 내줄 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열에 아홉 번은 허탕 치기 마련이었죠.
허탕을 치고 나면 반편이는 배꼽마당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가 남의 집 토담 아래 털퍼덕 퍼질고 앉습니다. 그리곤 한층 더 처량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거예요.
“아이고, 배고오파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아무라도 좋으니 제발 먹을 걸 좀 나눠달라는 소리죠. 성공률을 보다 높이기 위해 타깃을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꾼 겁니다.
끝분이 엄마 말에 의하면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여도 돌아앉기 바쁘게 배고프다고 울어댄다네요. 가난한 살림에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진짜 배가 고파서 우는 게 아니라, 머리가 약간 이상해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마을 사람들한테 일일이 설명까지 했답니다.
달동네에서 닭을 치며 사는 닭집 아줌마의 외아들 이름이 강민구인데요, 배꼽마당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악동이랍니다. 시원이보다 두 살 위인 그 민구가 담벼락 아래 퍼질러 앉아 울고 있는 반편이를 보자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에요. 끝분이 곁으로 살살 다가가 장난질을 하다가 제법 볼록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기까지 했다는 거예요. 아무리 지능이 모자라는 반편이지만 본능적으로 어떤 불안감을 느꼈던 모양이죠? 잉잉 울며 집으로 돌아가 엄마한테 어눌한 말씨와 손짓으로 다 일러바쳤다지 뭡니까.
달동네가 발칵 뒤집어졌죠 뭐. 끝분이 엄마가 찔찔 짜는 딸을 끌고 닭집으로 쳐들어가 한바탕 난리를 쳤거든요.
“지 새끼 귀한 중 알믄 느무 새끼 귀한 중도 알아야제. 도대체 자식 교육을 우예 시킸길래 그 모양이고 잉? 반피이라꼬 시집도 안 간 숫처녀를 그렇키 막 건디리도 되는 기가?”
평소 음전하던 끝분이 엄마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더랍니다, 글쎄.
닭집 아줌마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이기 무신 벌건 대낮에 날베락 맞을 소리고? 끝분이 어무이요, 진정하고 자초지종을 쫌 말해 보이소. 내사마 무신 소린지 통 몬 알아듣겠고마.”
마침내 끝분이 엄마의 입을 통해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닭집 아줌마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는군요.
“하이고! 대가리에 소똥도 안 삐끼진 늠이 멀 알고 그랬겠니껴? 철따구니가 없어 장난삼아 한 짓이것제. 내 이느무 새끼, 다시는 고딴 짓 몬하구로 손모가지를 작신 뿐질러 놓을 텡께 끝분이 어무이요, 제발 쫌 고정하이소. 민구 니 이느무 자슥! 고런 몬땐 짓 또 할 끼가, 안 할 끼가?”
닭집 아줌마는 끝분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몽당빗자루로 민구의 등짝과 엉덩이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더랍니다.
어미가 제 새끼를 개 패듯 두들겨 패는 걸 보자, 끝분이 엄마도 그만 화를 가라앉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죠. 안 그러면 어쩌겠습니까? 막말로 이제 겨우 열 살 먹은 놈한테 ‘남의 집 숫처녀를 건드렸으니 네가 책임져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닭집 아줌마 말마따나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놈이 뭘 알고 그랬겠어요? 그냥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아야죠 뭐.
5. 먼저 울면 진다
“태원이가 니캉 한 번 붙고 싶다 카던데?”
닭집 아줌마의 외아들 민구가 벌써 세 번째나 시원이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고 있네요. 태원이와 싸움을 붙이려는 수작이죠 뭐. 민구는 싸움질도 잘하지만, 다른 아이들 싸움 붙여 놓고 구경하길 더 좋아해요. 싸움 붙이는 데는 아주 도가 텄죠.
“니 겉은 늠은 한 방에 골로 보내뿐다 카더라.”
시원이가 아무 대꾸도 않자 민구는 계속 약을 올렸어요.
“자꾸 까불마 아주 떡을 맨들어뿔 끼라 카더락꼬. 니 그런 소리 듣고도 가마이 있나?”
태원이는 몇 달 전 서울에서 이사 온 얼굴이 하얗고 잘 생긴 아인데요, 요즘 들어 툭하면 시원이한테 싸움을 걸어와요. 또래지만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런지, 시원이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더 세요. 팔뚝도 두 배나 굵고요. 녀석도 그걸 아는지 툭하면 시원이한테 “너 까불래?” “한 판 붙어볼래?” 하며 주먹을 쏙쏙 내밀곤 했죠. 시원이가 만만해 보이나 봐요. 이젠 아예 떡을 만들겠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런 소리 듣고 열 안 받을 사람 있겠어요? 하지만 힘이 보배인데 어쩌겠어요. 꾹 참아야지. 민구가 자꾸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끝까지 잘 참았을 거예요.
동네 아이들이 빙 둘러선 배꼽마당 한가운데서 기어이 한 판 붙게 되었지 뭐예요. 싸움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내몰린 거죠.
시원이는 사실 겁을 잔뜩 먹었어요. 태원이한테 실컷 두들겨 맞아 떡이 되기 전에 재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고민 끝에 좀 비겁하긴 하지만 선빵을 날려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싸움을 빨리 끝내려면 상대방 코피를 터트려서 울게 만드는 게 최고거든요. 아이들 싸움에선 먼저 우는 놈이 지는 법이니까요.
싸움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시원이는 녀석의 코를 겨냥해 댓바람에 주먹을 날려버렸습니다. 느닷없이 코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태원이는 코피가 팡 터지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어요. 예상했던 대로 싸움은 그 즉시 끝나버렸죠. 시원이는 재빨리 돌아서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어요. 불리할 땐 그저 튀는 게 최고거든요.
문제는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간 태원이가 곧바로 엄마를 데리고 나와 시원이네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었죠.
대추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사립문까지 불려나온 시원이 아버지는 일면식도 없는 하얀 얼굴의 서울내기 아줌마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코피로 칠갑한 아들 얼굴을 가리키며 아줌마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어요.
"당신 아들이 이 꼴로 만들어놨어요! 어쩔 거예요? 어쩔 거냐구요?"
시원이 아버지는 연신 굽실굽실하며 쩔쩔매기만 하셨습니다.
"아이고, 참말로 미안시럽심니데이. 내 이느무 자슥 집에 들오마 다리몽딩이를 팍 뿐질러 놓을 텡께 지발 쫌 고정하이소."
자기 아들 코피 터트린 녀석의 다리를 팍 분질러 놓겠다고 맹세를 거듭하는 그 아비의 말에 화가 웬만큼은 풀렸던지, 태원이 엄마는 그쯤에서 곱게 물러가더군요.
옆집 토담 뒤에 몸을 숨기고 그 장면을 빠짐없이 훔쳐본 시원이는 정말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지금 집에 들어갔다간 아빠 손에 정말 다리몽둥이가 팍 분질러질 것만 같았거든요.
“에이, 태원이 짜슥하고 벡줴 싸웠데이.”
담벼락을 주먹으로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죠.
배꼽마당에 땅거미가 내려 어둑어둑해지는데도 시원이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아빠한테 혼날까봐 무서워서요. 여름날 저녁이지만 기분이 이럴 땐 엄청 춥게 느껴지나 봐요. 배속에서는 밥 달라고 쪼록쪼록 소리가 나는데, 다리몽둥이 부러질 생각을 하면 끔찍해서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야 말이죠.
“힝이야, 빨리 들어와 밥 묵어라 칸다아.”
나가서 형을 찾아오라는 아빠의 엄명을 받은 동생이 배꼽마당으로 나와 소리쳤습니다. 시원이는 약간 창피하긴 하지만 동생 손에 이끌려 못 이긴 체하고 집에 들어갔죠 뭐. 낌새가 이상하면 재빨리 돌아서 튈 채비를 갖추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들어갔어요. 아빠는 그런 아들을 보자 웃음을 억지로 참는 얼굴로 근엄하게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떽! 다시는 그라지 마라!"
혼자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 시원이는 다리몽둥이가 성한 게 정말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내일 아침에라도 태원이 엄마가 다시 들이닥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어요. 아버지가 약속하신 대로 아들의 다리몽둥이를 정말 팍 분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일이 있은 후 정말 희한한 일이 생겼어요. 태원이가 시원이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 거예요. 툭하면 “까불래?” “한 판 붙어볼래?” 하며 주먹을 쏙쏙 내밀던 녀석이 꼬리를 완전히 내린 거죠. 그런 꼴을 보자 시원이는 은근히 기분 좋았지만,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답니다. 선빵으로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트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비겁했거든요. 마음이 찝찝했어요.
“아랫마을 아이들과 축구시합 할 낀데, 니도 같이 안 뛸 끼가?”
며칠 뒤 시원이는 태원이 팔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어요.
“우리 동네서 뽈은 니가 젤 잘 찬다 아이가.”
태원이는 당황한 표정이었어요. 그렇지만 금방 환한 얼굴로 바뀌었죠.
“정말?”
“그래애. 니가 센터를 맡어. 난 왼쪽을 맡을 테이끼네.”
“고마워.”
태원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시원이는 이때다 싶어 친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죠.
“쩌번엔 억수로 미안했데이. 우리 앞으론 친하게 지내자.”
그러자 태원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어요.
“나도 미안해. 내가 먼저 싸움을 걸었잖아.”
“민구가 꼬셔서 그랬겠지 뭐."
"맞아. 네가 나를 떡 만든다고 했어."
"그럴 줄 알았데이. 나한테도 그런 소릴 했거등. 앞으로는 그런 꼬임에 넘어가지 말제이.”
두 아이는 손을 마주잡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지 몰라요. 민구가 이런 모습을 봤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6. 나비같이 춤추자
아이들이 뛰노는 달동네 배꼽마당에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계집애 하나가 끼어들었어요. 햇볕에 까맣게 그은 얼굴들 속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하얀 얼굴이 하나 섞여 든 거죠. 아이들은 동화 속 공주님이 나타난 줄로만 알았어요.
다영이를 본 시원이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친구들이 놀리거나 말거나 다영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어요.
“얼레 꼴레, 누구누구는, 다영이 꼬랑지래, 다영이 꼬랑지래.”
숨바꼭질할 때도 시원이는 다영이만 찾아다녔어요. 다른 아이들은 아예 찾을 생각도 안 했죠. 다영이가 술래일 때는 일부러 슬쩍 잡혀주기까지 했다니까요.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한여름 오후. 다영이는 고무줄 한 끝을 대추나무 밑동에 묶더니 다른 한 끝을 시원이 손에 쥐어주며 간지러운 서울내기 말씨로 물었죠.
“너 이 노래 아니?”
시원이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다영이는 고무줄을 팔짝팔짝 뛰며 예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꽃과 같이 곱게
나비같이 춤추며
아름답게 크는 우리
무럭무럭 자라서
이 동산을 꾸미면
웃음의 꽃 피어나리
똑같은 노래를 지루한 줄도 모르고 줄곧 불러대며 고무줄을 뛰는 다영이의 모습이 시원이의 눈에는 너무 예뻤어요. 그래서 뜨거운 땡볕 아래 서서 목덜미로 땀을 졸졸 흘리면서도 얌전하게 서 있었죠. 다영이가 시키는 대로 고무줄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요.
두 갈래로 땋은 다영이의 까만 머리 위에서 하얀 리본이 나풀나풀 춤을 추었습니다. 시원이는 그 하얀 리본이 갑자기 두 마리의 배추흰나비로 변해 팔랑팔랑 날아가는 것을 보았어요. 한 쌍의 배추흰나비는 하얀 뭉게구름이 눈부시게 피어오른 파란 하늘로 하늘하늘 춤추며 날아갔습니다.
다영이가 갑자기 멈춰 섰어요. 동생 준호가 누나를 찾아 나왔거든요.
“누나, 엄마가 밥 먹으래.”
“그래, 알았어.”
다영이는 대추나무 밑동에서 고무줄을 풀어내어 동그랗게 돌돌 말았어요. 그것을 시원이 손에 꼬옥 쥐어주며 단단히 다짐을 놓았죠.
“어디 가면 안 돼애?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금방 다녀올게.”
시원이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가 바로 자기란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대추나무 그림자가 한 발이나 더 길어져도 다영이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햇볕에 달아오른 땅은 후끈후끈 김을 뿜어냈죠. 배꼽마당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아른했어요. 목덜미로는 말간 땀이 계속 쪼르르 흘러내렸고요. 손에 쥔 고무줄도 어느새 땀으로 흥건히 젖었죠.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매미는 또 어찌나 지루하게 울어대던지.
‘꼬르륵!’ 소리에 놀라 시원이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배가 너무 고팠어요. 다영이를 기다리느라 점심을 쫄쫄 굶었거든요.
주위를 돌아보니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어요. 대추나무 그늘은 바지랑대보다 더 길어졌고요. 손에는 땀에 젖은 까만 고무줄이 여태 쥐어져 있네요.
점심 먹으러 집에 간 다영이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나 봐요. 시원이는 엉거주춤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어요. 쥐가 난 발을 절뚝거리며 다영이 집 쪽으로 걸어갔죠.
대문 앞에 서서 시원이는 잠시 망설였어요. 어쩐지 약간 창피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지만 곧 용기를 내어 소리쳤죠.
“다영아, 노올자!”
안에서 콩콩 개 짖는 소리만 들려왔어요. 큰 소리로 다시 불렀어요.
“다영아, 노올자!”
“다영이 잔다아!”
다영이 엄마 목소리였어요.
처음엔 서운한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지나자 슬며시 화가 나는 거예요.
‘나한테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라 캐놓고 이기 다 뭐꼬?’
땀으로 축축해진 고무줄 뭉치를 담장 안으로 휙 던져버리고 돌아섰어요.
‘문디 가시나, 다시는 지하고 같이 노능가 봐라!’
학교에서 다영이를 만나도 시원이는 본체만체했어요. 배꼽마당에서 얼굴이 마주쳐도 고개를 싹 돌려버렸죠. 몇 번 그러자 다영이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자꾸만 아려오는 거예요. 노래 부르며 깡충깡충 고무줄을 뛰는 다영이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요. 이제 그만 용서해줄까 하는 생각도 벌써 여러 번 했죠. 하지만 점심도 쫄쫄 굶어가며 대추나무 아래서 기다렸던 생각을 하면 화가 안 풀렸어요.
‘치이, 지 아이마 같이 놀 친구가 없나? 난옥이하고 놀마 되지 뭐.’
며칠 뒤 다시 만난 다영이는 하얀 봉투를 하나 불쑥 내밀었어요.
“이거 내가 아끼던 건데, 네가 좀 간직해 줄래?”
“뭔데?”
시원이는 불퉁하니 물었지만 화는 이미 다 풀린 다음이었죠.
“집에 가서 꺼내 봐.”
“이걸 와 주는데?”
“선물이야. 이별 선물.”
시원이는 깜짝 놀랐어요.
“이사 가?”
다영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다음 주에 서울로 전학해.”
시원이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웃음이 나오진 않았어요.
“안녕. 잘 있어.”
다영이는 손을 흔들곤 곧장 돌아서서 쪼르르 달려가 버렸습니다.
하얀 봉투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원이는 울었대요, 글쎄. 방에 들어가 문을 꼬옥 닫고 하얀 봉투를 열어 보았죠. 슬픈 마음을 달래줄 무엇이 그 안에 꼭 들어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한국의 나비>라는 제목 아래 커다란 호랑나비 그림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아름다운 호랑나비 주위로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부전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책장을 넘기자, 온갖 나비들의 그림과 설명이 가득 담겨 있었어요.
그러던 시원이는 책갈피에 끼워진 하얀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다영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놓은 사연은 이랬어요.
미안해, 시원아.
대추나무 아래서 오래 기다리게 했던 거.
그날 네가 부르는 소리를 방안에서 들었어. 엄마 땜에 나갈 수가 없었지. 정말 미안하다. 이해해 줘.
서울 가면 편지 할게. 꼭 답장해 줘야 해. 알았지?
다영이가.
‘다영이 어무이는 그때 분명 “다영이 잔다아!” 카셨는데?’
시원이는 속상했어요. 어른이 한 거짓말 때문에 다영이를 너무 미워한 게 미안해서요. 아이들한텐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서 어른들은 왜 거짓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다영이한테 답장 쓸 때는 그 말을 잊지 말고 꼭 적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죠. 어른들 땜에 아이들끼리 서로 미워하는 일이 또 생기면 안 되니까요.
7. 개구리 낚시
“깨구락지 잡아오마 동전캉 맞바까 준다 카더라.”
“누가 그카더노?”
“밍구 어무이가.”
“그기 참말이가?”
“하마, 참말이지러. 깨구락지 한 마리에 십원짜리 동전 한 개라꼬 틀림없이 그캤다카이.”
“근데 깨구락지를 어데 쓸라꼬 그라제?”
“푹 꽈서 달구새끼들한테 멕일라고 안 그카나. 그라믄 달구새끼들이 쑥쑥 잘 크고 고기 맛도 좋아진다 카더라.”
“모이도 고만큼 애낄 수 있겠제.”
“와아, 우리 모도 깨구락지 잡으로 가자!”
“그래, 그래!”
돈을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배꼽마당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으러 근처 무논이나 개울로 우우 몰려갔어요. 그렇지만 개구리 잡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죠. 개구리들이 날 잡아 잡수, 하고 얌전히 기다려줄 리가 없잖아요.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새 눈치 채고 개울 속으로 퐁당 뛰어들거나 풀밭 속에 깊숙이 숨어버리니 무슨 재주로 잡겠어요?
“기똥찬 수가 생각났데이!”
물고기 잡으러 강에 자주 다니는 팔만이가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어요.
“뭔데?”
시원이가 재깍 물었죠.
“깨구락지도 물고기처럼 낚싯대로 낚아 올리마 될 거 아이가.”
팔만이의 말에 시원이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잘 되까?”
“멀찌감치 서서 미끼를 던지면 깨구락지가 도망치지 않을 거 아인가베?”
개구리 낚시는 꽤 효과가 있었어요. 연못이나 무논 속에 있는 개구리도 쉽게 잡을 수 있었죠. 낚싯바늘에 메뚜기나 방아깨비를 꿰어 개구리 앞에 살짝 던져 주면 덥석 물지 않곤 못 배기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낚싯대를 휙 잡아채면 개구리는 하얀 배때기를 드러내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동거렸죠. 강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릴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어요. 바동대는 개구리 몸짓이 파닥거리는 물고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웠거든요.
“시원아, 니는 및 마리나 잡았노?”
팔만이가 시원이 그물망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열댓 마리는 되는 거 겉은데. 니는?”
“한 서른 마리는 넘을 끼구마.”
“우와! 마이도 잡았네. 철뚝곰보야, 니는 및 마리나 잡았노?”
“수무 마리쯤 잡은 거 겉데이.”
저녁 무렵 아이들의 망태나 그물망 안에는 개구리들이 득시글득시글했어요. 다들 신나게 닭집으로 몰려갔죠. 민구 엄마한테 개구리를 넘겨주고 마리 수대로 반짝거리는 십원짜리 동전을 받았어요. 덕분에 배꼽마당 아이들 주머니 속에서 동전 소리가 짤랑짤랑 났죠.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동전을 던져 금에 가장 가깝게 떨어뜨린 아이가 가져가는 “동전치기”가 유행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돌아간 뒤 민구 엄마는 개구리들 중에서 이상하게 생긴 놈들을 발견했답니다. 앞다리는 멀쩡한데 뒷다리가 없는 참개구리가 대여섯 마리나 섞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이기 도대체 우짠 일이고? 야들 뒷다리가 다 어데로 갑뿐노?”
민구 엄마는 별 희한한 개구리들도 다 있구나 싶었지만,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개구리를 쫓아다니다 배가 고파진 아이들이 개구리 뒷다리를 뽑아 모닥불에 구운 뒤 소금을 살짝 쳐서 먹어치웠거든요. 그걸 민구 엄마가 어떻게 알겠어요? 워낙 먹을 게 귀한 때였고, 배꼽마당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거든요.
“우웩!”
시원이는 저녁 내내 요강에다 코를 박고 꾸역꾸역 토해냈어요.
“야가 와 이카노? 큰 탈이 난 거 겉데이. 니 낮에 뭐 묵었노? 뭐 묵었길래 저녁 내내 깩깩 토해쌓노?”
엄마는 시원이 등을 두드려 주며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팔만이가 꿉어 준 깨구락지 뒷다리를 한 개 묵었다 아이가.”
시원이가 글썽이는 눈으로 엄마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했어요.
“그러이끼네 그딴 걸 와 묵노 말이다. 배탈나구로.”
“배가 고파서 묵었제.”
“에끼!”
엄마가 아들 등을 찰싹 때리고는 이내 눈가를 훔칩니다. 배고픈 아들을 맘껏 먹이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은 아프시겠죠.
배가 아파 밤늦게까지 뒤척대던 시원이는 겨우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나쁜 꿈을 꾸게 되었죠.
꿈속에서 시원이는 한 마리의 참개구리로 변해 있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짧은 앞다리 두 개는 멀쩡한데, 길고 튼튼한 뒷다리 두 개는 어디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위눌린 시원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잠에서 깨어났죠.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엄마가 깜짝 놀라 아들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며 물었습니다.
“야가 와 이카노? 시원아, 정신 차리거래이. 니 무서븐 꿈 꽀나?”
“어무이요!”
시원이는 엄마 품에 안겨들며 울음을 터트렸어요.
“옹야, 옹야. 인자 괘안타. 니가 개꿈을 꾼 기라. 인자 마 괘안타 카이.”
엄마는 시원이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습니다.
“깨구락지들이 넘 불쌍해!”
실컷 울고 난 시원이가 말했어요.
“뜬금없이 거기 무신 소리고?”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죠.
그제야 시원이는 개구리를 잡아 민구 엄마한테 팔아넘긴 일을 말씀드렸어요. 꿈속에서 뒷다리 없는 참개구리로 태어났다는 얘기도요. 그리곤 엄마 손을 잡아당기며 졸라대기 시작했어요.
“어무이요, 그 깨구락지들 쫌 살리주마 안 됨니껴? 예에, 어무이?”
아들 녀석 등쌀에 시원이 엄마는 꼭두새벽부터 민구 엄마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시원이도 전날 개구리를 담았던 그물망을 들고 쫄랑쫄랑 뒤따라갔죠.
“깨구락지들을 찾으마 또랑에다 모두 풀어줄 낍니더. 그라고 앞으론 절대 안 잡을 끼라예. 뒷다리를 짤라 꿉어 묵지도 않을 끼고요.”
엄마 뒤를 따라가며 시원이는 몇 번이고 다짐했답니다.
“내 깨구락지 쫌 돌리주이소,예에?”
시원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민구 엄마한테 그물망을 내밀었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민구 엄마에게 시원이 엄마가 웃으며 설명했죠.
“야가 나뿐 꿈을 꾼 기라예. 막 자물시고 난리도 아이라 카이. 깨구락지 및 마리만 쫌 돌리주이소.”
그러자 민구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우야꼬! 간밤에 다 삶아뿌맀는데. 시원아, 죽은 깨구락지도 괘안나?”
“안 됩니더! 으앙!”
시원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닭치는 아줌마와 시원이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했죠.
닭장 속에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야 나온 민구 엄마의 손에는 어른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 한 마리가 잡혀 있었어요.
“다행히도 한 마리가 남아 있더래이. 비르빡에 찰빠닥 달라붙어 잘 븨지도 않더라 카이. 옛다!”
닭집 아줌마는 빙그레 웃으며 시원이가 들고 있는 그물망 속에 청개구리 한 마리를 담아 주었습니다.
청개구리를 본 시원이는 더 큰 소리로 “으앙!” 하고 울었어요. 하지만 이번엔 슬퍼서 운 게 아니래요. 자기가 잡은 개구리들 중 몸집은 가장 작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살아서 다시 만난 게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서 울었대요.
8. 말총 올가미
“시원아, 매리이 잡으로 갈 낀데, 니도 같이 안 갈래?”
옆집 사는 팔만이가 시원이네 앞마당으로 들어서며 소리쳤어요. 손엔 기다란 아카시아 나뭇가지 하나만 달랑 들고 말이죠.
“니는 꼬쟁이로 매리이를 잡나?”
매미채를 들고 나서며 시원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어요.
팔만이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죠.
“잡는 수가 다 있지롱.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잘난 체하는 팔만이를 따라 간 곳은 철뚝곰보네 마구간이었어요. 철희네 집엔 달구지를 끄는 조랑말이 한 필 있거든요.
“아이고, 말똥 냄시야! 이런 데는 말락꼬 왔노?”
시원이가 코를 싸잡아 쥐며 물었어요.
팔만이는 또 싱긋 웃었어요.
“말총이 있어야 매리이를 잡든동 말든동 하제.”
“말총이 뭐꼬?”
얼마 전 인근 도시에서 이사 온 시원이는 말총이 뭔지도 몰랐어요. 새총은 새 잡는 총이니까, 말총은 말 잡는 총인가 하고 짐작만 했죠.
“니는 말총도 모리나? 말 꼬랑지나 갈기가 말총이지 뭐꼬, 이 도시 촌늠아!”
저보다 공부를 잘하는 시원이한테 도시 촌놈이라고 놀려먹고 나니 팔만이는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입니다.
“말 꼬랑지? 그딴 걸로 우예 매리이를 잡노?”
시원이는 어리둥절했어요.
“입 다물고 가마이 보고만 있그래이.”
팔만이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어요. 어른들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시원이는 가슴이 두근거렸죠.
“와, 와 그카는데?”
팔만이가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어요.
“쉬이! 조용히 해. 쪼랑말이 놀라 뒷발질을 할지도 모린데이!”
짙은 갈색 조랑말이 “푸르릉!” 콧방귀를 뀌며 서너 차례 뒷발질을 해댔어요. 팔만이는 뒷발에 차일까봐 조심하며 마구간 벽에 달라붙은 말총을 한 올 한 올 채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찔기고 윤기 나는 터래기라야 되는 기라.”
“아코오, 냄새!”
시원이는 말똥 냄새에 숨이 막혔어요. 마굿간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쪼매만 참으라 카이.”
팔만이는 말총을 여남은 가닥쯤 채집한 뒤에야 살며시 마구간을 빠져나갔습니다.
“지끔부터 내가 맨드는 말총 올가미를 잘 보거래이.”
토담 그늘에 털퍼덕 앉은 팔만이가 말총 한 올을 뽑아들며 말했어요. 말총 한쪽 끝을 묶어 고리 모양으로 만든 다음 다른 쪽 끝을 그 고리에 꿰어 빼낸 뒤 아카시아 나뭇가지 끝에다 묶었어요.
“이기 바로 말총 올가미라 카는 기다.”
팔만이는 빙그레 웃으며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올가미 크기는 매리이 몸띵이가 쏙 들어갈 정도라야 되는 기라.”
“그걸로 매리이를 잡을 수 있다꼬?”
시원이는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어요.
“하모. 잡을 수 있고말고. 퍼떡 대추나무 밭으로 가자.”
팔만이와 시원이가 배꼽마당을 지나갈 때, 구멍가게 주인집 외동딸 난옥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어요.
“너그들, 매리이 잡으로 가제? 나도 따라 갈란다.”
팔만이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가시나는 안 된데이. 매리이를 다 쫓아뿐다 아이가.”
“안 그란다. 나는 가마이 있을끼구마.”
난옥이는 쉽게 물러설 눈치가 아니었어요.
“델꼬 가자. 가마이 있을끼라 안 카나.”
시원이가 난옥이 편을 들어 주었어요. 난옥이와는 배꼽마당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멱 감으러 강에도 함께 다니곤 했거든요.
팔만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죠. 대신 난옥이한테 으름장을 놓았어요.
“매리이를 쫓기만 해 보래이. 그때는 내가 니를 확 쫓아내 뿔 끼다. 알았제?”
대추나무 밭엔 바람 한 점 없었어요. 한여름 땡볕만 뜨겁게 쏟아지고 있었죠. 새파란 대추가 익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가시 돋친 가지마다 매미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지겹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매리이는 말총 올가미로 잡아야 되는 기라. 누버서 떡묵기라 카이.”
팔만이는 말총 올가미로 매미를 연신 잡아내며 말했어요.
또 시원이가 들고 있는 매미채를 가리키며 이랬죠.
“그건 까시에 턱턱 걸리서 영 파이라 카이.”
팔만이 말대로 시원이는 매미를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대추나무 가지 사이로 매미채를 들이밀 때마다 그물망이 가시에 걸리곤 했거든요. 그걸 빼내려고 씨름하다 보면 매미들이 눈치 채고 푸르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면 옆 나무에 붙어 있던 매미들까지도 “매앰!” 소리치며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죠.
“니가 매리이를 다 쫓고 있데이. 난옥이는 가마이 있는데.”
팔만이가 시원이한테 짜증을 냈어요.
“매리이채가 까시에 자꼬 걸리서 안 그라나.”
시원이도 짜증이 났어요. 대추나무 가시에 걸린 매미채가 도무지 빠지려고 해야 말이죠.
“차라리 가마이 있거래이. 내가 니꺼까지 잡아 주께.”
“치아라, 마. 내 이럴 줄 알았시마 안 따라오는 긴데.”
시원이는 자존심이 팍 상했어요. 난옥이가 빤히 보고 있어서 더 창피한 거 있죠?
그런데 볼수록 신기한 거예요. 팔만이가 말총 올가미를 매미 머리 쪽으로 살그머니 가져가면, 매미는 앞발을 살살 움직여 올가미 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그때 확 잡아채면 매미는 요란하게 울며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이미 늦었죠. 몸부림칠수록 말총 올가미에 매미 몸은 더욱 세게 조여들 뿐이었어요.
난옥이가 들고 있던 채집통은 금방 매미들로 득시글득시글 했어요. 벙어리인 암매미는 잡는 족족 날려 보냈기 때문에, 채집통 안에는 요란하게 울어대는 수매미들뿐이었죠.
“이만하마 됐데이. 고만 잡고 집에 가자!”
채집통 안을 들여다본 팔만이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시원한 아카시아 그늘 아래 앉아 팔만이는 자기가 잡은 매미를 시원이와 난옥이한테도 똑같이 나눠주었어요.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시원이도 아무 말 않고 매미를 받았죠. 안 받으면 자기만 손해잖아요.
9. 오다리 칭칭
오다리 칭칭
붙어라 암늠이다
이리 오마 살고
저리 가마 죽는다
“왕오다리는 가슴패기가 초록색이고 등때기는 파란 기라. 꼬랑데기는 새까맣고.”
말총 올가미로 매미를 귀신같이 잡아내던 팔만이는 잠자리를 잡는데도 도사였어요.
“왕오다리를 잡을라 카마 암늠이 있어야 된데이. 왕오다리 암늠은 몸띵이가 연두색이고 꼬랑데기는 갈색인 기라.”
밀잠자리 몸통에 호박꽃 꽃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는 팔만이에게 시원이가 물었어요.
“니 지꿈 뭐하는 기고?”
“뭐 하기는. 왕오다리 암늠을 맨들고 있제.”
이번엔 밀잠자리 꼬리에다 빨간 황토를 바르며 팔만이가 대답했죠.
“이래 화장을 해노마 퍼뜩 보믄 왕오다리 암늠 같거든. 숫늠이 깜빡 속아 넘어가서 달라드는 기라.”
팔만이는 낄낄 웃으며 미리 준비한 아카시아 꼬챙이 끝에 맨 실로 화장한 밀잠자리 앞다리 두 개를 꼭 묶었어요. 그리곤 꼬챙이를 공중에 빙빙 돌리며 아까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다리 칭칭
붙어라 암늠이다
이리 오마 살고
저리 가마 죽는다
꼬챙이 끝에 실로 매단 밀잠자리는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날았어요. 날고 싶지 않아도 팔만이가 꼬챙이를 돌리는 대로 날아야만 했죠.
“온다, 와!”
팔만이가 목청을 더 높여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다리 칭칭, 붙어라 암늠이다.”
연못 한가운데서 멋진 비행 솜씨를 자랑하며 자기 왕국을 지키던 왕잠자리 수컷이 화장한 밀잠자리를 발견하곤 쌩 날아왔어요. 왕잠자리 암컷인 줄 알고 짝짓기를 하려는 거예요. 두 마리가 한데 엉킨 순간 팔만이는 잽싸게 달려들어 왕잠자리 수컷을 잡았습니다.
시원이는 잠자리채를 들고 연못가를 종일 뱅뱅 돌아도 왕잠자리는커녕 밀잠자리도 잡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팔만이는 한 곳에 서서 꼬챙이만 빙빙 돌려도 반나절 만에 왕잠자리를 여남은 마리씩 잡아내곤 했죠.
“암만 바뿌기 뛰댕기 봐라. 말짱 도루묵이라 카이. 오다리보다 니 다리가 더 빠린 줄 아나?”
팔만이는 샐샐 웃으며 시원이를 놀려댔어요.
“뛰는 늠이 나는 늠을 무신 수로 잡겠노? 요렇게 살살 꼬시야지.”
그리고는 아카시아 꼬챙이를 살살 돌리며 한층 더 간지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오오다리이, 치잉칭, 부우터라, 암느음이다아.”
양손 손가락 사이마다 왕잠자리를 빼곡하게 끼운 난옥이가 마냥 행복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어요.
“인자마 더 끼울 손가락도 없데이.”
팔만이가 왕잠자리만 여덟 마리를 잡는 동안, 시원이는 겨우 밀잠자리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이에요. 양손 손가락들 사이에 왕잠자리를 빼곡이 끼우고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난옥이를 보자 시원이는 슬며시 심술이 났습니다.
“인자 고만 잡고 집에 가자.”
팔만이가 꼬챙이를 연못 속으로 휙 던지곤 돌아갈 채비를 했어요.
“가고 싶으마 너그들끼리 먼츰 가라마. 나는 한 마리만 더 잡고 갈 끼다.”
시원이는 괜히 고집을 부렸어요. 왕잠자리를 한 마리도 못 잡아 속이 상했거든요. 난옥이 앞에서 자존심도 팍 상했고요.
“내가 잡은 거 두 마리 주께, 고마 가자.”
팔만이가 달랬지만 시원이는 듣지 않았어요. 지난번에 매미 잡으러 갔을 때도 난옥이 앞에서 자존심을 구겼는데, 오늘도 밀잠자리 한 마리밖에 못 잡아 약이 바짝 올랐죠. 팔만이가 잡은 왕잠자리를 양손가락 사이에 빼곡이 끼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난옥이도 갑자기 보기 싫어졌어요.
“싫다 카이. 난 한 마리만 더 잡고 갈 끼다.”
팔만이와 난옥이가 집으로 돌아간 뒤, 시원이는 갑자기 외롭고 슬퍼졌어요. 왕잠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도 그만 사라졌죠. 애써 잡은 밀잠자리마저 공중으로 휙 날려 보냈습니다. 들고 있던 잠자리채를 연못가에 던져두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어요. 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습니다. 팔만이가 부르던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맴돌았어요.
오다리 칭칭
붙어라 암늠이다
이리 오마 살고
저리 가마 죽는다
10. 종이 계급장
배꼽마당 아이들은 병정놀이도 무척 좋아했어요. 달동네 부잣집 아들 영호가 구멍가게에서 계급장이 인쇄된 종이를 한 장 사왔네요. 빳빳한 도화지에 이등병부터 참모총장까지 육해공군 계급장이 모조리 인쇄되어 있었죠. 영호는 종이 계급장을 가위로 오려 동네 조무래기들 가슴과 종이모자에 일일이 붙여 주며 말했습니다.
“옛다, 기분이다. 팔만이 니는 대위 해뿌라. 종대는 중위. 곤이는 꼬맹이니까 소위 하마 되겠네 머.”
“그라마 니는 뭐할 낀데?”
팔만이가 영호한테 물어봅니다.
“나?”
영호는 종이 계급장을 죽 훑어본 뒤 무궁화 두 개가 그려진 것을 골라잡으며 대답했어요.
“나는 중령이야. 계급장을 내 돈으로 샀으니께.”
“피이, 순 엉터리. 치압뿌라 마. 나는 안 할란다.”
팔만이가 종이모자를 벗어던지고 일어서자 영호는 얼른 붙잡으며 달랬어요.
“좋아. 그라마 니가 중령 해뿌라. 나는 소장 하꾸마. 그라마 됐제?”
대위에서 중령으로 갑자기 두 계급이나 껑충 뛴 팔만이는 무궁화 두 개가 그려진 계급장이 마음에 쏙 드는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영호가 별을 두 개나 달겠다고 하는데도 말이죠.
영호는 팔만이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빨리 무궁화 두 개가 그려진 계급장을 가슴과 종이모자에 딱 붙여줬어요. 그리곤 자기 가슴과 종이모자에는 별 두 개짜리 계급장을 떡하니 붙였죠. 그러고 나자 겨우 생각났다는 듯 옆에 앉아 있는 시원이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어요.
“시원이 니는 뭐 하고 싶노? 대령?”
부잣집 아들이랍시고 소장 계급장을 달고 으스대는 꼴이 눈꼴시어 시원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말했죠. ‘문디 자슥, 저그 집이 부자라꼬 지맘대로 소장 하나? 공부도 내보다 몬 하는 늠이.’
영호는 시원이도 살살 달랬어요.
“그라마 별 하나 달아주까? 준장, 어떻노?”
시원이는 또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어요. 속으로는 또 이렇게 생각했죠. ‘지늠이 내보다 축구를 잘 하나, 야구를 잘 하나, 씨름을 잘 하나? 내보다 높은 계급장을 단다는 건 말도 안 된데이. 똑같은 계급장이라면 또 몰라도.’
“와 이카는데? 니는 병정놀이 하기 싫나?”
영호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배어들었죠.
시원이는 싫다고 대답하지도 않았어요. 아이들이 병정놀이 할 때 외톨이가 되어 멍하니 구경만 하긴 싫거든요.
영호가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더니 선심 쓰듯 말했어요.
“좋아, 그라마 니는 중장 해뿌라. 별 세 개! 어떻노? 마음에 쏙 드나?”
싫을 리가 있나요? 영호와 같은 계급장인 별 두 개만 달아줘도 얼씨구나 할 참인데, 중장이라면 소장보다 별이 하나 더 많잖아요. 시원이는 그제야 씨익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습니다.
영호는 사납게 한 번 째려본 뒤 말없이 시원이의 가슴과 종이모자에 별 세 개짜리 계급장을 달아주었습니다. 계급장 뒷면에 밥풀을 잔뜩 칠해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여 주었죠. 그런 다음 자기 가슴과 종이모자에 붙였던 소장 계급장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별 네 개짜리 대장 계급장을 떡하니 붙였습니다. 제 돈 들여 산 계급장이니까 제멋대로 붙이고 내가 대장이다, 이거죠.
시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가슴과 종이모자에 중장 계급장을 단단히 붙여버렸는데 어쩌겠어요? 또 싫다고 하면 “그라마 니는 빠져라!” 하고 영호가 소리칠 게 빤하거든요.
“앞으로잇 가!”
“뒤로 돌아잇 가!”
“번호 맞춰어 가!”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가슴과 종이모자에 소위부터 중장까지 계급장을 붙인 아이들은 대장 계급장을 붙인 영호의 구령에 발을 맞춰 배꼽마당을 몇 바퀴나 돌고 또 돌았습니다. 줄 꽁무니에서 뒤따라가며 시원이는 자꾸만 치사한 생각이 들어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창피하기까지 했답니다.
11. 칼싸움 놀이
배꼽마당 아이들은 칼싸움 놀이도 아주 좋아했어요. 칼이래야 서툰 솜씨로 깎아 만든 조악한 목검이지만요. 그래도 손잡이 부분은 손에 착 달라붙게 낫으로 잘 깎고 사포로 문지른 다음 깡통 뚜껑으로 동그란 방패까지 끼워 넣었죠. 만화책에서 본 무사들의 검처럼 칼끝이 휘어지게 깎느라고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가며 온갖 정성을 다 들여 만들었답니다.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뉘어 칼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날마다 치열하게 겨루다 보니 상대방 공격 패턴을 읽고 자기 칼로 척척 막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가끔 짐작이 빗나가 상대방 목검에 머리를 얻어맞고 볼록한 혹이 생기기도 했지만요. 대개는 아파도 꾹 참거나 눈물만 찔끔거리다 말았어요. 그런 일로 엉엉 우는 아이는 다음부터 칼싸움 놀이에 절대 안 끼워 주거든요.
아랫마을 토박이 아이들은 배꼽마당 아이들을 깔보고 업신여겼어요. 그 아이들의 부모는 마을에서 대대로 논밭이나 과수원을 경작하며 안정된 삶을 누려 왔죠. 하지만 달동네 아이들의 부모는 인근 도시에서 밀려온 가난한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날 벌어 그날 먹을 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힐 여유가 없었죠.
배꼽마당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어요. 날마다 먹을 걸 찾아 산으로 들로 강으로 쏘다니는 게 일이었죠. 매미채로 남의 과수원 나무에 달린 설익은 사과나 복숭아를 따먹기도 하고, 밭에 들어가 참외나 수박을 서리하기도 했죠. 개구리 뒷다리나 메뚜기도 구워 먹고, 밀이든 보리깜부기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치웠어요.
아랫마을 아이들은 배꼽마당 아이들의 행동을 감시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하룻밤 자고 나면 과수원이나 논밭의 작물들이 피해를 입곤 했거든요. 달동네와 아랫마을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배꼽마당이 달빛으로 휘황하던 어느 날 밤,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새까만 지게작대기와 바지랑대가 불쑥불쑥 올라왔어요. 아랫마을 아이들이 목검 대신 들고 온 무기들이었죠. 평소 달동네 아이들이 벌이는 칼싸움 놀이를 보며 픽픽 비웃던 아랫마을 아이들이 그날 저녁 대뜸 전쟁을 걸어왔거든요.
“느그들이 칼쌈을 그렇키도 잘한다메? 그라마 우리캉 한 판 붙어 보자, 됐나?”
“돼앴다!”
“언제 붙으까?”
“오늘빰에 당장 붙자!”
“조옿타! 이따가 달뜨거들랑 배꼽마당에서 만나제이!”
일이 그만 이렇게 돌아갔던 것인데, 목검 따위가 있을 리 없는 아랫마을 아이들은 대신 기다란 지게작대기와 바지랑대를 들고 쳐들어 왔던 거죠. 칼싸움이 제대로 될 리 있나요. 한 발 남짓한 목검을 든 배꼽마당 아이들은 아랫마을 아이들이 휘두르는 지게작대기와 바지랑대에 다리나 등짝을 얻어맞고는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쟁은 배꼽마당 아이들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죠.
“비이겁한 늠들! 지게작대기나 바지랑대가 다 뭐꼬? 문디 깡철이 호랑말코겉은 늠들 아이가!”
배꼽마당 아이들은 이를 갈며 분해했지만, 작전상 후퇴할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두 마을 아이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려고 으르렁댔어요. 멀찌감치 보이기만 해도 서로 돌을 던지고, 떼를 지어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돌팔매질을 주고받기도 했죠. 서로를 향해 무수한 돌멩이를 날렸지만, 희한하게도 머리통이 터지거나 어딜 다친 아이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배꼽마당 아이들의 대장은 태호였고, 아랫마을 골목대장은 과수원집 아들인 무준이였습니다. 무준이는 태호보다 덩치도 크고 나이도 두 살이나 더 먹었대요. 그 무준이가 태호를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배꼽마당 아이들 사이에 나돌았어요.
“그 문디 새끼, 내 손에 걸리기만 해봐라. 코피를 팍 터쟈뿔 끼다!”
무준이가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걸 직접 본 아이도 있다는군요.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질 것인지, 과연 언제 벌어질지, 배꼽마당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가슴조이며 보낼 수밖에 없었죠.
12. 통발 때문에
한여름 뙤약볕이 강변 조약돌을 뜨겁게 달구던 어느 날, 그 일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습니다. 통발 한 개 때문이었죠. 점심나절에 통발을 놓으려고 강에 나갔던 철희가 한 시간도 안 되어 훌쩍훌쩍 울며 돌아왔거든요.
“철뚝곰보야, 니 와 우노?”
배꼽마당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묻자 철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어요.
“아랫마을 늠들이 내 물고기와 통발을 다 뺐아갔데이!”
“아랫마을 누구?”
시원이가 다그쳐 묻자 철희는 훌쩍이며 이름들을 댔어요.
“무준이, 병태, 구진이...”
아이들은 곧바로 골목대장 태호에게 보고했죠. 태호는 즉시 철희를 앞세우고 강변으로 내려갔어요. 시원이와 다른 아이들도 그 뒤를 졸졸 따라갔습니다.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다들 숨도 크게 못 쉴 지경이었죠.
태호는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요. 무준이는 태호보다 나이도 두 살이나 많고 덩치도 훨씬 큰 벅찬 상대거든요. 그렇지만 골목대장 체면에 동네 조무래기들 앞에서 겁먹은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겠죠.
강변에 도착한 아이들 눈앞에 뜨겁게 단 자갈밭 너머로 시퍼런 강물이 펼쳐졌어요. 강가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낄낄대며 장난치던 아랫마을 아이들이 동작을 딱 멈추고 배꼽마당 아이들을 돌아봤어요. 구릿빛 튼튼한 상체를 드러낸 무준이가 가장 눈에 두드러졌습니다.
“뭐꼬, 저 꼬맹이들은?”
무준이가 묻자 구진이가 싱글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달똥네 쪼무래기들이네.”
“무신 일로 저래 몰리왔는데?”
“통발 찾으로 온 모양이제 뭐.”
철뚝곰보를 앞세운 태호가 뜨거운 자갈밭으로 내려가 무준이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어요.
“야한테서 뺐아간 통발하고 물고기 쫌 돌려주라.”
태호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무준이가 대뜸 고함을 지르며 손바닥으로 태호의 가슴팍을 팍 떠밀었어요.
“니깟 늠이 뭔데 간섭이고? 니가 이늠아 행님이라도 되나, 엉?”
태호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잡고 바로 섰습니다.
“이 문디 새끼, 니 오늘 마침 잘 걸맀다. 안 그래도 니늠 손 쫌 봐줄라꼬 내 언제부텀 베루고 있었데이.”
무준이가 소리치며 태호 앞으로 다시 바짝 다가갔어요. 태호의 주먹이 그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후려친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걸리기만 하면 코피를 팍 터트리겠다며 으르딱딱대던 무준이가 도로 코피가 팡 터지고 말았죠.
원래 아이들 싸움에서는 코피 터진 쪽이 먼저 울음을 터트리면 지는 거예요. 그런데 무준이는 아니었죠. 가슴 위로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울기는커녕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태호에게 달려들었어요. 둘은 한 덩어리가 되어 뜨거운 자갈밭 위를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아랫마을 아이들은 싸움을 말릴 생각은 않고 구경만 했어요. 무준이가 태호한테 질 리 없다고 생각했겠죠. 배꼽마당 아이들은 강둑에서 발만 동동 굴렀어요.
뜨거운 자갈밭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아이의 싸움은 연락을 받은 동네 어른들이 달려와 말릴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무준이가 태호를 밀어내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어요.
“콩알만한 새끼가 까불고 있어. 니, 한 분만 더 걸리마 진짜 디질 줄 알어. 알아들었나?”
오랫동안 배꼽마당 아이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무준이와 태호의 싸움은 그렇게 끝난 것처럼 보였어요. 무준이는 쌍코피가 터졌고, 태호는 아랫입술이 약간 찢어졌지만 둘 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대요.
한 가지 이상한 일은 그날 이후 무준이와 태호가 약속이나 한 듯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어요.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둘 다 집안 어른들한테 된통 혼이 났다더군요. 옛날 같으면 장가를 들고도 남을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동네 조무래기들 대장 노릇이나 하며 패싸움을 하고 다녔다고 말예요. 어른들 말씀이 백 번 옳죠 뭐. 언제나 지당한 말씀만 하시잖아요.
13. 폭풍우 지난 후
폭풍우가 지나간 배꼽마당은 영감님 대머리처럼 말끔했어요. 전국이 물난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TV와 라디오에서 연신 떠들어대도, 달동네 철부지들 귀엔 어느 동네 개가 짖나 하는 정도였죠. 아이들 머릿속엔 어서 비바람이 그쳐야 배꼽마당으로 달려 나가 맘껏 뛰놀 텐데, 산으로 강으로 신나게 쏘다닐 텐데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마을 어른들의 얼굴빛은 어두웠습니다. 아랫마을 논밭들이 모조리 물에 잠기고 집도 수십 채나 물난리를 겪었다며 걱정들을 하셨죠. 깜깜한 밤에 물난리를 피해 비바람 뚫고 산꼭대기로 올라온 아랫마을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을 맞아들인 달동네 사람들은 비에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도록 마른 옷가지들을 내어주었대요. 아끼던 귀한 땔감을 꺼내어 아랫목이 뜨끈뜨끈하게 군불도 때고요. 가난한 살림에 뜨거운 시래기죽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끓여내어 대접했다더군요. 밤새 머리를 맞대고 걱정과 따뜻한 위로를 주고받는 가운데, 그 동안 쌓였던 나쁜 감정도 눈 녹듯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그러시니 아이들 마음도 풀릴 밖에요. 태호와 무준이가 싸운 뒤로 나빠졌던 감정도 풀리고, 해묵은 앙금도 녹아내리자 마음이 한결 가볍고 환해졌대요. 이젠 고샅길이나 배꼽마당에서 마주치면 돌을 던지는 대신 서로 손을 흔들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태풍은 아랫마을 과수원과 논밭 주인들에겐 큰 손해를 끼쳤지만, 가난에 쫓겨 산꼭대기로 올라온 달동네 주민에겐 별 피해를 입히지 않았어요. 너무 가난해서 피해 입을 만한 것도 없었지만요. 만에 하나 노아의 방주가 둥둥 떠내려 오다 산비탈에 턱 걸릴 일은 있을지 몰라도, 폭우 때문에 달동네가 물에 꼴깍 잠기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폭풍우가 지나간 후 태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어요. 배꼽마당 아이들은 살판났죠. 거센 비바람 때문에 사나흘 넘게 방안에만 갇혀 지냈거든요. 아이들은 맨 먼저 물난리를 구경하러 근처 강으로 우르르 달려갔답니다. 날마다 헤엄치러 다니던 금호강엔 시뻘건 황톳물이 무섭게 흘러갔어요. 온갖 잡동사니와 빨간 사과들도 무수히 떠내려가고 있었죠. 상류 지역 과수원의 사과들이 폭풍우에 떨어져 떠내려 온 거래요. 과수원 주인들은 망했지만, 마을 아이들에겐 수지맞는 일이 생긴 거죠. 어른들도 다리 위에서 긴 장대 끝에 매단 그물망으로 연신 사과들을 건져 올렸어요. 아이들은 물가로 밀려나온 사과를 매미채로 떠내느라 바빴습니다.
무준이가 홍수에 떠내려 오는 돼지 한 마리를 건져냈다는 소문이 쫙 돌았어요. 배꼽마당 아이들은 무준이를 무척 부러워했죠. 돼지 한 마리를 통째 건졌으니, 고기 한 번 배터지게 먹겠다고 조잘댔어요.
그런 횡재는 꿈꿀 수 없었지만 폭풍우 덕에 배꼽마당 아이들에게도 수지맞는 일이 널렸어요. 강가로 밀려나온 사과 외에도 감나무 밭에 떨어져 나뒹구는 땡감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였죠. 물 빠지는 논에는 붕어, 피라미, 미꾸라지들이 떼로 몰려 다녔어요. 동네 청년들은 물꼬에 커다란 그물을 받쳐 놓고 물과 함께 빠져나가는 붕어, 피라미, 미꾸라지를 양동이에 쓸어 담기 바빴습니다.
물난리 때문에 사이가 좋아진 마을 아이들은 팔다리를 둥둥 걷어붙이고 불어난 개울물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 들었어요. 바윗돌 사이로 살그머니 두 손을 밀어 넣어 그 속에 숨어 있는 붕어와 가물치를 잡느라고 해지는 줄도 몰랐죠. 아이들은 그물도 없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잘도 잡아 냈습니다.
“가물치다!”
“붕어다!”
한 아이가 잡은 물고기를 공중에 쳐들며 소리치면 다른 아이도 화답하듯 고함을 질렀어요. 큰물이 지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갑자기 나타나는지 정말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배꼽마당 아이들의 여름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먼 들녘에서 소슬바람이 불어오자, 대추나무 밭을 뜨겁게 달구던 햇볕도 갑자기 기세가 꺾였어요. 귀청 따갑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죠.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으러 뛰어다니던 연못과 개울가에는 새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어요. 배꼽마당 아이들과 아랫마을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물고기를 잡던 즐거운 한 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시리도록 눈부시던 그 찬란한 여름과 함께 말이죠. (끝)
지은이의 말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나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봐요. 나는 큰 강이 산을 휘감고 흘러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달동네였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행복해지며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답니다. 옥같이 맑은 강물에 퐁당퐁당 개구리헤엄을 치며 함께 뛰놀던 배꼽마당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이 차례로 떠올라서요.
해마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산으로 강으로 쏘다녔습니다. 할 일이라곤 딱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먹을 걸 찾는 일과 신나게 뛰노는 일. 산과 들에서 온갖 열매와 뿌리들을 찾아 먹었고, 강에서는 물고기와 가재, 고둥 등을 잡아먹었죠. 여름 내내 그러고 다니니 햇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어 까마귀가 보면 “형님!” 하고 큰절을 할 판이었답니다. 또 개구리헤엄을 하도 잘 쳐서 올챙이들이 우릴 보면 “삼촌!” 하고 반기며 달려올 지경이었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걸로 알았어요. 어쩌다 집에서 책이라도 펼치면 어른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러셨어요. “니가 우짠 일고? 에헤이, 낼 아침엔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마는.”
온종일 쏘다니며 놀다가 해 떨어진 다음 집에 들어와서는 밤늦게까지 만화책만 읽다 잠들곤 했으니까요. 숙제도 못해 가서 다음날 아침 자습시간에 다른 아이 공책을 빌려 베끼기 바빴는데, 어떤 때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 선생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얻어맞기 일쑤였습니다.
칠순 할아버지가 되어 외손자 녀석의 동무가 된 지금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내겐 포근한 봄날이었구나 싶습니다. 그때 산으로 강으로 쏘다니며 마음껏 뛰놀지 않았다면 지금 와서 추억할 건더기가 뭐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러자 뜬금없이 할아버지의 개구쟁이 시절을 글로 적어 외손자와 그 동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백 년까지도 달려야 하는 긴 마라톤이거든요. 급히 달려간다고 먼저 도착한다는 법도 없고요. 긴 호흡으로 끝까지 잘 달리려면 학원 몇 군데 덜 다니더라도 자연 속에서 열심히 뛰놀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노는 해맑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의 개구쟁이 시절이 기억의 수면 위로 물수재비처럼 퐁퐁 튀어 오르는군요. 외손주와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가 빛바랜 나의 동심을 되살리는 소중한 여정처럼 느껴집니다. 할아버지 역할은 이렇게 마냥 한가해서 좋군요. 엄마아빠처럼 힘들게 돈 벌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처럼 학원으로 내몰릴 일도 없고요. 햇볕이 이리도 따사로우니 조금만 더 앉았다가 외손주 녀석 데리고 들어가야겠습니다. 녀석과 나란히 거실에 누워 낮잠이나 한숨 자야죠 뭐. 녀석도 한참 뛰놀았으니 슬슬 지칠 때가 됐거든요. ^^
저자 이창식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사회교육원 교수를 지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하찌의 육아일기]가, 옮긴 책으로는 [황금나침반], [슬픈 강아지 새드], [바다 우체부 아저씨] [꼬리를 살랑] 등이 있습니다.
첫댓글 우리들이 보아야 할 동화책 같군요 --- 그리고 우리 모두 창식 동기의 마음의 고향에 가서
같이 놀고 싶습니다. 웬지 창식 동기의 고향이 몹시도 아름답게 느껴 집니다.
엄청 큰 일을 하셨네요..
외손자 동무일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잃어버린 어린시절,
추억속의 그 물수제비를
수면 위로 다시 띄우셨다니
놀라우신 내공에 큰 박수와 축하를 보냅니다.
^^ 내가 대구아양초등을 나왔거든요. 도로 건너가 효목동인데, 그 당시엔 허름한 달동네였어요.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었고, 금호강까지 논밭이 이어져 있었죠. 내 고향이나 다름없는 그곳이 지금은 너무 변해서 옛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55년 전의 고향과 소꼽동무들 모습을 여섯 편의 동화로 남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