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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신기한 합마공 세상일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유운장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구양봉은 자신이 이 노인의 제자가 되어 세상 최고의 독물(毒物)이 되기를 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신독행 영감을 스승으로 모시고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기한 술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자그마한 나무집 안에서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말했다. "이 무공을 난 이제껏 제자들에게 전수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지. 이 기이한 무공은 마음이 아주 독하여 독단 독행하는, 그러면서도 문무가 겸비된 제자에게만 전수되어 내려오는 까닭이지. 무림의 세계에서 무공은 정파(正派)와 사파(邪派) 이렇게 두 개 파로 나뉜다. 정파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정직하다는 뜻에서 정파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배우는 주공이 내 공으로부터 시작한다 해서 그렇게 일컫는 것이야. 어려서부터 내공과 심법(心法)을 수련하여 한 단계씩 순서대로 점진하는데, 이래야 10년에 성(成)이 되고, 20년에 형(形)을 이루고, 30년에 파(派)를 가지며, 40년엔 명(名)이 있어, 50년에 이르러야 엄연한 대가가 되는 것이지. 정과가 무공을 배움이 대저 그러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가?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평생을 모두 무공을 닦는 데만 보낼 수 있겠나? 50년 만에야 대가가 될 수 있다니, 그때에 이르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는데 무공을 닦아 어디다 쓰겠냔 말이지." 구양봉은 노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가르치는 사파(邪派) 무공은 그렇지 않지. 정파 무공처럼 단순히 평(平)·순(順)·달(達)·오(悟)·명(明)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邪)·괴(怪)·독(毒)·한(恨)을 강조하지. 사람들은 합마공이 천하에 둘도 없는, 얼마나 기이한 무공인지 모르고 얕잡아 보는데, 생각해 봐라. 두꺼비만큼 센 것이 어디 있는가? 대저 내공이란 기(氣)를 강구하는 법인데, 세상 만물, 큰 것으로 말하 면 말에서부터 작은 것을 말하면 곤충에 이르기까지 두꺼비처럼 운기(運氣)하여 자기 몸뚱어리를 몇 배 크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기가 이르면 돌도 깨지는 것이 합마공이야. 합마공의 신묘한 용처는 무궁무진하니 다음날 자세히 더 얘기하기로 하자." 노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나만이 갖고 있는 봉황력이라는 경공(輕功)이지. 장자(莊子)의 말대로라면 세상 만물 중에 곤붕(鯤鵬)만큼 큰 짐승이 없는데, 한 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 리를 난다고 해. 그럼 곤붕이란 무엇인가? 곤붕이란 즉 봉황이야. 새들의 왕이지. 새들의 왕이 아니면 어떻게 한 번에 구만 리를 날 수 있겠나? 내 이 봉황력이란 바로 봉황이 나래 치는 자세를 본딴 것인데 도합 13식(式)으로 되어 있지. 이 13식이 천하에 둘도 없는 경공을 이루는 거야. 내 먼저 설명부터 하고 시범을 보여 주지." 노인은 구양봉에게 봉황력 13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상구천(鳳翔丸天)·봉시출소(鳳翅出巢)·단족입애(單足立崖)·일시충소(一翅沖 )·박격만리(搏擊萬里)·봉환소(鳳還巢)…… 이렇게 13식을 차례로 설명한 뒤에 노인은 두 발을 급히 구르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서 쑥 날아올라 열 장도 더 돼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나뭇가지 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노인 은 마치 한줌의 솜뭉치처럼 아주 가볍게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천하에 가장 절륜한 경공이었다. 사막에서 최고의 고수로 알려진 형님이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바람처럼 질주하곤 했지만 신독행과 같은 비상한 재주는 갖고 있지 못했다. 형님더러 신독행처럼 몸을 솟구쳐 열 장 높이의 나무 끝에 솜처럼 가볍게 올라앉으라 하면 올라앉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인은 다시 가볍게 몸을 움직여 나무에서 내려오는 듯하더니 공중에서 자세를 몇 번 바꾸어 다시 나무 끝으로 날아 올라갔다. 아마 이게 봉환소라는 것인가 보았다. 자고로 봉황은 깃들 때 곧바로 둥지에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둥지가 있는 오동나무를 싸고 돌며 울다가 둥지에 든다고 한다. 노인의 동작이 그러했다. 놀란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리개가 날갯짓하며 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구양봉, 내 이 봉황력이란 이름은 장자의 '소요유·북명의 물고기(逍遙游·北冥有魚)'에서 따낸 것이다. 자네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 장자의 이 글을 외워 읊을 수가 있겠지?" 노인의 말에 구양봉은 미소를 떠올리며 또렷한 음성으로 그 글을 읊기 시작하였다. 북쪽 먼 바다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나니 그 이름을 일컬어 곤(鯤)이라고 하였다. 곤은 몸의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곤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일컬어 붕(鵬)이라고 한다. 붕의 등도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붕이 날갯짓하여 높이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리는 채운(彩雲) 같았다. 붕은 광풍이 일고 파도가 하늘로 치솟을 적이면 남쪽 머나먼 바다로 날아가곤 하였다. 남쪽의 먼 바다는 천지(天池)이다. 《제해(齋諧)》란 책은 괴이한 사물만 기재한 책인데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적이면 퍼덕이는 날개에 부딪친 바닷물이 3천 리 밖까지 퉁겨 나가고 대붕은 세차게 이는 선풍을 타고 구만 리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붕은 6월의 세찬 폭풍을 타고 먼데로 날아간다.' 원야 임택(林澤)에 야생마가 달리는 듯한 안개는 티끌이 나는 것인바 그것은 생물이 내뿜는 숨결로 이루어짐이라. 하늘의 푸른 빛깔은 진정 하늘의 본색인가? 하늘은 원래 무한히 높고 멀어 아무래도 그 끝이 닿지 못하는 걸까? 가령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러하리라. 모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가 뜰 수 있는 부력이 모자라고, 웅덩이에 물 한 그릇 부어서는 풀잎밖에 띄울 수 없다. 만약 그릇을 띄우려 한다면 밑에 가라앉고 말 것이다. 물이 너무 얕은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풍력이 강하지 못하면 대붕의 거대한 날개도 힘을 잃게 된다. 그러하기에 오직 구만 리 창공 위라야만이 대붕의 두 날개를 받들어 주는 강대한 풍력이 있을 수 있고, 대붕은 이를 빌어 날갯짓을 할 수 있으며 대붕의 등이 아무런 거침이 없이 창천에 높이 뜰 수 있기에 남해로 날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인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장자의 말이 옳지. 말 잘했어. 내가 평생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장자야. 장자는 처가 죽은 다음 묘 앞에서 술을 먹으며 양푼을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불렀다지? 그야말로 진정한 우리 사파의 인물이야. 생각해 봐라. 사파 인물이 아니라면 그도 여느 정파의 인간들처럼 안 나오는 눈물을 쥐어짜며 꺼이꺼이 남이 듣기도 괴로운 곡을 하느라고 야단했을 게 아니냐? 난 그런 정파 인간들의 위선 을 가장 싫어해. 7척 장검으로 쳐죽이고 싶은 심정이지. 눈에 띄는 족족 모조리 쳐죽이고 싶단 말이야." 유운장에서 노인과 함께 머무는 동안 구양봉에겐 줄곧 떨쳐지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노인이 왜 그 좋은 집에서 살지 않고 하필이면 허름한 나무 구새 안에서 사는지 궁금했을 뿐더러, 제갈정을 비롯한 다섯 형제는 무슨 까닭으로 노인 앞에만 사면 벌벌 떨며 범을 만난 듯 겁을 집어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다짜고짜 유운장에서 도망가라고 권했는지 그것도 시종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한편 구양봉은 노인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문장을 듣는 가운데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묻겠다. 만약 네가 아버지와 처 이렇게 셋이서 한 배에 탔다가 배가 뒤집혀 모두 물에 빠졌다면 도대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구양봉은 잠시 망설이다가 되물었다.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엔 별일이 다 있는 법이지. 가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겠느냐 이 말이다." 구양봉은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 아버님부터 구해야지요. 사람들의 뼈는 아버지한테서 오고 피는 어머니한테서 오는 법인데 부모님부터 구하지 않는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틀렸다. 그 말은 틀려!" 노인이 거칠게 소리쳤다. 구양봉은 노인의 반응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옳아! 노인은 대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처가 있어야 아들딸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말씀은 먼저 처부터 구해야 된다는 겁니까?" 그의 대꾸에 노인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들어 보아라. 나는 40년 넘게 강호를 종횡해 오며 '늙은 독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강호에서 나만큼 독한 사람은 없지. 가령 배가 뒤집어져서 아버지와 처가 모두 물에 빠진 경우 누구를 먼저 건져 낼까. 이건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거야. 만약 아버지가 거부여서 자식들을 호의호식 잘살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아버지부터 구해야 하지.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에게 얹혀 지 내면서 잔소리나 해대는 경우라면 구해 내서 뭣하겠느냐? 처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처가 꽃같이 아름다운 미인이라면 죽게 내버려두긴 너무 아깝지 않느냐? 또다시 그런 어여쁜 아내를 얻을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생기기도 못난데다가 밤낮으로 바가지나 긁는 여편네라면 살려 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만 평생 고생이지. 세상 일이란 이러하니 대장부라면 매사에 과단성 있 게 맺고 끊어야 하는 법. 그래야 큰일을 하는 법이다." 구양봉은 겉으로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배은망덕하게 부모와 처자를 어떻게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노인은 마치 구양봉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나 하는 것처럼 냉소하며 말했다. "오늘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간 조만간에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밤이 되자 구양봉은 다시 노인의 정실로 가 잠자리에 들었다. 정실에서는 미인들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구양봉의 웃음 소리가 화기롭게 흘러 나왔다. 유운장에 오는 날부터 말 그대로 여색에 빠진 것이다. 문득문득 모용쟁의 얼굴이 떠오르거나 그녀와 함께 별빛 흐르는 사막의 밤을 동행하던 일들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모용쟁은 지금 형님과 함께 풍경이 수려한 강남을 다니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모용쟁은 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을 뿐 자기 같은 책벌레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용쟁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선녀 같은 유운장의 미녀들이 꽃 같은 웃음으로 이렇듯 나를 위해 주지 않는가!' 구양봉은 유운장 여인들 속에 파묻혀 모용쟁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구양봉은 자기를 목욕시켜 주는 두 여자를 끼고 앉아서 서역의 사막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의 풍습과 인정에 대하여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새로 온 녀석이지?" 구양봉은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등뒤 탁자 위에 사숙이라고 불리는 어린아이가 척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구양봉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때 그는 한 팔로는 한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다른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양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초장왕(楚莊王)을 연상하게 했다. "자낸 아직 속까지는 썩지 않았구만. 늙은 영감네 제자들은 누구 하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썩어 고름이 질질 나지 않는 자가 없는 데 말이야. 자네는 내가 보는 데선 계집들을 끼고 뒹굴지 않는 게 좋아. 그러다가 이 어르신의 비위를 거슬려 놓으면……." "사숙께서도 재미를 보시겠으면 사숙 마음대로 골라잡으십시오. 유운장에 미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구양봉의 대꾸에 어린아이는 성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아니, 이 어르신이 네 놈 같은 줄 아느냐? 이 어르신은 30여 년을 살았지만 계집들과 놀아난 적은 한 번도 없다."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애가 제갈정네 다섯 형제의 사숙이며 또 제 입으로 서른이 넘은 어른이라고 하니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하지만 그가 신독행의 사제라면 지니고 있는 무공이 매우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 구양봉은 단단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형(師兄)이 자네한테 뭘 가르쳐 주겠다던가? 봉황력과 합마공을 가르쳐 주겠다지?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천하절기(天下絶技)라고 하였을 테고. 그래, 안 그래?" 구양봉은 잠시 무어라고 대답할지 생각이 안 나서 엉뚱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이 우리 사부의 사제가 맞습니까?" 그러자 아이는 자기 가슴을 툭 치며 으쓱해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는 신독행이고 난 사자우(査自雨)라고 해. 알아? 내가 그 영감의 사제라는 건 강호인 모두가 알고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물어 봐." "저희 사부의 사제시 라면 저에게는 사숙이 되는데, 그렇게 어리디어린 나이에 사숙이 되다니 잘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러자 아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숙이면 사숙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자네같이 도문(道門)에 갓 들어온 풋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저 심보 더러운 제갈정이나 꾀 많은 속문성까지도 내 앞에선 설설 기는 판인데. 이 어르신 춘추가 올해 얼마인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린가?" "기껏해야 올해 열 살이나 되었겠지요." 아이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너도 시정의 바보들처럼 이 어르신을 열 살로밖에 안 보는구나. 이 어르신은 올해 서른아홉이야. 알겠어? 신축년(辛丑年) 국월(菊月) 초닷새 생이니 어디 꼽아 봐. 올해 딱 서른아홉이 아닌가?" 겉으로 봐선 암만해도 열 살 안팎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한사코 서른아홉이라고 우기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구양봉은 생각했다. 이때 어린아이가 바짝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29년 전 내가 한창 합마공을 수련하고 있을 때 너의 그 망나니 사부가 나를 주화입마(走火入魔)시켰단 말이다. 다행히 내 사부가 구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난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야." 구양봉은 적이 놀랐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합마공은 꼭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해 내려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사부님의 말씀은 그 두 절기(絶技)는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 한다고 하던데요. 저희 사부님께서 합마공을 전수받았는데 어떻게 사숙도 같이 배울 수 있었습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독행을 사부로 삼았으면 신독행한테 가서 물어 보지 왜 나한테 묻나?" "사숙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사부님께서 솔직한 답변을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테지. 당시 나와 그는 구사독옹(九邪毒翁)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하였는데 그는 스승의 큰 제자이고 나는 스승의 관문제자(關門第子)였어. 사부님은 그한테는 봉황력을 가르치고 나한테는 합마공을 가르치셨지. 그런데 그는 사부님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서, 내가 한창 수련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내 내력을 분산시켜 버렸지. 그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주화입마가 되어 죽을 뻔한 거야, 그런 걸 내 스승님이 구해 주셨는데, 내가 이렇게 자라지 못하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구양봉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봉황력은 사부가 마흔 살 때 자기 스스로 창조한 절세의 경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숙은 그 것이 이 사문(師門)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도대체 어느 말이 옳단 말인가?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사숙께선 어린 나이에 나를 속이는 군요.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네 선생한테 가서 대놓고 물어 보면 될 거 아냐!" 아이는 사납게 내뱉고는 눈물을 훔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말할 수 없이 언짢은 기분이 되어 여자들을 물러가게 한 뒤 정실을 나왔다. 그가 큰 나무 아래에 이르자 사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구양봉이냐? 어서 들어오너라." 구양봉이 허리를 굽히며 나무집 안에 들어가니 사부는 처음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구나무 선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구양봉은 묻고 싶은 말이 속에 가득하였으나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정실에서 재미를 보지 않고 이 음산한 곳엔 왜 찾아왔느냐?" 매우 인정 어린 어조로 사부가 말했다. 순간 구양봉은 마음이 훈훈해지며 방금까지 품었던 온갖 의문들이 봄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사부님이 이 정도로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시는데 사숙의 말에 쉽게 의심을 품다니. 사숙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어. 공연히 사부님 심기만 흐려 드릴 뻔했구나.' 구양봉은 사부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의 방에서 향락을 누리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런 데서 고생하고 계시니 마음이 불편하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양봉, 재삼 일깨워 주는데, 네가 내 두 가지 절기를 익히고 나면 반드시 모든 무림들을 경계해야 한다. 네가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기만 하면 이 신독행은 죽어도 한이 없다." 사부는 절실하고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의 말을 듣는 동안 구양봉은 이제 사숙의 말 따위는 까마득히 잊게 되었다. '사부님이 이렇게까지 나를 총애하시는데 나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그는 사숙의 말을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구양봉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구양봉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 사부가 물었다. "오늘 심기가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인데, 그래 어째서 이 밤중에 여길 나왔느냐?" "제가 정실에 있는데 어린 사숙님이……." 구양봉은 하는 수 없이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하더냐?" "사부님, 제자는……." 구양봉은 잠시 더듬거렸다. "내가 자기를 해쳤다고 했겠지?"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곧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기 어린 어조로 사부가 다시 물었다. "나 때문에 주화입마가 되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고도 말했겠지?"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부는 야릇한 소리를 내며 웃다가 한바퀴 허공돌기를 하더니 구양봉 앞에 똑바로 마주섰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구양봉을 쏘아 보았다. "네 스승이 그처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이 정색하여 묻는 바람에 구양봉은 가슴이 후두둑 뛰어 급히 대답했다. "그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의 말을 믿을 리 있겠습니까? 비록 사숙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 놈의 말은 전부 사실이야!" 사부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제 귀를 의심하며 사부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 정도로 지독한 독물이야. 네 사숙을 내가 해쳤을 뿐만 아니라 너의 사형들에게도 내가 손을 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들이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설설 기겠느냐?" "사부님, 설마……설마 사부님께서……." "이 놈아, 내가 너를 속여 무엇하겠느냐? 내 다시 일깨워 주지. 장차 강호를 종횡하려면 반드시 독해져야 한다. 독하지 않고야 어떻게 천하를 횡행하겠느냐? 약육강식이라 하였다. 독하지 못하면 독한 남에게 먹히게 되어 있지. 그때 가서 독하지 못했던 걸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부님.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습니까?" "뭐?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느냐고?" 신독행은 앙천대소하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구양봉, 네가 나로부터 합마공을 배워 내면 네 사형들이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으려고 할 거다. 그 놈들이 불원천리 변경에서 너를 데려온 것은 자기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냐. 내가 그 녀석들한테 독약을 먹여 놓고 매년 봄마다 변경에서 너 같은 사람을 찾아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지. 난 우리 사문의 대를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그 녀석들처럼 아둔하지 않은 후계자를 말이야. 마침 천행으로 그 소원이 실현되었다." 사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이 돌아오자 난 한 놈에게 한 알씩 해독약을 먹였다. 그 한 알이면 명년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니라." 실로 놀라울 일이었다. 구양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도 잘못 보이면 그들처럼 독약을 먹게 되겠구나.' 구양봉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이때 밖에서 사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제자들 알현하고자 합니다." "봐라. 녀석들이 왔다. 녀석들이 좋은 심보를 가지고 날 찾아올 리는 없고, 나를 죽이려고 왔는지도 모르지." 노인은 낮은 소리로 구양봉에게 말하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구양봉은 눈을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앞에는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가, 뒤에는 언제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너무나 공손한 태도였다. "사부님, 제갈정 등 제자 다섯이 사부님의 알현을 바라옵니다." 재차 들려 오는 소리에도 사부는 그냥 내다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구양봉에게 다시 소곤거렸다. "저 놈들 다섯은 언제나 나에 대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 지금도 분명 나를 해치려고 왔을 거야." 구양봉은 도무지 사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형제가 이렇게 야밤에 찾아온 데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때 제갈정이 술단지 하나를 앞으로 내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저희가 이번에 변경에 갔다가 변경 황궁 안에 굉장히 좋은 화주(火酒)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단지 구해 왔나이다. 변경에서 불원천리 가져온 진품인지라 이렇게 들고 왔사옵니다." 구양봉은 속으로 탄식했다. '사부님이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게야. 저런 제자들을 믿지 못하다니. 사부님께 드리려고 불원천리 변경에서 맛좋은 술까지 구해 오는 제자들을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의심하니 답답한 일이구나.' "분명 저 술에다가 독약을 풀었을 거야……." 사부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냉소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 늙다리 독물의 제자들이 저 술을 그냥 줄 리가 없지. 제갈정과 속문성도 이젠 독약을 쓰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거든." 이때 제갈정이 마치 사부의 심중을 헤아린 듯 말했다. "저를 낳은 사람은 부모님이고 저를 아는 사람은 사부님이시지요. 변경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도 사부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화주를, 불공스럽지만 제자가 먼저 검식을 하여 드리겠습니 다." 제갈정은 소매 안에서 술잔을 꺼냈다. 고풍스러운 옥잔으로 달빛에 반사되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 술잔을 본 신독행은 놀라며 물었다. "제갈정, 그 술잔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이 술잔은 변경 황궁 안의 보물인데 제자가 궁에 들어갔다가 슬쩍 훔쳐내 온 겁니다. 사부님 마음에 드신다면 사부님께 올리겠습니다." 제갈정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옥잔을 손에 드니 화주에 속이 훈훈합니다. 술맛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별맛이옵니다." 그는 술잔을 단지 위에 올려 놓은 뒤 형제들과 더불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부는 새삼 탐욕스런 눈길로 술단지 위에서 빛나는 옥잔을 노려보았다. 부드러운 광채를 뿌리는 옥잔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진품이었다. "구양봉, 저 옥잔은 필시 그것이다. 그 옥잔이 틀림없어. 이 어르신이 몇 해를 줄곧 생각해 오던 그 옥잔이야. 그런데 제갈정 저 나쁜 녀석의 손에 들어갈 수가 있다니. 하여튼 대단한 놈이다." 구양봉은 사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잠자코 얼굴만 바라보았다. 사부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 술잔은 은나라 주왕(紂王)께서 여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옥잔이다. 한 팔로는 여자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저 옥잔을 들었었지. 주왕은 대단한 풍류객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이 주왕과 같으면야 살아 볼 만하지. 저 놈들이 나쁜 맘을 품고 있든 어떻든 한번 나가 봐야겠다. 옥잔에 화주가 일생에 몇 번 있겠느냐?" 사부는 천천히 나무집에서 걸어 나갔다. 그는 술단지 앞으로 가서 옥잔을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추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그는 제갈정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들 정성으로 이 좋은 술을 옥잔으로 마시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그리고는 석초수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술에 무슨 다른 건 없겠지?" 석초수는 흠칫 놀라며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나와 더불어 몇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담만 커져서 못하는 짓이라곤 없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사부의 말에 제갈정 일행은 쩔쩔매며 몸둘 바를 몰랐다. 사부는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술단지를 덮은 마개를 떼어 던져 버리고는 옥잔으로 술을 휘저었다. 그윽한 술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사부는 더는 말하지 않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일단 맛을 본 그는 아예 술독을 끌어안고 몇 잔을 거푸 퍼마시더니 입을 닦으며 다섯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술맛 참 좋다. 제갈정, 그래, 이렇게만 이 사부님을 모셔라. 그러면 앞으로 꼭 좋은 일이 있을 게다." "사부님, 화주란 독한 술이오니 과음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속문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뭣이 어째? 아니, 날 단속하려 드는 거냐?" 사부는 대뜸 눈을 부릅뜨며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쇠 돌 깨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속문성의 이마에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자들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순식간에 술단지는 동이 났다. 빈 단지를 들여다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쨉쩝 다시던 사부는 급기야 푸르르 역정을 냈다. "제갈정, 이 얼간이 같으니.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느냐?" 제갈정이 몸을 떨며 대꾸했다. "저희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부님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습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이 좋은 술을 왜 딱 한 단지만 가져왔느냐, 엉!" 구양봉은 사부의 행동거지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미 한번 고약한 늙은이군. 제갈정네 형제들은 참 어진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사부의 입에서 '윽'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곧장 몸을 날려 제갈정을 덮쳤다. 미리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듯 제갈정 일행은 날쌔게 피해 물러났다. "이……이 놈……이……놈들이 나를 독살시키려고 했겠다?" 노인은 서릿발같이 매서운 표정이 되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꺾고 앉아 내력을 운기하여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본 제갈정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성공이다, 성공! 망할 놈의 영감탱이야, 우리 손에 꺼꾸러져 봐라."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은 사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몇 걸음 다가오다가는 겁이 나는지 그저 에워싸고만 있었다. 사부는 오랫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제갈정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네가 우리를 제자로 보지 않는데 우리가 너를 사부님으로 섬길 줄 알았느냐? 우리 모르게 독초를 먹이지를 않나, 우리 집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놓고 협박하지를 않나. 그 동안 네 놈이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쳐죽여도 분이 안 풀린다. 이 망할 놈아, 너 같은 건 하루빨리 죽어야 해. 너 같은 것이 죽으면 이 세상에 독물이 하나 줄어들고 큰 화근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좋 은 일이냐?" 구양봉은 사부를 구할 마음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제갈정 다섯 형제를 당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노인이 속문성을 쳐다보며 사정했다. "문성아, 넌 어려서부터 날 따랐지 않느냐? 내가 너를 세 번이나 살려 주었는데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를 해치려 한단 말이냐? 내가 내상을 치료할 동안만 날 보호해 다오. 내 몸이 회복되면 꼭 너에게 합마공을 가르쳐 주마. 유운장의 제5대 장주가 되게 해 주마." 사부의 말에 구양봉은 한가닥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속문성이 사부의 말을 듣고 사부를 도우려고만 하면 그의 무공과 기지로 사부를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부님, 저한테 정말 합마공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선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문성아, 나를 구하지 않고 어딜 가는 게냐?" "구양봉이란 녀석을 요절내고 오겠습니다." 속문성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애를 왜 죽인단 말이냐?" "그 놈을 죽여야 사부님이 나한테 합마공을 가르쳐 주실 거 아닙니까?" 속문성은 노인을 떠보듯 음흉스레 웃었다. 노인은 그만 할말을 잃었다. 노인은 구양봉을 죽이기 싫었다. 구양봉의 행동과 처사가 자신과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천 리나 먼 변경에서 그 같은 사람을 데려오기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재를 함부로 죽이기란 너무 아까웠다. "날 속이려 들다니. 내가 속을 줄 알았나? 이 망할 늙은이를 그냥……." 속문성은 당장이라도 쳐죽일 듯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은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제갈정네 다섯은 변경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밤낮으로 사부 신독행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해 왔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온 것이다. "신독행, 독공비적(毒功 籍)도 이리 내고 합마공도 바쳐라! 그러면 편히 죽여 주겠다." 제갈정이 강요했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속문성이 부드럽게 구슬렀다. "사부님, 극독이 이미 몸에 배어 골수에 미쳤으니 가만 놔 두면 조만간 죽습니다. 그 두 가지 무공을 우리한테 넘겨주면 죽어도 편히 죽게 해 드리겠다니까요. 어떻습니까?" "사부님, 어서 말씀하세요. 사부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큰형님도 둘째 형님도 사부님이 편하게 눈을 감게 해 드린답니다." 석초수도 거들었다. 한쪽에 선 두 젊은이는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신독행이 세상을 횡행하다가 너희 같은 망나니들한테 죽게 될 줄은 참으로 몰랐구나." 신독행이 길게 탄식했다. 제갈정은 득의양양해서 웃어댔다. "어차피 내 손에 죽게 된 마당에 말이 많구나." 그는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넷째 동생과 다섯째 동생, 동생들 둘이 덮쳐서 한 사람이 일장 씩 갈겨 뼈가 부러지도록 중상을 입혀 놓게." 벙어리처럼 과묵한 장한 둘은 제갈정과 땅에 앉아 있는 사부를 번갈아 보면서 몹시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사형들과 뜻을 같이하긴 했으나 막상 자기들 손으로 사부를 죽이자니 망설여졌던 것이다. "우리 형제들 다섯이 모두 손을 써야 해.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 명은 우리 모두 함께 감당하는 거다. 누구도 발뺌을 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제갈정이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 앞에 이르자 하나가 불쑥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한 뒤 결연히 몸을 일으키더니 단번에 노인의 왼쪽 어깨를 한 장 갈겼다. 힘을 반밖에 넣지 않았는데도 노인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왈칵 피를 토했다. 다른 하나도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노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노인은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기침을 하며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제갈정이 비아냥거렸다. "사부님, 이미 그 지경이 된 바엔 죽는 편이 더 나을 거외다. 그 많은 금은보화에 그 많은 천하절색을 거느리고서도 마음놓고 한 번 즐겨 보지 못하고 밤낮 나무에만 거꾸로 매달려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뒷일일랑 염려 붙들어매시고 가기나 하시구려. 가신 다음 장사만큼은 후하게 지내 드리리다. 사부님께서 아끼던 금은보화 십분의 일쯤 순장품으로 넣어 드리고 사부님께서 총애하 던 계집들도 몇은 순장을 시켜 딸려 보낼 생각이오. 어떻습니까, 사부님?"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사부님, 사부님의 그 창자가 끊어질 듯한 독초는 내가 이미 손에 넣었습니다. 그 따위로 우리 형제를 협박할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요." 속문성이 낄낄거렸다. 제갈정이 석초수에게 일렀다. "셋째 아우, 이번엔 아우가 저 화상을 한 대 갈기게. 조심해서 저 화상의 한쪽 다리만 부러뜨려 놓게." 그러자 석초수는 어두운 기색이 되며 머뭇거렸다. "셋째, 왜 꾸물거리나!" 제갈정이 엄하게 다그쳤다. 옆에서 지켜 보던 속문성이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가만, 내가 잊을 뻔했군. 자네가 손을 대지 않으면 자네 처는 오늘 중독이 되어……." 석초수가 급히 외쳤다. "둘째 형님,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돌아가지 못하면 절명단(絶命丹) 한 알을 셋째 제수에게 먹이라고 내 처에게 당부해 놓고 왔을 뿐이야." 속문성은 음흉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되자 석초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좋소. 형님들 말을 들어야지요." 석초수는 신독행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친 뒤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사부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의 일장에 신독행은 몸서리쳐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푹 거꾸러졌다. 제갈정과 속문성은 서로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요.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쓸까요?" "우리 둘 중 어느 한 사람만 손을 써도 숨이 끊어질 테니 아우가 마저 끝을 맺어 버리게나." 제갈정이 잔인하게 웃었다. 마치 양보라도 하는 듯한 제갈정의 태도에 속문성은 혐오감을 느꼈다. '나한테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나중에 나마저 해치우려는 수작이로군. 내가 그 따위 흉계에 걸려들 줄 알고?' 하지만 차마 제갈정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갈정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다가는 당장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신독행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제자 인사 올립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읍만 세 번 했다. 그러자 석초수가 나무랐다. "둘째 형님, 우린 모두 사부님께 큰절을 했는데 형님께선 왜 읍만 하십니까?" 속문성이 대꾸했다. "큰절하는 놈은 큰절하는 이유가 있고 읍하는 나는 읍만 하는 까닭이 있지. 사부님은 나를 자네들을 대하듯 잘 대해 주지 않았어. 사부님이 지닌 절기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나에겐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나로선 이 정도도 대단한 인사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훌쩍 뛰어오르더니 신독행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노인은 이제 살 가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스러웠다. 그는 절단난 노인의 오른쪽 다리를 가슴 아프게 바라 보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혼절해 넘어졌던 노인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다섯 형제를 노려보더니 독한 웃음을 사려 물었다. "나를 그렇게 수월하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제갈정 이 놈, 네가 덤벼라. 난 네 놈 손에 죽겠다." 제갈정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속문성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노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사부님의 최후를 장식해 드릴 테니까요." 제갈정은 노인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천천히 치켜 들었다. 그가 한 번만 내리치면 노인은 그대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조급해진 구양봉은 그대로 뛰쳐나가 다섯 형제와 죽기살기로 싸워 볼 작정을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참 답답한 일이로군. 구해 주자니 내 마음이 허락칠 않고, 그렇다고 제갈정 같은 망나니들이 자기 사부님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자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구사독옹 문하를 손가락질하며 웃을까봐 무섭고. 그렇게 되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 밥을 먹겠는가? 이 어르신이 눈을 뻔히 뜨고 있는 한 이런 짓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놀란 제갈정이 사위를 둘러 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숙님, 할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말하시오. 왜 숨어서 그러십니까?" 제갈정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왜 나서라는 건가? 내가 나가기만 하면 자넨 낭패를 볼 텐데." 아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사숙님, 사숙님도 사부님께 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이 이러는 것이 기실은 사숙님 분풀이를 해 드리는 게 아닙니까?" 제갈정의 말에 아이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그래도 안 되네. 자네들이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이 강호에 퍼지면 내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니겠냔 말야. 그럴 바엔 내가 죽이는 편이 낫지. 나와는 형제지간이니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은 아니 들을 게 아닌가? 내 말이 어떤가?" 그의 말은 제갈정에게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사실 노인을 죽일 작정은 했으나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명을 들을 일이 내심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자기 대신 이 일을 책임져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다 노인은 이미 다리가 끊어지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더는 걱정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사숙님, 사숙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저희로선 기쁜 일이지요."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자 사숙이 조르르 달려나와 노인 앞에 턱 버텨 섰다. 그는 자기 사형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안됐구려. 그 총명하신 양반이 어리석을 때는 또 한없이 어리석거든. 제갈정이 평소 형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형님도 잘 알고 있었으련만 이렇게 저들 올가미에 걸려들다니." 그는 제갈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독약을 썼기에 독약에 대해서는 세상 으뜸인 너희들 사부를 다 꺼꾸러뜨렸지?" 제갈정은 내심 우쭐하였으나 겸손을 가장하여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번에 변경에 가서 제법 멋들어진 처방을 얻어 왔는데, 반독(半毒)·반독(半毒)·반독(半毒), 즉 '삼반(三半)'이라고 하지요. 소상히 말씀드리자면 술에 독이 절반 있고 옥잔에 독이 또 절반 있고 사람에게 독이 또 절반 있는데 이 세 가지 독이 합쳐지면 누구든지 죽고야 마는 그런 처방입니다. 사부님께선 이 세 가지 독을 모두 가지게 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이지요." 아이가 뒷짐을 진 채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제갈정, 사람에게 독이 절반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사숙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고 있는 제갈정은 그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얼른 대답했다. "그건 말입니다, 술은 화주이기에 맹렬하고 강한 물건이고 옥은 찬 물건인데, 그 옥잔에 화주를 먹으면 음양이 서로 조화되어 사람에게 대단히 이롭지요. 하지만 음기가 과한 사람이 마시면 음위(陰淮) 양위(陽淮) 두 맥이 상하게 되어, 사람에게 절반의 독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 가지 독이 한데 엉키면 죽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제갈정의 말에 아이는 땅 꺼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노인을 향해 말했다. "자업자득이라고, 악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끝을 못 맺는 법인데, 형님은 지금 후회되는 일이 없소?" "후회는 무슨 후회! 난 오직 저 놈들을 쳐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노인은 이를 갈았다. 아이는 눈을 굴리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손뼉을 짝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솔직히 말하면 형님을 가장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요. 그런데 난 지금 제갈정도 미워하오. 글쎄 제갈정의 여편네는 나한테 엿을 주지 않지, 아들 녀석은 나하고 싸우려고 하지, 이것들한텐 위아래가 없다니까. 덜돼먹은 인간들이지요. 저 속문성도 마찬가지요. 그 여편네는 귀신 대가리 두꺼비 눈깔을 해 가지고 속문성보다 더 못돼 먹었어요. 유유상종이라더니 부 부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내 저것들 버릇을 좀 단단히 고쳐 놔야겠소. 형님께서 돌아가시면 저 자식들이 날 안중에도 안 둘 것인데, 안 되겠어. 형님을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지." 아이는 갑자기 동정심까지 생기는지 조그마한 손으로 신독행의 얼굴에 흐르는 피까지 닦아 주었다. "사숙님, 그 따위 헛생각 말아요. 우리 다섯이 손을 쓰면 사숙 혼자서 견디기 힘들 거외다!" 제갈정이 소리쳤다. "좋다. 그럼 싸워 볼까?" 아이가 흔쾌히 말했다. 그는 곧장 제갈정에게 덮쳐들 듯하다가는 갑자기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참, 한 가지 잊었군. 아주 중요한 걸 깜빡 잊어먹을 뻔했어. 그는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석초수를 가리켰다. "네 이 놈 셋째야, 내가 금방 네 집에서 네 처와 함께 햇비둘기를 구워 먹었는데, 글쎄 햇비둘기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네 처가 까무러쳐 넘어지더구나. 날이 무덥지도 않은데 갑자기 더위를 먹은 건가?" 그 말에 석초수는 크게 놀라 당장 집으로 달려갔다. "서둘러라. 잘못하면 그 사이에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석초수의 등에 대고 소리친 뒤 킥킥 웃으며 이번에는 속문성을 향해 말했다. "속문성, 너도 여편네가 어떻게 됐나 집에 가 보지 그래?" 속문성이 음산하게 대꾸했다. "소인의 여편네야 늙어 볼 것이 없으니 차라리 사숙님 손에 죽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젊고 이쁜 여편네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보다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속문성이 끄떡도 하지 않자 아이는 내심 당황했다. 이때를 틈타 제갈정과 속문성, 그리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아이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아이는 더럭 겁을 집어먹으며 소리쳤다. "야단났네. 야단났어! 이 놈들이 사람 죽인다!" 그러나 유운장에서 이곳은 금지 구역으로 누구 하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어린애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달려나와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제갈정을 보고 웃었다. "아 참, 나한테 사탕이 원래는 여섯 알이 있었지. 그런데 내가 하나 먹었으니 몇 개 남았겠나?" 아이는 제갈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마를 탁 쳤다. "다섯 개가 남아야 하는데, 보라구. 몇 개 남았나? 네 개밖에 없잖나. 이거 큰일났군. 제갈정, 자네 손자 녀석이 내 사탕을 한 알 훔쳐먹은 게 틀림없어!" 제갈정의 안색이 확 변했다. 주춤거리자 속문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형님, 사숙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오. 사숙을 죽이면 해독약 정도 찾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오." "흥, 과연 그럴까? 난 주머니에 사탕을 열일곱 개나 가지고 다니는데 어느 것에 어떤 독이 있는지 알고 해독약을 쓴단 말이냐? 사탕알마다 독이 다른데 그걸 먹여 보다간 네 손자 녀석은 목숨이 끊어지고 말걸?" 아이는 고개를 비딱하니 젖히고 소리 내어 웃어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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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