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장】밀양전통시장
어릴적 큰 어머니 손잡고 갔던 장터 '고동·정구지' 등 보는 것마다 향수 자극
옛 밀양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내일동 구시가지에 자리한 밀양전통시장 입구인 밀양관아정류소에 닿으면 아치형간판 아래 단장한 노점화원이 맞는다. 첫차를 탔을 어르신들은 벌써 자리를 잡았다. 좌판 어물전에는 언 생선을 꺼내 진열 중이다. 글·사진 황해령 명예기자(수필가)
영남지역 최초 만세운동 일어난 곳
인근 시외버스터미널이 옮겨가면서 밀양전통시장은 한때 아픔을 겪기도 했다. 2·7일 장날이면 옮겨간 내이동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도 장이 서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날이면 내일동 상설시장 건물과 주변 300여 점포로 구성된 상점가, 그리고 노점 좌판에는 활기가 넘친다. 이제 두 곳이 공존하는 분위기다. 밀양장터는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 때 영남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매년 3월 13일 펼쳐지는 만세운동 재현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3·1운동 4년 전인 1915년 내일공동시장으로 허가받아 시장으로 공식 인정됐다. 내년 3월 10일이면 100년의 연륜을 맞는다. 하지만 현재 상설시장 자리는 조선시대 관청 창고였다고 한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전기인 1479년 밀양읍성 축조 때 생필품 조달을 위해 장이 섰다고 하니 밀양전통시장의 시초로 추정할 수 있다.
"터미널시장보다 정 가는 여기가 좋아" "생고등어 오처너언!" "밤과자 맛 좀 보소!" 이른 시간이라 구경하는 발길은 조심스럽다. 자잘한 민물새우들이 소쿠리에서 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살그머니 앉아본다. "만원어치 주소. 무 넣고 지져놓으면 국물이 무에 배어 고기보다 낫다" 할머니 한 분이 선뜻 계산부터 하고 맡겨놓으신다. 새우에 붙들려 있다 일어서려니 "오소, 오소. 홍시 하나 자시고 가소"라며 붙잡는다. 시장통 바닥에 앉아 도라지를 손질하시는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올해 일흔여덟 되신 할아버지는 초동면에서 택시비 2만 원을 들여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제일 먼저 오신다고 한다. 도라지와 오가피, 돼지감자를 펼쳐놓았다. "버스 타고 오면 터미널시장이 수월해도 거는 무조건 헐값에 살려고만 하고 정이 안가. 여기는 내 자리도 있고, 단골도 있고, 사람들이 좋아. 경로당에 있으면 뭐해. 같이 나와서 바람도 쐬고, 내 손으로 키운 것 들고 장날마다 나와" 포즈도 취해주시고 말씀 내내 남 같지가 않다. 시장은 낮 시간으로 갈수록 붐빈다.
상설시장 재건축으로 활성화 기대 밀양시장은 밀양상설시장 상인들의 모임인 번영회와 내일전통시장 상점가의 상인회 등 두 주체가 밀양전통시장연합회를 결성하고 시장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13년째 상설시장을 이끌어오는 ㈔밀양시장번영회 이창현 회장에게 상설시장 전반에 대해 들어봤다. 1971년 신축한 4700여㎡의 건물에는 의류와 포목을 비롯해 잡화, 식당, 수선, 곡물, 건어물 가게가 주를 이룬다. 155개 점포에 상인과 종업원 175명이 종사하고 있다. 깨끗하게 단장된 화장실과 휴게실, 수유실, 그리고 방송시설과 시스템에어컨, CCTV도 갖춰져 있다. 기존 주차장 외에 대형버스 5~6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내년 3월 완공예정이다. 시장번영회는 시장마케팅 사업의 일환으로 상인교육관에 상인대학을 개설하고, 그랜드세일과 온누리상품권 뽑기, 노래교실을 운영한다. 상설시장은 재건축이 시급하다. 번영회는 지하 2층에 지상 5층 건물을 세우고, 웨딩홀·영화상영관·향토음식점·갤러리·회의실과 주차장 확보를 구상한다. 얼음골사과와 딸기·수박·고추·들깻잎·대추 등 밀양특산물 직판장도 열어 명실공히 밀양의 특성이 묻어나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고객의 생각에 맞춰 상인 의식개혁 '저 고동(고둥)은 어릴 때 해거름이면 강가에서 쓸어 담았었지. 어릴 적 큰어머니 손잡고 정구지(부추)와 토란·마·우엉을 성당 입구에 앉아 팔던 기억도 나네. 그때 눈꽃 같은 팥빙수와 우무콩국을 사주셨지' 어물전으로 걸어가는 도중 보고 들려오는 게 모두 고향의 정겨움이며 향수다.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단골 어물전을 찾았더니 정옥금 상인여성회장(밀양해물)을 소개해준다. "지금은 182년 만에 돌아온 9월 윤달이라 제사가 없어 손님이 덜하네예"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는 분을 '회장님'이라 부르며 대화에 합류시킨다. 지효민 내일전통시장상인회장은 8년 전 '효식품'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왕족발과 즉석두부를 취급하는 가게를 시작했다. "상인들은 첫 손님이 흥정만 하고 그냥 가면 소금을 뿌리는 관습이 있지요. 회장이 되고 처음 시작한 일이 그걸 없애는 것이었는데, 꼭 3년이 걸렸지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요즘은 매일 아침 '고객 확보하기 방송'과 아침체조로 하루를 엽니다. 온누리상품권은 쉽게 현금화해드리니 상인들도 환영하고 있고요"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돼지국밥·장국 등 먹거리 골목 '북적' 매주 토요일 9시 밀양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 버스가 우리나라 3대 누각인 영남루를 거쳐 11시쯤 전통시장에 들른다. 문화관광형시장으로 승인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지효민 회장의 말에서 밀양전통시장의 밝은 미래가 엿보인다. 점심때가 되자 먹거리 골목이 더 북적거린다. 대물림 60년 전통의 '단골집 돼지국밥'을 찾았다. 입소문을 통해 '6시 내 고향'과 '생생정보통' 등 TV방송을 탔던 옛날국밥집. 돼지머리와 고기·뼈의 배합을 맞춰 매일 새벽부터 새로 고운 육수만 사용한다. 젊은 직장인들로 식탁 몇 개가 금방 채워진다. 옆 골목 '할매 장국·보리밥집'에도 비집고 앉을 틈이 없다. 긴 나무 식탁 하나에 가족처럼 앉아 된장찌개에 나물과 겉절이를 원하는 만큼 넣어 비벼먹는다. 박상집(튀밥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펑' 터지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귀를 막고 한참을 기다렸다. "자, 갑니다. 뻥이요!" 모두 40~50년 일궈 온 전통시장 골목 풍경이다.
밀양전통시장 명물
교복 입고 7080 낭만에 젖는다 ●길 막걸리카페&차 스튜디오 밀양상설시장 안에 7년 동안 비어있던 점포에 세를 얻어 큰 판을 벌였다. 주인공은 백윤길(58)·김수현(54) 씨 부부. 부부가 벌인 판은 지난 2월 문을 연 '길 막걸리카페&차 스튜디오'다. 이곳에는 1970~80년대 젊은이의 고민과 사랑, 희망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 시절 통기타의 꿈과 낭만이 깃든 곳이다.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여러 번 놀란다. '언제 한번 저 교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서 꿈 많던 학창시절로 돌아가 봐야지' 부부가 17년 동안 웨딩업을 해오며 아껴둔 드레스와 턱시도, 화려한 파티복도 비치되어 있다. 피아노와 전자오르간, 통기타가 주는 시간은 또 어떨까. 지난 11월에 대한민국 예술대전 한지공예 분야에서 금상을 받은 부인 김수현 씨의 공예를 접할 수 있어 더 좋다. 공예로 꾸며 격이 있는 분위기에 낭만의 추억이 버무려져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집이다. 생태하천으로 꾸며지는 인근 밀양 해천의 공사가 완료되면 지금처럼 지역 예술인뿐 아니라 관광객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밀양상설시장을 살리는데 큰 몫을 해내리라 본다.
속옷가게에 책과 피아노가? ●아빠 팬티 엄마 브라 라디오 프로그램과 신문에도 나왔다고 하니 유명세를 탄 속옷가게다. 속옷가게에 손님을 위한 문화공간이 있다는 소문에 가게를 찾았다. 소문대로 매장 안쪽 문화공간에는 책들이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기타와 피아노에 운동기구까지 놓여 있다. 소파와 탁자를 갖춘 꽤 넓은 공간 할애다. 주인 김상철(51)·김소혜(47) 씨 부부는 부산에서 어려움을 겪고 밀양에 터를 잡았다. "부산 구포시장에서 사업을 넓혀 치열하게 일하다 큰 어려움을 당한 후로 모든 걸 내려놓기 시작했지요. 밀양에는 8년째인데 그 전 가게는 너무 좁아 손님과 차 한 잔 나눌 수 없었어요. 지금은 물건을 사든, 사지 않든 편안하게 들러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죠. 손님을 더 끌기 위한 건 아니고, 지금 손님을 유지하면서 서로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마련했어요. 정신없이 사는 대도시에 비해 밀양 시민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종종 어려움을 상담해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다는 김소혜 씨의 시원시원한 미소에 신뢰와 힘이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