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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의 기도와 금식
사도행전 13장 1-3절/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전파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이 일로 스데반이 죽음을 당하는 박해의 환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는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믿는 자의 수가 더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자들이 흩어지고 사도가 죽임을 당하는 박해를 당하는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거기에 매이지 않고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이로 인하여 날마다 믿는 자가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져 생명의 구원에 있는 자를 얻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나, 박해로 신자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를 선하게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어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도 들어가게 하시는 방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전파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믿는 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흥왕하여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찾아다니며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구브로와 구레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디옥의 이방인에게도 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고, 주께서는 이들과 함께 하셔서 이방인들도 주를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이 새로운 신자들을 돕고자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에 있는 신자로 개종한 유대인 신자들은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통해 구약성경인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생명의 주로 영접한 믿음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과 또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심에 대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과 함께 하나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방인 신자들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가졌다 -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으며, 바나바는 다소에서 사울을 데리고 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함으로써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든든히 서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전파하기 못하게 하는 박해는 계속되어 유대인의 손길에서 더욱 뻗쳐나가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살하려는 음모에 의해서 이방인인 헤롯 왕에 의한 박해로 더욱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박해는 헤롯 왕에 의해서 더욱 심하게 가해졌습니다. 헤롯 왕은 박해의 손길을 뻗쳐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이 끝나면 그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 죽일 속셈이었습니다. 이 일로 교회에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위험에 처한 베드로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지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처형 당가기로 예정된 바로 전날에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보내 간수장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끄집어 내주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후 주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쳐 헤롯은 곧 병이 들어 몸에 구더기가 가득 슬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의해서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박해 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전파되어 널리 퍼져 나갔던 것처럼 헤롯 왕의 박해가 있으며 사도인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히며 헤롯 왕이 죽는 등의 일련의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새로운 신자들이 날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들어가게 되는 전환점을 이루는 중요한 시기가 됩니다. 여기에 안디옥교회가 이방인 지역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의 중심에 등장하게 됩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외에 '흑인'이라는 뜻의 니게르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영주 헤롯왕의 젖동생 마나엔 등이 예언자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금식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성령께서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두 사람에게 맡길 특별한 일을 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안디옥교회는 금식기도를 끝내고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고 복음 전도 사역을 행하도록 떠나보냈습니다.
여기에 보면, 금식은 사도 시대의 교회인 초대교회에서도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금식은 구약시대의 율법 규정에 의한 금식, 그러니까 금식에 관한 규정을 따라서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금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도행전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이후에도 두 번 더 금식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사도행전 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여기서 마지막으로 금식이란 단어가 나오는 구절은 금식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배에 타고 있는데 바다에서 만난 풍랑으로 배가 더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그레데 섬’을 따라 항해하여 휘몰아치는 바람과 싸우며 섬의 남쪽 해안을 천천히 통과하여 ‘라새아시’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으로 피항하여 있게 되었는데, 거기서 금식하는 절기도 지나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었으므로 장기간의 항해를 하기에는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날을 머물러 지내야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의 절기를 계속해서 가져나갔으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금식에 있은 것은 사도행전 14:23에서가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금식도 금식일 규정에 따르는 것에서가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에 있는 것에서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안디옥으로 되돌아 왔을 때 두 사람이 들르는 도시마다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면서 어떤 박해가 오더라도 믿음을 지킬 것을 격려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교회에 장로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감독하여 돌보게 할 때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에서 금식에 있었던 것이며, 그에 따라서 금식하며 기도를 드린 후에 그들이 믿음으로 의지하는 주께 장로들을 맡기는 것에서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기도와 이것과 병행된 금식도 그렇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므로 날마다 신자들이 더해지는 가운데 있는 것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금식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에 있는 것에서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금식에 있었던 것은 이렇게 금식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구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헤롯 왕의 박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도 잘 받들어 갈 수 있고자 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사도들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세워지고, 이 하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사도행전 1:8에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세우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하실 것을 말씀하신 그대로 실현하시는 것에서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을 박해로 흩어지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제 베니게와 구레네와 구브로와 안디옥 등 이방인 지역에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우셨는데,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안디옥교회도 받들어 섬김에 있고자 하는 것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안디옥에서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은혜를 구하는 기도에 있는 것에서 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당시 안디옥교회에 있었던,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맡아 이를 전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세상에 나타내실 것인지를 알리는 사역에 있었던 선지자들과 이를 풀어 자세히 설명하며 가르치는 사역에 있었던 교사들인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흑인’이라는 뜻의 니게르라는 별명을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헤롯 왕의 젖동생 마나엔 등의 활동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있고 흑인인 시므온도 함께 교회 일원으로 있어 피부색을 넘어 차별 없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안디옥교회 온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능력이 일으키시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순증으로 주께서 자신을 드림과 같이 자신들 또한 기꺼이 몸을 드려 하나님의 선한 일을 받들어 가고자 하는 믿음에 온 신자들이 하나 된 마음과 하나 된 몸의 생명체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자신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이 잘 받들어 갈 수 있고자 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기도에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금식에 있으면서까지 오직 기도에 전념하여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디옥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순종에 있으므로 성령께서는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두 사람에게 맡길 일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안디옥교회는 금식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즉시 따르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끝냈으며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고 떠나 보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 13:1-3에서의 안디옥교회가 가진 금식과 기도는 이곳 신자들 개인이 가져나간 금식과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긴 복음 전도의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함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에게 성령께서 그 뜻을 알려 교회가 이를 받들어 섬길 수 있게 하였을 때 그들은 금식기도를 끝내고 즉시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전도를 위하여 보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있은 금식기도와 같이 교회가 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는 것에서 오직 기도에 전념하는 것에서 음식 먹는 것도 뛰어넘을 만큼, 그래서 식사하는 것도 잊을 만큼 오직 기도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금식이 함께 병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이것에서뿐이겠는지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심에 있는 삶에 자신이 온전히 있지 못한 연약한 모습에 있는 것에 대한 탄식과 그로 인한 슬픔의 토로에 있는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금식과 기도에 있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가 무시되고 죄가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울분을 갖고 울며 통곡하여 기도에 있는 것에서 금식할 수가 있습니다. 이 모두는 말이죠. 금식의 규정에 매여서 책임을 갖고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기도 중에 언제든지 가져나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에 있음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지요. 금식이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것에 있었으니 그 하나님의 일은 결코 매임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금식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받들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 슬픔에서 가져나간 것이니 자신의 악한 죄를 인식하고 주의하며 조심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시되고 득세하는 것에 마음에 큰 아픔을 가지기에 금식에 있었으니 자신은 그 죄에서 풀려나 있는 자로서 죄의 종의 도구로 쓰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의의 도구에 자신의 몸을 사용할 것입니다. 금식에 있는 목적은 이렇게 자신을 죄에서 풀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의에 있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금식은 해야 되느냐, 이제는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어느 것에도 자유한 마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것을 그 누구도 억제시키거나 억압할 수가 결코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을 갖고 원함으로 금식에 있든지 먹고 마심에 있든지 하십시오. 금식에 있어도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에 있어도 모두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우리 몸은 말이죠.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우리 몸은 주님의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하기까지 하는 것은 ‘우리가 굶어 죽을지언정’ 하는 심정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목숨은 주께 드려진 것이니 주님과 그분의 일을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우리 자신을 드려가는 것인데, 무엇을 먹고 마심에 있다면, 그렇게 해서 유지되고 지켜지고 있으며 힘을 지니고 있는 그 목숨으로 열심히 주님을 섬김에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