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김혜숙
A4용지에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물에 젖으면 힘없이 무너지며
작은 불씨에도 맥없이 사라지는,
생각없이
휙
휴지통에 구겨 던져도 별 저항이 없던
그래서 그저 유순하기만 한 줄로 알고 있었던,
종이 말입니다
손가락 끝에 선홍의 가는 피가
눈치를 보듯 멈칫거리더니
이내 눈물처럼 붉게 송송히 맺힙니다
제법 깊은 통증이
속살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후ㅡ 후ㅡ 불어보다가 결국
밴드로 돌돌 상처를 감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피의 흔적 없는 하얀 옷 그대로
책상 위에
눈을 감고
반듯이 누위 있는
저 종이가
갑자기 무서워집니다
날도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칼을 들이대는
종이의 숨은 마음이, 문득
두려워집니다
지난날
그 사람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아, 젠장/김혜숙
신도림역에서 쪽파를 다듬는 할머니
손 끝에 까맣게 흙물이 들어 있다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노동의 역사
오천 원을 내미는 내 손톱
딸아이 결혼 치른다고
생전 처음 따라간 네일샾에서
젤 메니큐어에 보석 몇 개 붙였더니
칠만 원
할머니는 오늘 하루
몇 뿌리의 쪽파를 까서
얼마를 버셨을까
손가락 끝에 고단한 하루가
또 얼마나 깊게 파고들었을까
구겨진 검정 비닐에 삼천 원 어치 쪽파를 담는 할머니께
이천 원은 놔두시라고
속물 자선가 마냥
애써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데
할머니 내 등 뒤에 대고 소리 지르신다
ㅡ 고맙소 젊은 양반 건강하시고
복 받으셔 복 받으셔
이천원에
나는 양반이 되었고
건강과 복을 축원 받았다
두 번씩이나
칠만 원을 쳐바른 내 손톱에 햇빛이 눈부셔
눈물이 난다
아, 젠장!
따뜻한 겨울 한 날 /김혜숙
추위 한소끔 누그러진 날
동묘 시장 노점
일찍이 펴 놓은
가짜 금붙이 좌판에
햇빛 손님 가득하다
샛노란 금목걸이며
팔지 반지마다
햇살 손님과
밀고 당기는 흥정이 유쾌하다
쪼그려앉은 늙은 주인 팔목의 금시계에
눈독 들이는 한 무리
햇살 도둑
아저씨 꾸벅이 조는 사이
이리 만져보고
저리 만져보다
재채기 소리에
흠칫 놀라 뒷걸음친다
따뜻한 겨울 한 날
동묘 시장
잊고 있던 대목을 꿈꾼다
신인우수작품상 당선소감/김혜숙
배우 이정은님이 어느 시상식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지치고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한동안 힘이
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변의 어떤 말들보다 저를 위로해준 것은 가끔 들르는 서점에서 들
춰본 몇 편의 시들, 혹은 버스 정류장에 쓰여진 시의 한 구절, 신문 지면 귀
퉁이의 짧은 시 한 편...
그렇게 만난 시들이 흔들리는 저를 부축해주고 안아주고 도닥여주며 온기
를 전해주었습니다.
시를 쓰면서 저도 선한 영향력을 주는 시인이 되겠노라 마음 속에 늘 다짐
을 합니다. 그때 저를 잡아 준 어느 시인들의 시처럼 제 시도 누군가에게 위
안이 되고 행복이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으며 감사한 일이 될 것
입니다.
당신의 기쁨을 제 시의 무한 팬인 남편과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지인분
들 그리고 무채색의 제 이름 석 자에 고운 색을 입혀주신 손옥자 선생님과
구로문화원 문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
위원님들과 시문학 관계자분들께 성실하고 좋은 시인이 되어 그 보답을 드
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서울 출생
국어국문학 전공
구로문화원 손옥자시교실 회원
시밭가꾸기 동인회회원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시인 김혜숙 님 !
이 사진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수년 전에 몰래 찍은 사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각 티슈 화장지로
예쁜 손 공예 작품을 만들어 우리를 즐겁게 하신 기억이 납니다.
제가 찍은 이 사진 혼자 보기 아까워요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