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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게시판 스크랩 죽은 타비다를 살린 베드로
CRYSTAL 추천 0 조회 10 10.03.24 07: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도와 거짓 사도들을 구별하라.

그때 욥파에 타비다라고 하는 어떤 제자가 있었는데 번역하면 도르카라. 그녀가 행한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더라. 그 즈음에 그녀가 병들어 죽으니 사람들이 그녀를 씻어 다락방에 뉘어 놓았더라. 룻다는 욥파에 가까우므로 제자들이 베드로가 그 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지체 말고 그들에게로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더라. 그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려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만든 겉옷과 속옷들을 보여 주니라.

 

베드로가 그들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시체를 향해 돌아서서 "타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니 그녀가 눈을 떴으며, 베드로를 보자 일어나 앉더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살아 있는 그녀를 보여 주니 이 일이 욥파 온 지역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으니라. 베드로가 욥파에서 여러 날을 피혁장이 시몬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더라.(행9:36-43)한킹. 

 

사울이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회심하여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변할 수 없을것 같았던 지독한 유대주의자였던 사울은 그동안의 자기의 모든 신념과 확신이 철저하게 무너짐을 경험한 것이었다. 영적인 지각변동이었다. 그렇게 본인의 자유의지나 결심이나 노력따위는 전혀 소용이 없이 사울의 많은 지성과 학문적인 설득과도 상관 없이 어느날....

 

그렇다. 바로 이 때인가조차 예측하지 못한 그 상황속에서 사울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빛을 만난것이다.

지성주의자들은 말한다. 인간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한것은 없다 혹은 그런 몰이해에 근거한 것은 존제하지 않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사울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까지 허상을 따르는 맹신자들 즉,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하게 멸하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매우 당연하며 지극히 옳고 정의라고 믿었다. 상식적으로 예수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정말 이단적이며 유대민족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며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가는 현장속에서 그의 죽음은 마땅하다 생각하던 사울이었다. 그랬던 사울이 부활의 주를 만났고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되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회심사건인 것이다. 이 즈음에 행전 기자 누가는 이제 초점을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돌린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모두들 흩어졌다. 다만 사도들만이 그곳에 숨어서 남았던 것이다. 사도들은 왜 피하지 않았을까? 사도들이 거기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엇을까? 사실 정말 위험한 것은 사도들이다. 그들이 실질적인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낙담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도들부터 확실하게 잡아서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표적은 사도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사도들은 그래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은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던 사도들은 더 이상 자신들만의 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령이 사도들 안에서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뜻에 의하여 사도들은 그곳에 남아서 다른 제자들을 섬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믿음안에 든든하게 설 수 있도록 보호해야할 책임이 남았던 것이다.

 

일찍이 예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거니와' (요10:11)하심을 사도들은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주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알았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제자들을 위하여 도망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성령의 강권하심이었다.

 

누가는 바로 이것을 보도하고 있는것이다.

베드로사도가 모든 지역을 경유하다가 룻다에 이르렀고 거기서 8년동안 중풍병으로 누었던 애니아를 회복시키게 되었다. 그 이유는 룻다에 이미 주를 믿기로 작정된 영혼들을 찾기 위한 것이었고 애니아의 회복을 본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도 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께 돌아왓다는 것은 베드로가 입을 열어서 예수 이름으로 치유하였기 때문이고 결국 예수를 구주로 믿었다는 것이 된다.

 

그 소문이 또한 퍼진것은 당연하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욥바에서 타비다의 죽음을 살린 사건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지 죽은 사람이 베드로 사도의 기도로 살아난것이 아니라 그 회복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와 행전에 기록한 사도들의 기적사건은 기적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바로 "복음" 을 전하기 위한 도구요 통로로서의 기능이었다는 것이다.

 

죽은자를 살리고 치유 뷸가한 병을 고침은 그 사건을 통해서 진정 창조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성경이 증거하는 핵심이 "예수" 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를 용서할 수 있으며 병을 고치는 것은 바로 구세주의 권한을 증거함이지 병고침이 본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 본질이 빠진채 "병 고침" 과 표적 사건이 "기도" 와 " 능력" 자 에게 집중되었고 예수라는 이름은 다만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서만 증거 되었다는 슬픈 현실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실제적으로 만나기도 전에 허상이며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엉뚱하게 기도를 쎄게 하고 열심을 강조하고 기도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괴상한 공식이 범람하는 것이고 사이비성 종교전문가들에 의하여 주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 많이 하는가 라는 '분량'이 자랑이 되며 어이 없게도 그것이 <믿음과 신앙의 척도>로 가늠하는 잣대까지 변질된것이다. 도대체 오늘날 무슨놈의 기도원들이 그리도 속출하는가? 공기좋고 물좋은 산에 어김없이 세워지는 기도원이니 수양관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 소속인가? 그렇게 많은 기도를 찬양하며 시행하는 한국교회는 대부분 어지간하면 기도원은 기본적으로 세운다.

 

건물교회로도 모자라서 기도원 세우고 각종 성회 어쩌고 하는 짓거리로 교인들을 우민화 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목사나 교단들이 신학을 엉터리로 했을까? 토속신앙 샤머니즘 신앙을 비판할 자격도 이미 상실한 것이 아닌가? 진정 그런 목사와 부흥사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는자들인가?

 

그들은 전혀 예수와 상관 없는 가짜들이다.

지금 유명하다는 신학자들 개혁신학학자들 역시 뭐가 다른가? 그들이 아무리 공부하고 논문을 발표하면 뭐하겠는가? 자기 교단에서 그러한 가짜 부흥사들이 판을 치고 있는것도 구별하지 못하거나 제제하지도 못하는 그 나물에 그밥들 아닌가? 결국 지금의 현대 교단 교회는 진실로 "복음" 과 상관 없는 종교 영업하는 집단임을 스스로 광고하고 있는겄이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과 십자가의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이단 사이비가 아니라 바로 정통운운하면서 여전히 목사노릇하는 그런 자들이야 말로 십자가의 원수들인것이다. 아무리 새벽기도 수 만명 모이면 뭐하겠는가?

 

사도들의 치유사건을 지금도 우려먹는 간 큰자들이 무수히 많다. 교회 부흥하기 위하여 그런 자들과 손을 잡고 생 쇼들을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신유은사자들이 사실이라면 모든 의학과 병원은 자멸해야 마땅하다. 그런 능력의 사람들이 기도만 하고 안수만 하면 암 덩어리가 사라지고 모든 불치의 병들이 고쳐지고 장애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치유와 회복이 주님의 목적이었다면

사도들이 뭐하러 도망 다니며 숨어 있었겠는가?

 

그 당시에는 병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일까? 그 당시에도 수 많은 병자들이 있었을 터이니 사도들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해서 병을 대대적으로 고치고 오늘날처럼 부흥성회를 열어서 유대인들까지 기적과 표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 아니겠는가? 이미 죽었던 타비다를 살린것처럼 말이다. 죽은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사도들이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로마인들도 고치고 바리새인들도 살리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것 아니겠는가?

 

 

다시 본문을 살펴보자. 이 본문에서 죽은 사람을 살린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본문속에 이미 들어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살아 있는 그녀를 보여 주니 이 일이 욥파 온 지역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으니라.>(행9:41-42)

 

많른 사람이 주를 믿으니라.

이것이 기적을 행한 목적이며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기적은 왜 없는가? 그 이유는 당시 사도들이 생존할 때까지는 구약 성경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만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나지 않는다. 구약이 완전하게 증거되기 위하여 신약이 필요한 것이다. 오래된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다. 장차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온 세상의 구주시요 구원자가 될 아들 예수를 보내신 까닭이기 때문이다. 신약, 즉 새 언약이신 아들이 이 땅에 발을 딛고 걸으셔야 했고 영광의 하나님의 형상과 광체가 아니라 종의 몸으로 죄인과 같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야 한 것이다. 친히 사람의 죄와 고통과 주리고 목마름과 아픔과 연약함을 체휼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죄의 근원을 직접 밝히시고 그 실체를 폭로하시고 그 악을 직접 십자가에서 깨트리셔야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의 아들 예수를 다 들어 내기 위하여 새 언약이 존제해야 함이다.

그리고 이제 사도들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드디어 신약성경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완성된 신 구약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이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약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의 예수는 말씀이 사람으로 오심이며 그 말씀이 바로 기록된 문자를 통해서 믿는 자들 안에 역사하심이며 이제 말씀이 떡이 되시고 그 말씀이 영이요 생명으로 우리 안에 함께 호흡하신다는 것이다.

 

이 비밀한 말씀, 하나님의 비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요 온전한 믿음이신 사실을 믿어지도록 계속해서 도우시는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에 사로잡혔던 요한 사도는 이렇게 찬양하였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요1:1-3)흠정역.

 

또한 창세기는<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흠정역. 이렇게 선포하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이 완성 된 이후에는 더 이상 기적이나 치유나 죽은자를 살리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예수를 신앙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록된 말씀, 특히 복음서의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이 보낸 서신서가 믿는 자들의 기준이되며 가치이며 복음과 함께 존제하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복음 안에서 세속에 섞이지 아니하며 더욱 깨어서 주의 뜻을 알고 헛된 사상과 사람의 유전과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주 안에 든든하게 서는 것이 복된 삶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악에게 속지 않기 위하여 "말씀" 이 늘 우리를 떠나지 않도록 주의해야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것이다. 말씀을 바르게 보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할 때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 본문에 집중하여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로 한다.

 

  2010/03/23 ⓒ 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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