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겪은 6.25 동란 전후의 이야기(27)
한찬식 선생님은 얼굴색이 검붉으시고 곱슬머리이시고 얼굴이 아
주 둥근 형이셨으며 키가 작으신 다부진 분이셨다.
여러 차례 국어선생님이 자주 바뀌던 어느 날 국어시간에 한찬식
선생님께서 우리 교실에 들어오셨다.
첫 분위기가 좀 서먹서먹하신 표정으로 교탁에 스셨는데 선생님께
서는 교실 안을 천천히 둘러 보시더니만 우리들에게 조용히 그리
고 직접 당신소개를 존대 말씀으로 하셨다.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쓰셨는데 목소리는 나직하셨다.
1.4후퇴 시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 오셨고 H고등학교에서 계시
다 전근하셨다 하면서 교실의 25명정도 남 녀 학생들을 둘러보시면
서 ‘반갑습니다’ 하셨다.
선생님께서 첫 수업이 끝나자 마자 대뜸 선생님 별명이 학생들 입
에서 튀어나왔다.
'다마내기'선생님! 얼굴 모습이 너무 동그래서 붙여 드린 선생님의
애칭이면서 구분 수단의 암호가 정해진 것이다.
학교에 부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는 야간 수업이 끝난
다음 희망하는 학생들 몇을 데리고 별도로 글짓기를 지도해 주셨다.
학생들이 지어온 시를 손수 교정도 해 주셨고 또 내용의 앞뒤를 다
시 정리도 해 주셨다.
밤 늦은 이 때의 우리들의 사제지간의 대화는 너무도 순수하였다.
새벽부터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야간학교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에
한번씩 글짓기 모임을 늦게까지 하고 그리고는 부지런히 통금이 되
기 전 귀가하고, 이런식으로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자진하여 그 옛날에 지금으로 말하면 특활지도를 하
여주신 셈이다.
얼마 있다가 우리들은 '강(江)'이란 주제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그 때의 내가 제출한 시의 내용이 모두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내용 중 '깊은 강물'을 묘사하는 단어로 '물심으로 젖어든다'란 표
현을 하였는데 내가 써 놓긴 하였지만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었
다.
선생님은 내가 지은 시를 천천히 낭송 하시더니만 '이 시는 이러 이
러한 생각을 가지고 쓴 시 같아요.
그리고 '물심'이란 표현은 화곡 학생이 만들어낸 새로운 말 같아요'
하시면서 엉성한 나의 시를 아주 소중하게 하나하나 짚어 가시면
서 지도해 주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글짓기 지도를 통하여 한 학생 한 학생의 개성을 다 인정
하시고 어린 우리들의 인격을 대접해 주셨다.
선생님 댁은 영도 조선소 앞이셨는데, 청학동으로 가려면 선생님
댁을 마주하여 오른쪽 옆으로 언덕을 넘어서 나의 집으로 가는데
길목 중간에 사셨다.
선생님과 나는 가끔 같이 걸어서 귀가하나 적도 있다.
어느날 선생님은 나를 부르셨다.
'화곡 군!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가자'하셨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친구 K군과 함께 선생님을 따라 갔는데 곧장 집
으로 가지 않고 도중 남포동 골목으로 들어서시더니만 어느 다방 2
층으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당시엔 학생들이 다방출입을 못하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는 멈칫거
리다가 선생님을 따라 올라갔다.
그 다방은 시화전의 행사장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는 문인들이 작품 발표 같은 것을 할 때
는 다방을 빌려서 행사장으로 이용하였다.
선생님은 나와 친구 K군을 시화전에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 해 남포동 다방에서 두번 광복동 다방에서 한번 이렇게 세번을
간 기억이 난다.
한번은 선생님이 지으신 시도 액자에 걸려 있었는데 나는 유심히
읽었다.
선생님은 작품들 앞에서 좀 떨어진 곳에 팔짱을 끼고 서셔서 작품
을 감상 하셨는데 나는 으레 시화전에 들어오면 선생님 같은 자세
로 작품을 감상해야 되는 줄 알고 같이 팔짱을 끼고 의미도 잘 모
를 시를 읽으면서 괜히 고개를 끄덕대며 뭘 좀 안다는 듯이 어색한
몸짓으로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 댁엘 들렸다.
학교에 같이 가자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셨는데 맨 위 맏 아드님이 초등
학교 6학년 이었다.
사모님께서는 선생님보다 키가 크셨고 어린 내가 뵙기로도 아주 미
인이셨는데 좀 쌀쌀한 표정을 가지셨고 맏아드님은 어릴 때 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너무나 많이 책을 읽어 6학년 될 때엔 어른들
이 읽어도 어려운 문학 책도 거의 다 읽었다고 하였는데 한 가지 탈
은 친구 만나러 나가지도 않고 방안에 들어앉아 책만 읽고 내가 갔
을 때에는 학교엘 갈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여 걱정이 많이 된다 하
셨다.
선생님은 마루에 앉은 나에게 당신이 지으신 시 '와(蛙)'를 낭독해
주셨다.
지금도 그 시에 내포된 뜻은 기억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은 선생님의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해방 전에 학교 선생님을 하셨고 김일성치하에서 모든 것을 다 몰수
당하고 온갖 학대를 받다가 1.4후퇴 때 집을 지키시는 부모님을 고
향에 남겨 두시고 LST 수송선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부산에 내
려왔는데 월급도 몇달씩이나 나오지 않는 피란민 야간학교 교사로
계시면서 그리운 부모님과 고향 그리고 친지들을 생각하면서 언제
나 통일이 오려나 하는 암담한 심정을 읊으신 그런 시로 기억된다.
시의 제목이 '와(蛙)' 인데 뛰려하니 지쳐 뛰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초점 잃은 흐리멍텅한 눈망울만 띠룩 대는 그런 당신의 신
세!
선생님은 어린 나의 앞에서 시를 낭송하시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
시면서 나의 손을 잡고 흐느끼셨다.
나도 눈물이 났다.
이 와(蛙)라는 시에 대한 추억은 6.25와 함께 나에게서는 없어질 수
없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이 시를 당시 유명한 문학지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세번
째 추천을 받기 위하여 보낼 시라고 하셨다.
당시엔 현대문학지에 세번 추천 받으면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된다
고 하셨다.
어느 날 수업이 시작될 때 평소와 다른 상기된 표정으로 교단에 서
신 선생님은 현대문학지에서 ‘와’ 라른 시로 세 번째 추천을 받았
다 하셨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치면서 선생님께서 사회적으로 문단에서 인정
받는 시인 되심을 축하해 드리며 기뻐하였다.
그해 여름방학 어느 일요일에 나는 가끔 혼자서 오르던 영도 고갈
산에 올랐다.
오르는 도중에 아주 커다란 참개구리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그 순간 갑자기 한찬식선생님의 시 '와(蛙)'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이 개구리를 통하여 지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뒤따르니 개구리는 기운 좋게 펄쩍 뛰더니만 저쪽으로 1m도
넘게 떨어져 내려 앉았다.
그러나 마음먹은 나는 그 개구리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뒤쫓기
시작하였다.
이리 뛰면 이리 쫒아가고 저리 뛰면 저리 쫒아가고 하면서 위협을
주니 나중엔 개구리가 멀리도 뛰지 못하고 종국에 가서는 아주 지
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도망을 가려고 뛸 동작은 취하나 몸이 말
을 듣지 않으니 엉덩이만 '들을썩'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개구리 아
래턱은 동시에 그 자리에서 땅 바닥에 닿을 뿐 처음 위세 좋게 펄쩍
뛰어 1m이상 공중잽이로 날으던 기상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숨만
겨우 쉬는 주저 앉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모습을 내려다 보
면서 아! 선생님의 시는 이런 상황을 읊으셨구나 하면서 선생님을
이해하였다.
당시 고갈산은 나무가 없는 산이었다.
내가 고갈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매
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무 없는 잔풀들만 나직이 깔린 정상에서 제2송도 쪽에서 태종대
방향으로 가는 바닷가를 아득하게 내려다보면 멀리서 하얗고 긴 줄
을 한 파도가 해안 쪽으로 겹겹이 가느다랗게 밀려 나오고 아주 가
늘게 '솨아'하는 파도 소리가 산 비탈을 타고 은은히 올라왔다.
오륙도가 보이는 우리 동네 쪽과 아치섬 태종대 뒷산 그리고 동삼
동의 아늑한 갯마을이 너무도 평화롭게 보였고 말 잔등 같은 펑퍼
짐한 산 정상의 허리에 깔린 풀들은 피어난 자잔한 야생화 자태를
뽐내려는 양인지 간혹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한쪽 구석부터 파도치
는 물결의 모습으로 밀리는 장관은 너무도 아름다워 어떤 때는 점
심 때도 잊고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멀리 서남쪽으로 한려수도의 시작이라는 욕지도 가덕도 쪽을 응시
하면서 서 있는 자리에서 몸을 한바퀴 돌리면 부산항의 아름다운
모습은 노래 가사 말처럼 ‘과연 ‘아세아의 관문이다 부산 항구다’
라는 생각이 지금까지 눈에 선하게 남아있다.
멀리 남쪽으로 선명히도 보이는 대마도를 의식하고 그 때 부터 저
게 왜 일본 땅일까 하는 의문도 가졌었다.
한찬식 선생님은 내가 신문배달을 하러 새벽 3시 반 선생님 댁 옆
을 지나치면서 어두컴컴한 조선소 앞길에서 영도다리까지의 부둣
길이 무서워 무서움을 떨치려고 혼자 큰소리로 이육사선생의 시를
암송하고 다니면 무서움이 없어진다고 말씀드렸더니만 선생님이
감격하셔서 집에 육사선생님의 시집이 있다는데도 구지 또 한권의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사 주셨다.
그 책 표지 다음 면에 작은 카드를 한장 넣으셨는데 선생님께서 직
접 글을 써 주셨다.
'육사 선생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분이시
고 모든 이가 존경하는 분인데 화곡이 그분의 시를 즐겨 암송한다
하니 참으로 장하다'하셨다.
그 이후 이육사 선생의 시는 나의 제일의 애송시가 되었고 성인이
되어 육사선생의 시 마다 어려있는 선생의 조국사랑의 흔적을 말
할 때는 그 때마다 시 암송에 도취해 좌중에서 나는 이육사선생이
계셨던 그 때에 내가 동시에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도 갖곤 하였다.
특히 황혼, 광야, 청포도, 자야곡, 노정기, 꽃 등은 내가 즐겨 암송
하는 시이다.
한찬식 선생님은 정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
시지 않으셨다.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가 제일인데 자칫 잘못하여 자신의
이익을 먼저 도모하게 되면 그 사람은 무너져 초라하게 되고 그 때
부터 모리배로 전락하여 한갖 선동꾼에 지나지 않는다 하셨다.
가지신 분이라 존경하셨고, 안의사께서 이등박문을 지적하여 서적
(鼠敵)이라 깔아 뭉개시는 표현을 쓰신 글을 읊으실 때는 작으신 체
구의 당신의 온 몸에 힘을 주어 움직이시면서 입술을 일자로 꽉 다
물으시면서 단호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셨다.
그 다음해(1958년) 봄 나의 아버지께서 부전동의 H 여자 중 고등학
교에 교감으로 취임 하시고 나도 좌천동에 있는 K고등학교 주간으
로 전학을 간 뒤에 선생님을 한두 번 뵌 적이 있었으나 청학동의 후
생주택 9평짜리의 임대한 집을 반납하고 서면 당 감동 셋집으로 이
사하고 H여고사택에 살고, 교통부꼭대기 범내 골로 이사하여 비로
소 우리소유 판자 집을 가진 그 이후엔 한번도 만나 뵙지 못하였다. 내가 1965년 5월 제대하던 해 그해 2월에 병기학교 아래 27 직접 지
원 중대에서 군 생활 말년을 보낼 때 선생님을 못 잊어 군복을 입
은 채로 영도다리 건너 조선소 앞 선생님 댁을 찾았으나 주택 흔적
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인근에 물어보았으나 선생님 댁이 이사 가
신 데를 이웃에서 다들 알지 못한다 하였다.
고생하면서 지난시절 찾아 뵈어 가면서 성의 있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이제 정신 좀 차려가면서 생각하니 세상에 뒤엉킨 지난 시
절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그 이후엔 선생님 가족이 어떻게 되셨는지 몰라 안타깝기만 하다.
1958년 이후 나는 학교에서 학생간부로 뽑혀 학생생활을 하였고 특
히 고 3 때는 대대장이라는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에 국가 경축일엔
시가행진도 아주 많아서 학교 마다 맨 앞에 교기 태극기를 든 기수
가 앞서고 그 뒤에 뺀드부가 우렁차게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해당학
교 대열 앞에 발 맞추어 먼저 나가면 그 다음에 대대장인 내가 목에
흰줄을 뀐 호루라기를 걸고 어깨와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왼쪽
팔엔 대대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우리학교 학생들 앞에서 보무도 당
당하게 내 디디며 소리 높여 구령을 붙이고 나갈 때는 나는 항상 한
찬식 선생님의 나라 사랑하심의 모습을 항상 머리에 떠 올렸고
6.25 전쟁 때 본 우리 국군 북진 대열이 군악대 차량을 앞세우고 진
군할 대의 기상을 염두에 두고 나라 상징 태극기의 휘날림 뒤에 따
라 나가면서 나라사랑과 명예 그리고 위풍당당의 의지를 불태웠었
다. 1957년 에 빼 놓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3월 21일, 판자 집이 갑자기 철거된 뒤 엉성하게 세워진 텐트 안에
서 원고가 빗물에 적셔지면서까지 잉크펜촉으로 원고를 쓰신 범조
사(凡潮社) 간행의 국난사개관(國難史槪觀)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내 아버님께서 6.25 이후 월남하셔서 쓰신 최초의 역사책
이다.
그 이후 한학자로서 검인정 고등학교 교과서를 직접 쓰셔서 그 책
으로 후학들을 가르치셨고 국학자로서 참으로 많은 책을 출간하셔
서 후학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고자 하셨다.
이제 내가 겪은 6.25전쟁 전 후의 경험 이야기가 거의 마칠 때가 되
었다.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실 하나를 끝으로 마치고자 한다.
바로 김일성의 우상화 과정에서 고통 받은 38이북의 종교인 탄압 과
정이다.
원산 바로 옆 내륙 쪽으로 덕원이란 곳이 있다.
8.15 해방이 되고 아버지가 우리 가족들을 이끌고 기차화통 바로 뒷
칸 꼭대기에 매달리다 시피하면서 내 고향 양양으로 내려 올 때 덕
원역 플랫폼에 잠시 내려 쉬었는데 로스께(소련군인)가 우리집 전
재산 이라고 할 수 있는 가방을 들치기 하듯 탈취하여 들고 튀어 달
아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버지는 그놈을 쫒아 가셨고 한참 지나도
오시지 않는 아버님 때문에 할머니는 애성이 나셔서 나를 업으신
채로 기차바퀴 밑에 뛰어 들겠다 하시던 바로 그 덕원이다.
그 곳은 당시 베네딕토 천주교 수도원이 있는 곳이다.
베네딕토 수도원은 독일에 본원을 둔 수도원인데 만주 연변의 연길
의 수도원까지도 관장하고 있었다.
함경남북도와 만주의 우리 땅 간도까지도 다 관장하는 규모가 큰
수도원이었다.
모든 수도원이 다 그렇듯이 천주교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그
리스도를 닮은 위치에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 봉사로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런 곳으로 각 수도원마다 수도원 규약이 있
어 그 규약에 서약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수도자로서 활동을 하는
곳이라 이해할 수 있다.
덕원 베네딕토(분도) 수도원에서 함북 회령 성당에 파견오신 힐라
리오 수사신부님(이분은 후일 원산에서 빨갱이들에게 순교당하셨
다고 그 때에 목격한 분이 부산에 내려와 말해주었다 하심)이 있
었다.
이분에게는 1935년12살의 어린 나이에 그 마을 의 다른 친구들과
영세를 받으신 S H J(원 이름은 S D R)마리아 라는 분이 말씀하셨
다.
당시 수도원 사제관엘 갔었는데 빵굽는 기게와 건포도 말린 것을
구경했는데 그것들이 아주 신기해 보였다고 추억을 말씀하시면서
그로부터 먼 뒷날 해방이 되고 그 해는 종교행사를 어느정도 할 수
가 있어서 좋아 했는데 그 다음해 1946년부터 서서히 '종교는 아편
과 같다', '하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이 세상 우리가 사는 이곳
이 곧 천국이다.'라고 떠들어 대면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스탈린
대원수님과 손잡고 이 조국을 지상낙원으로 만드시려고 나오셔서
지금 하늘과 땅 등 산천 초목이 모두 엎드려 김일성대원수님을 숭
배하고 김일성 대원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바다는 갈라져 길을 내
고 바람도 피해가고 강물은 흐르는 것을 멈추고 있으니 이러한 거
룩하고 신령한 분을 어찌 아니 떠 받들어 모시지 않겠는가 하면서
떠들어 대니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사회의 분위기는 냉각되고 말
았다 .
나도 기억하는데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는 그럴듯 하게 붙혀 놓
고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는 커다란 만화 그림에 열손가
락 열개의 발가락 전부에 금가락지를 모두 낀 그림을 그렸고 그 그
림에 달걀 깨트려 낳은 목욕통에서 좋아라고 목욕하는 만화 같은
그림을 수도 없이 벽에 붙혀 놓은 것을 보았다.
일제로 부터의 해방이 되고 해방이 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고
작 이런 것인가?
불교 천주교 개신교 할 것 없이 종교 집회는 갑자기 지하로 숨어들
었다.
소문내고 몇 사람이 모여 아멘! 소리만 나면 곧 인민재판이고 사상
검증이고 친일파 여부의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부루조아지 후예들
이라 하면서 가진 재산과 땅들을 전부 몰수하고 종국에 가서는 땅
은 모두 국유화 하여 배급 제도를 두어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일정
량을 타먹게 고쳐 신바람이 나서 일하게 하는 풍토는 애시 당초 없]
어지고 멀거니 배급이나 타먹으면서 결국 심부름이나 하고 선전도
구로 이용 당하면서 능력 없는 자들이 되어 공산 노동당원의 눈치
나 보며 그들에게 아부나 해가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놓은 사회 속
에서 사는 이상야릇한 신세가 되었다 하였다.
덕원 수도원 바로 이웃에 살던 나보다 네 살 많은 H M Y 라는 친구
의 아버지 댁도 부유한 집안이었는데 세상이 하도 이상하게 돌아가
니 온 가족을 이끌고 1949년경인가 6.25전 원산에서 아무도 모르
게 온 가족을 이끌고 배를 부리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남쪽으로 내
려 온다는 것이 배를 부리는 사람이 잘못대어 한 밤중에 38 이북 양
양 바닷가 한 어촌 마을 옆에 내려 주고 이북으로 가는 바람에 남한
에 내려 왔다고 이젠 성공 했다라고 좋아한 것도 잠시 뿐 인근 마을
사람에게 물어 보고 잘못된 것을 알고 천신만고 끝에 38선을 숨고
너머 강릉으로 피했고 곧이어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김제 쪽으로 피란 갔다가 6.25 이후 북괴의 남침
후 김제에 내려온 인민군에게 원산에서 내려온 사실이 밝혀져 총살
당할 뻔 했다가 1.4 후퇴 때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난 와서 H 군은
나와 네 살 차이인데도 동창이 되어 너니 내니 하고 말을 터놓고 지
내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연길에 봉사활동을 하시고 계시던 왕 레지날드 수사 신부님은 공산
치하의 이런 만주의 분위기를 읽고 원산으로 내려오시고 성직자
수도자가 있어도 김일성을 우상의 신으로 만드는 작태를 보셨고 해
방 초기는 천주교 신자들이 수도원의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한다
든지 하는 출입이 있었지만 1946년 부터는 이북 주민의 출입이 절
대로 허용 되지 않았고 수도원이 완전 고립되게 만들었기에 침묵
의 교회로 아무 종교 활동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6.25가 나
고 우리 국군이 동해 전선으로 진격하여 원산을 탈환한 뒤 1.4후퇴
시 나의 아버지가 타고 내려 오셨던 같은 배로 수도자 모두가 함께
부산으로 모두 철수하고 덕원의 수도원 자리는 김 무슨 대학이 들
어서 있다 하였다.
그곳에서 피난 나오신 수도자 들은 부산에서 뿔뿔이 흩어진 뒤 서
울 장충동에 수도원자리를 잡은 뒤 다시 왜관으로 내려 와 지금의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자리를 정하고 활동을 하셨는데 순심 중 고
등학교, 순심 여자 중 고등학교 등 교육기관도 운영하는 왕성한 종
교 활동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복음을 펴고 지역의 교육에 이바지
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당시 왜관 순심 고등학
교 장학생으로 공부한 G P S(59세)씨가 증언하기도 하였다.
38 이북에서 이러한 종교 탄압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저들의 특수
계급의 영화를 위하여 무산대중을 잘살게 해준다고 꼬득여 이북 전
역의 모든 종교인들을 밀고하게 만들어 가혹하게 탄압하고 종국에
가서는 밀고 하도록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북한의 모든 백성들을 공
산 노동당 괴수 김 정일의 마수의 노예로 전락시켜 놓고 거지들이
되게 만들고 노동당 군인들 특수계급만 왕권 전제군주들의 귀족계
급처럼 떵떵거리고 앉았으니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 이
고 사회주의 이고 그들 식 주체사상 국가란 말인가?
그래도 그것이 자랑이라고 6.25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적화 통
일을 하겠다고 한번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 그 자들이 이젠 핵무기
까지 거들먹 거려 가면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여기에 얼 빠진 좌
경 정치인들이 부화 뇌동 하는 작금의 사태이니 우리 국민들은 다
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하고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
건히 지키는 신념을 가져야 하겠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우스운 정치 수작을 부리는
오늘의 현상을 이제야 우리 국민들이 겨우 알고 있는 중이고 일부
이북을 알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어설픈 다 망해 빠진 맑스 레닌 사
상에 도취하게 만들어 그들을 선동하는 것을 대한민국의 통치 행위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정치인들과 부화 뇌동 하는 얼빠진 나이 헛
먹은 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이런 현실에 대하여 나는 깊이 우려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각성하고 이제부터라도 대한
민국을 공산 마수들로부터 방어하고 굳건히 지켜나가는데 온 나라
의 힘을 결집하여 공산마수들의 모습들을 한시 바삐 모두 없애 버
려야 진정한 이 땅의 평화가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통일은 감상적인 느낌만으로 대책 없이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통일은 과거 우리 국민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 매어 가면서
새마을 정신을 내 세울 때 처럼 똘똘 뭉쳐 우리나라의 국력을 크게
키우고 난 뒤에 모든 국가에게 얕잡히지 않는 위치에서 당당하게
통일을 주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