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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계 1장 1-3절
설교제목 : 하늘의 눈
새해 소원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2024년을 출발하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24년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혜로 의미있고 풍성한 결실을 맛보는 한 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한 해를 힘차게 출발했지만, 무언가 개운하지 않고 희망찬 기분이 들지 않는 듯합니다. 여전히 우리 세계에 드리운 어둠과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재난의 소식으로 불온함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런 외부세계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저에게 분명한 한 가지 소망은 일상의 일들을 묵묵히 그저 수행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기도의 제목보다 내게 맡겨진 일들을 곡진하게 해내기를 간구하며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새해 소망을 가지고 시작하셨습니까? 그 소망과 계획을 부여잡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 속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묵시적 세계
오늘날 우리 세계는 마치 묵시록의 세계처럼 전쟁의 피로 더욱 얼룩져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으로 기존의 토대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은 위태로워져 이상 기후로 인간의 문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대중의 무의식적 충동과 권력의 투사를 받은 지도자들이 또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근에는 정당의 지도자를 죽이려고 공격하여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광포해지는 이 세계가 마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계시록의 장면과 닮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런 세계의 갈등과 위협 앞에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우리 개인과 세계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살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고, 계시록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해석이 난해하여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던 책입니다. 공교회가 계시록을 정경으로 완전히 인정하게 된 것은 37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축제 서한(Festal Letter)에서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계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상징적 표현들과 종말에 대한 많은 입장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교회공동체 내에서조차 금기시하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계시록의 내용을 왜곡되게 해석한 시한부 종말론이나 근본주의자들의 문자주의적 해석의 오류, 기계론적인 상징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문학적 범주에서 예언으로서, 묵시문학으로서, 회람서신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묵시 : 하늘의 눈
1장 1절은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라고 기록합니다. 다르게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계시ἀποκάλυψις’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묵시’입니다. 그렇다면 계시 혹은 묵시는 어떤 의미일까요? “숨겨진 것을 밝히는 것” 또는 “미지의 진리에 대한 폭로 또는 현시”를 말합니다. 이런 묵시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끝에 대한 이야기, 심판을 위한 메시야의 도래, 그리고 인간의 심판과 보상에 대한 내용이 폭넓게 나타납니다. 이런 묵시는 비밀스럽게 소개하는 형식의 계시를 담은 언어표현 속에 보다 작은 형식으로 환상, 꿈, 현현, 천사와의 담론, 기도, 전설 등이 포괄적으로 수용되어 있습니다. 묵시를 일정한 체계 속에 담고 있는 글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을 묵시문학(the apocalypse literature)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런 계시 혹은 묵시는 하늘의 눈으로 땅을 보며 숨겨진 하늘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와 다가올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일면을 하늘의 관점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계시록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의 눈으로 세계의 모습을 보고, 초월적 관점으로 세계를 평가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결국 계시록은 누가 이 세계의 주인인가?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집단의식과 대중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자아는 모든 행동의 규범과 삶의 원칙을 규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의식적 군중이 일으킨 동요 속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며 살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관점에만 치중하여 우리는 우리 앞에서 곧 다가올 세계에 대한 큰 시선을 놓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의 눈과 땅의 관점으로 세계를 주시는 것을 넘어서 하늘의 눈에 비친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을 조망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며칠 전 꿈에 아주 현대적인 멋진 건물의 1층에 저는 살고 있었고, 3층 쯤 되어 보이는 건물의 주인이었습니다. 1층 건물은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 오른쪽에 테라스 같은 곳에서는 이미 2, 3층에 거주하는 이들이 휴식을 취하며 3개의 테이블 주위에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통유리로된 1층에 모두 커튼을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의 뒤쪽으로 들어가서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려고 했습니다. 목욕탕과 화장실 구조가 분리되어 있고, 미로처럼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려고 했습니다. 순간 갈아입을 옷이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찾으려고 수건으로 살짝 가리고 옆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인기척이 들려서 옆으로 피해서 나갔는데, 밖으로 나가는 길로 나갔고, 벌거벗은 채로 있는 모습에 당황하며 깨어났습니다. 이 꿈은 건물은 아주 멋지게 지어졌지만, 아직 샤워가 필요하고 갈아입을 옷을 마땅히 찾지 못한 상태임을 시사합니다. 정화가 일어난 후 새로운 태도로 새로운 페르조나로 단장할 때 비로소 그 건물의 주인으로 역할이 가능함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런 꿈도 일반 계시로서 하늘의 관점, 무의식의 관점으로 자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눈에 비친 이 세계의 참 모습, 나의 진상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도 역사의 주인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시의 중개자이자 증언자 요한
요한계시록의 저자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는 사도 요한이라는 주장이 있고, 요한 서신을 쓴 교회지도자로서 장로 요한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살아서 그때까지 환상을 보고 저술했을 것으로 보기보다는 요한서신을 쓴 장로 요한으로 저자를 상정하는 것이 더 합당한 듯 보입니다. 계시록은 요한이란 이름 하에 그 권위로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리스도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어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 계시를 알리셨다(1)고 기록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늘의 비밀이며, 다가올 시간에 펼쳐질 그림을 상징언어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요한은 주체가 되어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합니다. 요한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자신이 계시의 주체로서 말하지 않고, 자신을 묵시의 전달자로서 체험한 내용을 증언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한 개인이 엄청난 계시와 접속하게 되면 팽창되어 계시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려는 행태를 보일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신과 같은 예지력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중개자로서 전달자로서 한계를 규정하고 있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종이자 증언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종은 그리스어로 둘로스δοῦλος입니다. 종은 자신의 의지나 관심이 아니라 주인에 뜻에 복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이 첫 번째 지시하신 것은 자신의 발에서 신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벗는 것이며 신을 신지 않는다는 것은 고대 세계 종의 모습입니다.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닌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종의 모습입니다. 결국 종이란 심리학적으로 자기Self의 의지에 함몰이 아닌 스스로 매일 수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갈 2:20)입니다. 더 이상 자아가 삶의 중심이 아니고 그의 삶과 활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새로운 중심과 연결되어 있으며, 내적 원리를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2절과 9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증언자로 소개합니다. 증언한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마르투리아μαρτυρία입니다. 이것은 심판에 앞서서 무언가를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이 마르투리아의 의미는 순교의 의미의 어근과 같습니다. 이것은 증언자에게 이미 고난과 희생이 함축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증언자는 신의 뜻을 가감없이 증언하기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희생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증인의 길을 갔고 그것이 부활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예수의 삶을 통하여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합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신앙의 표시가 바로 순교였습니다. 죽지만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기에 기꺼이 그 길을 택하여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묵시, 우주적 드라마를 기꺼이 자발적 희생을 선택하여 증언하였던 요한을 유배지 밧모섬도 가둘 수 없었습니다. 하늘의 중개자이자 증언자였던 요한의 정체성처럼 중개자의 다리, 증언자의 목소리를 발하는 우리의 복된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때가 가까이
1장 3절의 말씀은 계시록의 결론인 22장 7절과 병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읽고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것을 삶의 언어로 번역하여 체화할 수 있는 자는 그 말씀이 그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에서 그때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 메시지가 마음이 닿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 카이로스는 먼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먼 미래의 투사된 것이 아닌 곧 우리에게 이 묵시의 말씀은 실제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살전 5: 2-3).”
안일함으로 ‘평안하다’, ‘안전하다’ 외치며, 무의식의 관성으로 나태하거나, 두려움과 불안으로 삶의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고 주저하여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 날은 밤의 도둑처럼 침투하여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바로 그 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말씀을 부단히 실행하는 자는 오히려 그 때가 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가 가까이 와 있다는 이 말씀을 새해에 굳게 붙들고 우리에게 맡기신 삶과 우리가 감당해야할 과제를 안일함이 아닌 성실함으로 감당하며 주님이 주신 복을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