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하반기 《詩로여는세상》 신인상_ 임선우, 하지은
심사위원 : 김병호, 김용옥, 전해수 포스트잇 감정 (외 2편) / 임선우 두통이 있을 때 너는 머리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포스트잇에는 밥을 못 먹는 시시콜콜한 이유부터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끈적한 여름 태어난 적 없는 너의 생일 상처 난 뒤꿈치 같은 것들이 적혀있다 어떤 때 너의 머리는 온통 포스트잇으로 덮여있다 숨 쉴 때마다 포스트잇은 한꺼번에 일어났다 가라앉으며 물고기가 비늘을 달싹이며 호흡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새가 날개깃에 바람을 가뒀다가 푸는 것 같기도 하다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을 하나씩 떼어내면 개운해진 네가 보인다 포스트잇은 네가 숨 쉬는 방식 포스트잇은 정직하고 한 자리에 머물러 오래를 쌓지 않기에 네가 없을 때 나는 포스트잇놀이하며 시간을 보낸다 포스트잇을 얼굴에 붙이고 표정으로 하나씩 떼어내면 굳어있던 내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포스트잇이 맵시 있어질수록 표류하는 나는 새벽마다 너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우리 사이엔 라벨보다 포스트잇이 적당하다고 주문을 건다 문득 출근길 버스를 기다린다 얼핏 추락하는 물체가 상에 잡힌다 철컹 가슴이 내려앉는다 목을 세우자 맞은편에서 고시텔 건물이 허공을 제압하고 있다 건물 앞 보도블록과 옥상을 번갈아 본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가 돌진해서 내려오다가 하늘로 다시 날아오른 걸까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해맑게 인사한다 낯설지 않은 이목구비 어린 시절 어울려 놀던 이웃집 아이가 떠오른다 쾌활하고 공깃돌놀이도 고무줄놀이도 잘하던 아이 성인이 되어 각자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그 애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다 문득 사라졌다 사무실에서 같은 책상 같은 의자를 쓰던 직원이 다른 책상 다른 의자로 이동하듯이 먹구름 낀 하늘을 보는데 바다가 너울거린다 수평을 허용하지 않고 채근하여 파도를 만들어내는 바다 갯바위를 할퀴며 따라붙는 파도에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에네르기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죽겠구나 힘을 빼는 순간 몸이 솟구친다 아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옥상정원은 까치가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두 발로 종종거리는 까치를 가끔 목격한다 점심시간 벤치에 문득이 15분 앉아있다 그림자놀이 그녀는 누구도 무엇도 아니다 여행하다 우연히 만났을 뿐 신혼여행 도중 이별하고 혼자 돌아오는 중이라 했다 묘한 눈빛에서 자유로운 기질이 뻗어왔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나란히 걸었다 우스갯소리에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 길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속 애완견 같았다 외딴길로 접어들자 오르막길이 나오고 밭에선 고구마 순이 한창 자라나고 있었다 이내 억센 일꾼 속에 뽑혀 올라오는 고구마들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줄기에서 분리돼 뒹구는 고구마와 무심히 바라보던 그녀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헤아리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일꾼들이 하나둘 밭에서 뛰쳐나와 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는 밭과 고랑 경계를 허물고 알몸들을 더 비참한 알몸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녀가 걱정되어 불렀으나 이름을 몰랐다 비가 그치고 언덕을 내려왔다 도시의 소음이 귀를 후려쳤다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다 통증이 밀려왔다 ▲임선우 / 충남 논산 출생. 대전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24년 하반기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 ................................................................................................................................. 스노슈잉* (외 2편) / 하지은 따듯한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붙잡고 있다 네 개의 다리를 갖고도 한쪽으로 균형을 맞춘 테이블 두 개의 다리를 갖고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신기하구나, 생각하면서 작은 돌들이 뭉쳐져 바닥을 이루고 있는 바닥을 본다 사람에게 맞는 기울기가 있다면 넘어지는 일이 없겠지 바깥으로부터 생긴 마음은 눈길 위에 처음 새겨진 발자국 눈은 녹아내린다 쌓이다가 사라지다가 빛들이 쌓이는 바닥 헬륨 풍선은 날아가려 하고 어린 나는 그것을 꼭 붙들었는데 영혼이 떠나려 할 때 꼭 그런 표정을 본 것만 같아 나는 한쪽 발을 뗄 수가 없고 걸어온 곳으로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누워 있을 때 눈이 있는 자리가 발자국 같아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움푹 파인 마음을 다시 덮는 설원이 있다 개가 썰매를 끌고 지나간다 눈은 썰매를 길들이면서 어두워지고 걷는다는 건 빛이 우리를 길들이는 소리 잠시 멈춰 서서 개가 목을 축일 때 나는 웃게 되고 왜 입가를 닦게 되는지 입가를 닦으면 사라지는 웃음이 있고 모르는 작은 밤들과 별들 사이 우리를 걷게 하는 눈이 있다 * 스노슈잉 : 눈 쌓인 설원에서 스노슈즈를 신고 등산이나 트레킹을 즐기는 레포츠
잠기고 마는 세계 수조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얼굴이 수초에 걸려 일그러지는 모습 색색의 열대어들이 얼굴에 뒤엉키는 모습 슬픔에 잠긴다는 건 이런 모습이겠지만 진짜 슬픔의 얼굴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슬픔은 자주 엎질러지고 빛은 슬픔을 찢고 들어오지만 물의 깊이에 너는 놀란 얼굴이 되곤 했다 너는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자고 말했다 누가 더 오래 숨을 참는지 내기하자고 했을 때 물 속이니까 잡은 두 손이 젖고 참고 있는 숨만큼 물은 물에 젖고 그냥 물이 되는 건 어떨까, 생각했을 때 너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세계는 흔들리고 있구나 우리는 내기에 약하고 물은 먼 곳으로 거대해진다 차오르는지도 모르게 차오르는 수조의 작은 균열 모래시계, 좁은 터널을 통과하는 작고 붉은 방울 너는 붉은 구피들이 춤을 춘다고 말한다 그때 넌 아름답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니? 나는 죽은 구피의 배를 바라보고 있다 배를 가르자 새끼들이 거품처럼 피어올랐다 너는 뒤돌아서 한참 동안 말이 없구나 수조의 물이 조금씩 말라가고 건너편에서 네가 손을 내민다 보이지 않아도 손은 따듯하고 눈이 기도처럼 내릴 때 고해신부 앞에서 매일 고백을 하지만 평안은 오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이 구원인 날들이 계속되고 눈을 뜨면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방 안에서 부서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아버지는 죄와 투쟁하면서 가난이 죄라고 말했다 밤이 되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어제 윗집이 사라졌고 아버지는 빈집에 들어가 통조림을 주워 왔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말을 삼켰고 눈빛을 삼켰다 구월인데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뉴스에서는 기상이변을 보도하느라 소란했고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를 바라보았다 끝날 것처럼 끝날 것처럼 끝나지 않는 것이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빈 거미줄을 바라보았다 발밑에 숨어있을 무수한 벌레들 불행은 가장 바닥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소리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이 없는 아이들이 계속 태어났고 아이들은 말을 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십자가 아래 무심히 눈은 쌓이고 있지만 눈은 없는 것 같고 귀를 막고 있으면 쥐들이 배고픈 슬픔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엎드려 죄지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창백한 나무들이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처럼 서 있을 때 소리들이 미사포처럼 덮이고 있다 그 사이를 고해신부의 목소리가 서성거리고 무엇을 용서하기 위해서 구름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소리가 소리 속에 묻힐 때 여백조차 적히지 않는 길 위로 나는 처음 발자국을 찍어 보았다 책이 사라지면서 아무도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했고 이야기는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하지은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24년 하반기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
--《詩로여는세상》 2024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