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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
창세기 25:27-34
북미에 알레스카 대륙은 원래 당시 소련(러시아) 땅이였습니다. 면적이 우리나라의 약 5배나 되는 아주 큰 대륙이 눈과 얼음으로 덮혀 별로 쓸모 없는 땅으로 여기고 1867년에 미국에 720만 달러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미국의 한 주가 되었습니다. 알레스카는 경관이 뛰어난 관광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금,은을 비롯한 석유와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보화가 묻혀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 턱밑에 군사 전략 요충지입니다. 러시아는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미국에 거져 준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면 스스로 복을 버릴 수 있습니다. 수고하는 것만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돼지에게 진주 밖에 되지 않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을 붙잡는가 하면 오는 복을 차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에서는 복을 차버린 사람이고 야곱은 복을 잡은 사람입니다. 쌍둥이는 배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창25:22). 태어날 때도 서로 먼저 나오려고 했습니다.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에서의 발목을 붙잡고 나왔기 때문에 거의 같은 시간에 출생을 했지만 순서상 에서가 장자가 되고 야곱은 차자가 된 것입니다.
에서는 자라서 들사람으로 사냥을 좋아했으며,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집안에 뱅뱅 돌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였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하루는 팥죽을 쑤고 있는데 에서가 사냥하다 돌아와 심히 피곤하고 배도 고파서 야곱에게 ‘그 팥죽 한 그릇 먹을 수 있도록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면 팥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며 맹세까지 하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장난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같지만 이로 인하여 엄청난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34). 그러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장자로서 가지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장자에게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아들보다 두 몫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전 아브라함 시대에는 장자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리를 이어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는 언약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번성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 언약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메시야가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러한 축복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경홀히 여기다’, ‘무가치하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가리켜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히12:16)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너무 배가 고팠기에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다 실수를 해서 장자의 명분을 준 것도 아닙니다. 만약 너무 배가 고프고 순간적인 실수를 했다면 팥죽을 먹고 나서라도 ‘앗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늦게라도 깨닫고 야곱에게 ‘아까는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실수를 해서 장자의 명분을 네게 준다고 했는데 장자의 명분을 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34절에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이 말씀에서 본바 대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은 애당초부터 귀중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배가 고파 죽게 되었기에 순간적으로 실수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너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며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 따위는 먼 훗날 뜬 구름 잡는 것 같이 여긴 것입니다. 신령한 약속 따위는 안중에 없고 지금 배가 고픈 것만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긴 것입니다. 에서의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에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와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배고픈 것이 급선무이지 내세 같은 것은 별로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꿈같은 이야기는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복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복은 물질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복은 신령한 영적인 복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잡히는 것과 먼 훗날에 영광,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제공이 원숭이한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열매를 주겠노라 하니까 원숭이들이 반대를 하자, 곧 말을 고치어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준다고 하니까 원숭이들이 좋아하였다는 우화에서 전래 된 말입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이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비유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복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음 것은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에서는 순간적(찰라)인 사람이였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하기 때문에 순간을 놓치면 짐승을 놓치기 때문에 순간적인(찰라) 사람입니다. 팥죽을 보는 순간 배고픔을 느끼고 빨리 먹어야 겠다는 생각뿐이였습니다. 빨리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 같이 말했습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은 소용 없다’고 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까지 하면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팥죽을 쑤었으면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다 같이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먹는 것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조급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였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바쁘게 서둘지 않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 추수 때가 되기까지 기다립니다.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무엇입니까? 조급함입니다. 기다릴 줄 모릅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되는 것을 참지 못해서 살인까지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가 조급함입니다(딤후3:4). 남들보다 빨리 하려고 합니다. 경쟁시대입니다. 빨리하면 이기고 조금 늦으면 뒤집니다. 휴대폰을 보십시오. 누가 먼저 새 상품을 만드느냐에 기업체들이 눈에 불을 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옛 주부들은 밥을 할 때 쌀을 씻고 일어 돌을 가려내고 물을 붓고 불을 지핍니다. 불을 너무 세게 하지 않고 적당하게 해서 끊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중요한 것은 불을 끄고 뜸을 들입니다. 뜸을 드리는 기다림이 맛있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보리밥은 두세 번을 끊이고 뜸을 드려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림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컵 라면도 전에는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는 1분만에 먹을 수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복은 약속을 믿고 기다릴 때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라고 말했습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괴로움을 과장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배가 고파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사냥을 하다 왔으니 배도 고프고 피곤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팥죽을 먹지 않으면 죽겠다는 말은 과장된 말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서 ‘죽겠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배고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하물며 ‘배가 불러 죽겠다’, ‘좋아 죽겠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죽겠다는 말은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불평이나 원망 같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복을 받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먹었던 에서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서는 장자가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지금 알라는 믿는 이슬람교도들 입니다. 기독교를 대적하고 자살 폭탄과 테러로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야곱은 장자가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서가 복을 받지 못하고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리브가가 태속에서 쌍둥이가 싸우므로 괴로워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을 봅시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게 된 근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로 넘기는 불행한 사건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작정되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에서는 버림 받은 자로, 야곱은 선택된 자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부목사로 모 교회에서 대학생들을 지도하고 농촌 교회에 봉사활동도 하였습니다. 그때 누구보다도 땀을 많이 흘리고 수고했던 학생을 수년 후에 만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그에게 ‘교회 잘 다니느냐’고 물으니까 ‘지금 교회에 안 나갑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따로 만나서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하는 말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사로 가르쳤고 시골 교회에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열심히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진작 자신은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을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분명히 차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명분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와 여러분들은 에서와 같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우선 배고픈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에서와 같은 버림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바꾸는 망령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서와 같이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의 백성으로 불러 주시고 언약 맺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참고 기다려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복을 우리 다 함께 받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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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핟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설교를 통해 은혜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에 은혜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