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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변화의 기적 (요 2:1-12)
어떤 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라.”였습니다. 두 시간동안 학생들은 머리를 짜내어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독관이 보니 한 학생이 두 시간 내내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져 다가가 답안지를 살펴보니 딱 한 줄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물이 그를 창조한 주인을 만나매 얼굴이 붉어졌더라” 그 학생이 후에 유명한 시인이 된 바이런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님을 만나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변화되셨습니까?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기적은 요한계시록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일어났던 기적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사역에는 항상 기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게 일어난 기적 중에는 필리핀에서 한 형제의 온 몸에 있던 문신이 사라지는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의 박지훈 형제와 박지희 자매가 동행해서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 형제는 일본과 중국에서 몸에 용문신과 호랑이 문신을 했습니다. 제 설교를 들으면서 저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도를 받고 난 후에 몸에 있던 문신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적을 통해서 제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형제는 그 기적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경험으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나옵니다. 주님과 마리아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가나라는 지역에서 열린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 진행 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립니다. 주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워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곁에서 목격한 제자들은 문신이 사라진 체험을 한 형제처럼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주님을 믿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본문의 사건의 키워드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 취임하여 처음으로 하는 일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문의 사건으로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것인가?’와 두 번째는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입니다.
1.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것인가?
1) 부족함이 풍성함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3,6절).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채우라고 하신 항아리는 자그마치 100리터 이상의 물이 들어가는 큰 통입니다. 이러한 통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이나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00리터 이상의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큰 생수병이 2리터이니까 생수병 300개 분량 이상의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부족했던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를 풍성하게 공급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족함을 느끼던 인생이 주님을 만나면 풍성한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은 시 23편에서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자기의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자기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셔서 물질적인 면에서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남들은 가뭄으로 망해갈 때에 100배의 소출을 거둬드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빈손으로 외삼촌 라반의집에 들어갔지만 20년 후에 나올 때는 짐승이 데를 이루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서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었지만 애굽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주변 국가의 백성들까지 먹여 살리는 풍성한 사람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풍성함은 물질보다 내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진정한 풍성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4장에서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는 손에 쥔 것이 없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주님을 만남으로 물질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2) 염려하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운 인생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3절).
잔치집은 즐거운 곳입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입니다. 시 104:15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전 10:19에서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진 사람은 인생을 즐겁고 기쁘게 삽니다. 그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예전에는 호남 사람들의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되는 요리로 홍어요리를 칩니다. 흑산도에서 잡은 싱싱한 홍어를 발효한 독특한 음식입니다. 손질한 홍어를 김치를 익히듯 상온에서 항아리에 담아 숙성을 시킵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도 힘들지만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어떤 생선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료가 됩니다. 그래서 호남 분들은 그 잔치의 수준과 품위를 이 홍어회 맛으로 가늠합니다. 홍어회가 고급스럽고 맛이 있으면 잔치 준비 잘했다고 말하고 반대로 홍어회가 별로면 잔치를 시원치 않게 평한답니다. 그래서 이 홍어회가 빠진 잔치 음식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도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주 맛으로 그 잔치 음식을 평가했습니다. 고급 포도주요 맛있는 포도주가 나오면 손님들이 그 잔치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품질이 시원치 않고 맛이 없으면 그 잔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주인들이 얼마나 염려가 컸겠습니까? 기뻐야 할 잔치가 걱정으로 가득 차게 됐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염려를 처리하시고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비교 종교학 교수는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면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불교나 유교를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쁨의 크기와 주님과의 친밀함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기쁨이 커지고 주님과 멀어지면 기쁨이 줄어듭니다. 염려는 주님과의 친밀함과 반비례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염려는 줄어들고 주님과 멀어지면 염려는 커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쁨과 염려의 크기를 살펴보세요. 주님과의 거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염려가 기쁨으로 변화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3) 별 볼일 없던 인생이 유용한 인생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6절).
본문에서 사용된 물과 항아리를 살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주로 샌들을 신었고 도로가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서 손발이 쉽게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현관에 물을 담아 놓은 항아리를 놓아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물 두 세 통의 양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 여섯 개가 잔치 집에 준비되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 손발을 씻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손발을 씻는데 쓰는 하찮은 물을 귀한 포도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이 물은 먹는 물이 아닙니다. 구정물이나 다름없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결혼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포도주로 변한 것입니다. 포도주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전보다 더 맛이 있는 아주 극상품 포도주를 만든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연회장이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말합니다. 물은 가치가 낮은 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흔한 물을 가지고 값이 비싸고 질이 좋은 포도주는 만드셨습니다.
마 21:42를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하찮다고 생각해서 버린 것을 주님께서 손을 대시니 건축물 가운데 가장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쓸모없던 사람이 요긴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로서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손을 대시니 가장 요긴한 주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과거에는 쓸모없었던 같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치 있는 귀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게 변한다는 것입니다(10절).
연회장이 신랑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세상은 처음에는 좋은 것을 내 놓아 환심을 산 후 마음을 열어 주면 나중에는 낮은 것을 내 놓습니다.
식당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반찬도 맛있게 만들고 친절하다가도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면 반찬가짓수도 줄고 맛도 줄고 불친절하게 바뀌는 예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보다 나중을 더 좋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점점 더 좋아집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훨씬 좋습니다.
삼하 5:10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점점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중은 처음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다윗과 반대로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서 점점 약해졌고 결국은 전쟁에서 아들들과 함께 한 날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가 하나님을 떠나므로 몰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렵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월이 지나면 여러분은 점점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말씀대로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5) 불신이 믿음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11절).
본문 11절을 보면 요한이 이 이적의 결과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본문은 1장 후반부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장 후반부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세례 요한을 따르던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 안드레의 소개로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다섯 사람이 주님과 함께 가나의 결혼 잔치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사람은 주님의 영적 권위 때문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주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리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가나의 결혼잔치에서 이적을 베푸시자 이들 다섯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은 중요합니다. 요 6:29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으면 기도합니다. 믿으면 행동합니다. 믿으면 헌신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기 전에는 주님을 위해 살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믿으면 변화됩니다. 믿으면 지옥백성이 천국백성으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2.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1) 주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2절).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주님만 빠져도 그런 기적은 없습니다.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난방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해봅시다. 추위에 가족들이 떨고 있습니다. 보일러공을 불렀지만 보일러공이 올 때까지는 추위에 덜어야 합니다. 보일러공이 오면 보일러가 고쳐지고 보일러가 고쳐지면 집안 온도가 달라집니다. 보일러공 한 사람만 다녀가도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청년이 골목에서 깡패한테 붙잡혀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골목에 경찰이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나타나자마다 깡패는 도망가고 청년은 구언을 받습니다. 경찰만 나타나도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주님에게는 우리의 영과 혼과 몸과 가정과 생활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합니다. 주님을 자신의 인격 속에 모시어 들이면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자신이 하는 일에 모셔 들이면 능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가정에 모셔 들이면 가족들의 행복이 달라집니다.
2) 기도했기 때문입니다(3절).
목회자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저를 만나고 저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더딘 것 같아도 점점 변화되어갑니다.
본문에 보면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신성을 가지신 주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 집에 가시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는데, 그날 결혼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종사촌이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데 2,00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그렇습니다.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첫째, 이 잔칫집에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초대를 받아간 것이 친척 관계를 말해줍니다. 마리아도 갔습니다. 둘째,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초대 손님이면 모자라는 것도 모르고 모자란다고 해서 그렇게 애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걱정을 하고 나섭니다. “이거, 야단났다! 손님들은 잔뜩 왔는데 대접할 포도주가 다 떨어졌으니, 이거 집안 망신 아닌가?” 마리아는 아마도 동생이나 언니쯤 되는 집의 행사였기 때문에 보통 손님과는 달리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서두르게 되고, 그 문제는 급기야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글을 통해서 베커라는 선장과 두 선원이 태평양에서 표류하다가 구원 받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태평양을 횡단하다가 배가 파선되어 20일간이나 뗏목을 타고 표류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작열하는 태양과 그로인한 목마름, 밤이면 엄습해오는 추위, 그리고 상어 떼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 며칠이 지났을 때는 거의 죽을 지경에 쳐했습니다. 그러나 베커 선장은 하나님은 물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매기가 날아와서 선장의 머리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그 갈매기를 잡아서 오랜만에 고기 식사를 하고 게다가 비가 내려 물을 마시게 되자 불볕더위도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더욱 용기를 내어 기도했습니다. 그 후 얼마 만에 구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문기자들이 와서 어떻게 엄청난 공포와 역경, 배고픔과 뜨거움, 그리고 초조함을 이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커 선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곤란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34:6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약속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한 만큼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4일에 우리교회는 미사리조정경기장으로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은 좋은 일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구름이 끼고 햇빛이 차단되고 시원한 일기를 구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구한대로 응답해주셨는지 모릅니다.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기도한대로 좋은 일기를 주셨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좋은 일기에 대해서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원했던 대로 환상적인 일기도 보장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하루를 시작할 때 먼저 기도를 드리고 시작합시다. 하루를 맡기는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하루를 정리하는 기도를 합시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합시다.
3)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7-9절).
하인들은 주님의 두 가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먼저는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채우라는 말씀이고 그 다음은 포도주를 찾는 연회장에게 아구까지 채운 물을 가져다주라는 말씀입니다.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채우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포도주를 찾는 연회장에게 물로 채운 항아리를 들고 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이 두 가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순종하기 쉬운 말씀이든 아니든 순종해야 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극과 극을 달린 선수는 이운재선수와 김병지 선수입니다. 사실 월드컵을 하기 전, 오랫동안 한국 제일의 골키퍼는 김병지 선수였습니다. 그에게는 ‘골 넣는 골키퍼’, ‘축구에 패션을 도입한 선수’, ‘꽁지머리 선수’ 등의 여러 가지 별명이 붙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미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수 아래로 여기던 이운재 선수에게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월드컵 전에 홍콩에서 있었던 칼스버그컵 대회에서 자기 골문을 비워두고 중앙선까지 몰고 가다가 볼을 빼앗겨 골을 먹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히딩크 감독은 대노했습니다. 김병지는 믿지 못할 선수다. 감독의 명대로 따르지 않는 선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오랫동안 대표선수에서 조차 탈락했습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월드컵에는 대표 선수로 뽑혔지만, 경기장에는 1분도 들어가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응원만 하는 응원 선수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이운재 선수는 히딩크 감독의 지시와 명령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비록 그의 플레이는 김병지선수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감독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그는 월드컵에서 크게 활약함으로 세계적인 골키퍼로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자기의 말에 불순종하는 선수를 빼고 자기의 말에 잘 순종하는 선수를 기용한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간혹 ‘우리 성도들이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감동 받은 일을 말할 때 어디 까지 순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목회의 성공은 사람의 수가 많은 것보다는 얼마만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는가를 봐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영락교회를 개척한 한경직 목사님은 대단히 훌륭한 목회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영락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기공 예배를 드릴 때라고 합니다. 그때 출석 교인이 150여명 되었습니다. 한목사님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헌신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당시 “집에 10일 먹을 것만 남기고 다 가지고 오시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참여한 자가 53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읽고 ‘한경직 목사님은 정말 목회를 잘 하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30년이 지나서 보니 그 때 순종한 53명은 한국의 300대 기업 안에 다 들어가는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일어난 기적과 변화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횡단 그리고 가나안입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제임스 디 멜로라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20대에는 “주여! 이 세상을 뒤집어 놓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30대에는 “주여!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조서”, 40대에는 “주여! 내 가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50대에는 “주여!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내가 변하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기도도 변하고 기도 응답도 달라집니다.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변화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