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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예레미야(5)/자녀
제목 : 신령한 하나님 자녀의 품성
성경 : 렘 2:20~28
찬송 : 254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724 낙양교회 수요예배
렘 2: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렘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렘 2: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렘 2: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렘 2: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렘 2:26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렘 2:27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렘 2:28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가?’ 이것이 20절이 던지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과 형통의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라를 멍에로 간주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은 토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토라를 따라 걸으면 왜 그 말씀을 주셨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모른 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바알의 의식,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가증한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뵐이 말한 것처럼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은 점차 우상처럼 변해갔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상실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부터 이상한 존재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참 종자를 심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포도나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형질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 읽기를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더 이상 수모를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적 욕망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들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 원칙들을 알려 줍니다.
첫 번째 원칙 :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라!(20~22절)
이스라엘은 옛적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부터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줄곧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20~22절은 이스라엘의 음행을 고발하는 데 집중하며 무엇보다 종교적 타락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지 그 속내를 드러내는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렘 2: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하나님이 고발하시는 내용인데, 이스라엘이 옛적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싫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을 이끌어 내셨고, 하나님의 아내와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무거운 멍에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언약적 의무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멍에를 메기 싫어하는 황소에 비유하십니다. 이것은 31:18절에서 이스라엘이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라고 탄식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러한 비유는 우상 숭배자가 우상처럼 변한다고 한 그레고리 뵐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나는 섬기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높은 언덕과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나 창녀같이 가나안의 종교 예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켜 행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출 24: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런데 바알의 유혹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방의 제단은 언덕이나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가나안 종교의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유사한 표현이 이사야 5:2절에도 나타납니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귀한 포도나무가 되게 하셨고,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초부터 귀한 포도나무나 극상품 포도나무였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도 아니고 그냥 땔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폐목을 하나님께서 귀한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감격하고 감사하고 자신의 모습을 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가지가 되고, 들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포로가 되고, 멍에를 메고 결박에 묶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멍에를 꺾어 결박을 끊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한다는 말이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이고, 한다는 행동이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입니다. 이 행동을 또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는 것이 22절에 나타납니다.
렘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여기서도 하나님이 어이없어 하시는 표현이 바로 ‘스스로’입니다. 13절에서도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고 하고, 17절에서 ‘자취함’ 즉 ‘스스로 취한 것’이라고 하고 22절에서도 ‘스스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무언가를 하기는 했습니다. 이런저런 노력을 했고, 가증한 조치들을 했습니다. 공통점이 뭡니까?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즉 자기 방식, 자기 원리대로 했다는 것, 전혀 유익하지 않고,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비누가 없었기에 재물을 사용하여 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다 조금 발전하여 비누가 나왔고 지금은 강력한 가루 세제나 액체 세제를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가증한 죄악들이 결코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워지지 않는 흔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선포하시면서 죄악에 대한 용서를 명시하십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용서만이 죄악의 흔적을 지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먼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그분의 뜻과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원칙 : 우상들을 제거하라!(23~25절)
하나님의 신령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망령된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발정 난 암나귀들이 헐떡거리는 것같이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렘 2:23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렘 2:24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23절 상반 절은 두 개의 부정문과 하나의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이어서 “나는 더렵혀지지 않았다.”, “바알들을 따라 가지 않았다.”라는 유다의 주장이 나옵니다.
20절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의 가증한 행위를 하늘과 땅이 다 보고 증언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리발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유다 백성의 내면 상태는 혼란스럽습니다.
23절 하반 절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하여 “골짜기에 있는 네 길을 보고 네가 무엇을 행했는지 알아라”라고 추궁하십니다. 그들의 내면은 죄의 욕구가 흘러 넘쳐서 주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정신없이 날뛰며 바알을 좇는 유다 백성을 동물에 비유합니다. 그들은 마치 발 빠른 암낙타와 같고 발정기에 있는 들암나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정성에 주목하지 말고 그렇게 표현할 만큼 하나님의 간절함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해 바알 신을 따라가느라고 벗은 발이 되지 말고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렘 2: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여기서 ‘벗은 발이 되지 말며 목이 갈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 백성들이 바알 신을 열렬하게 사모한 나머지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허겁지겁 따라가는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맨발이 되지 말며’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당시 바알의 제사가 우리나라 무당들이 굿하는 것과 비슷하여 사람들은 맨발로 타작마당 위에서 날뛰면서 “바알이여 바알이여”하며 목이 갈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들의 제사는 대단히 격렬하고 화끈한 제사였습니다. 원래 유다 백성들은 이런 식의 화끈한 제사를 좋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렇게 춤추고 뛰놀았습니다. 지난 번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는 그런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축제기간이었는데 불상을 만들어 가운데 놓고 백성들이 밤새 춤추며 마약에 취해 뛰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마스가 침공하여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가고 죽게 만든 것입니다.
‘벗은 발이 되지 말라’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인가를 따라갈 때는 좀 자세히 알아보고 따라 가야 하는데, 유다 백성들은 완전히 철부지 아이들처럼 앞뒤도 따져 보지 않고 무조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바알을 따라가면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가, 바알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함부로 벗은 발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가장 미워하십니다(출 20:3~5절).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으로 인식하기 쉽지 않은 현대적 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재물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쾌락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자녀들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좇고 있는 것들, 그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세 번째 원칙 : 참된 구원자를 붙들라!(26~28절)
이스라엘의 타락은 총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백성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까지 변질되어 종교적 타락에 동참했습니다.
렘 2:26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도둑은 잡히기 전까지는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집을 내 집처럼 마음껏 들락거릴 수 있고 남의 물건을 내 물건인 양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일단 경찰에게 붙들리면 그 때부터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또한 그 후로는 도둑이라는 불명예가 붙어 다닙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상의 집, 가서는 안 되는 다른 사람의 집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이란 가난한 이웃들의 집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붙들리지 않은 도둑들이기 때문에 마음껏 자기 욕심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왕과 족장,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모두 한탕 하기 위해 온갖 곳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 축복의 범위 안에서는 얼마든지 돌아다니고 그것은 누리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서 즐거움을 누리거나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도둑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한번 붙들리는 날에는 꼼짝 못하고 그동안 훔쳤던 것을 다 빼앗기고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처럼 중요한 것이 ‘내게 주시는 범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앞에 좋은 것이 보여도 하나님이 나에게 합법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면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혹 돈을 많이 버는 기회가 있고 잘 생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생각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유혹에 대해서는 아예 시체처럼 무 반응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렘 2:27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27절에는 나무와 돌을 경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나무와 돌을 경배하는 자들 속에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온할 때는 거짓 신들을 숭배했지만 환난을 당해 위기를 만나면 여호와께 와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구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입니다.
렘 2:28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
그러나 우상은 움직이지 못하며(10:1~5), 생각하거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인간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상은 그저 나무와 돌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의 재미에 빠지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의 상상을 믿기 때문입니다. 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믿고는 자신의 상상력을 절대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상은 환난 날에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결국 환난 날에 우상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비로소 하나님을 찾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받아야 하고 가까이 계실 때 만나야 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망할 때 바알과 아세라에게서 어떤 도움도 얻지 못했습니다.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생명도 없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다에 대한 법적인 절차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돌아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은 무가치한 우상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악한 욕망을 좇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모든 것이 뒤틀립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첫 단추를 단단히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신령한 하나님 자녀가 갖추어야 할 영적 원칙들을 꼭 기억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라! 우상들을 제거하라! 참된 구원자를 붙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