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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성대하게 드려져야 하는 부활절예배가, 코로나로 인해, 너무도 조용하고 소박하게 드려짐에 대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기모란” 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을 최소화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현재보다 느슨해질 경우 확진자가 4만 3000여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며, 이에 대해,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들 사회적 거리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코로나로 인해, 각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심으로, 성탄절보다 더 기쁜 부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국내외로, 여러 찬양 집회를 인도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 교수의 닉네임은, “하늘의 소망을 전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이 교수는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 못잖게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피아니스트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이 교수는,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이 교수가 17세 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그 곳에서 학업을 했지만, 정작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난 것은, “볼티모어 피바디 음대”에 입학한 이후 입니다. 이 교수가 이민 생활에 지쳐있을 때, 부흥집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집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찬양과 클래식 연주를 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감이 떠오르면서, 즉흥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악보만 보고 연주했는데, 이후엔 가사가 눈에 들어오고 즉흥적으로 변형된 연주를 하게 됐습니다. 성령이 저를 이끌어주셨지요”라고 합니다. 이후, 계속되는 찬양 집회를 통해, 개인뿐 아니라, 교회들이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 교수는 교회 뿐 아니라, 교도소, 군부대, 병원등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며, 찬양사역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이고, 음대를 나온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기도 후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변합니다. 그의 변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성령의 때”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을 한 분 더 소개하면, “성곡 오페라” 단장인 “백기현 교수”입니다. 그는 2살 때, 고모 등에 업혔다가 고모가 넘어지면서, 척추를 다쳐, 곱사등이 됩니다. 그렇게, 55년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을 하고, 비엔나로 건너가 그 곳에서 다시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는, 28세에는 대학교수가 되었고, 약 10년 후에는, 오페라단장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곱사등이 된 자신의 신체적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친구 교수의 권유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하나님은 여기서, 그에게, “내가 너의 등을 핀다”는 말씀과 함께, 그의 몸을 붙드시고, 비트시고, 어루만져 주심으로, 반듯한 정상인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며, 찬송으로 영광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기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기적에 대해, 어떤 이는, “정신적 현상” 또는, “인체의 에너지”등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있던, 우리를 끌어올리고, 우리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고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기적을 주십니다.
본문을 보시면,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며, 같은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다림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속히 이행시켜 달라며,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또,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까지 신구약 중간기의 약 400년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함으로,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다렸습니다. 눅 2장을 보시면, “안나와 시므온”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가운데,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랬기에, 마 27: 54을 보시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며, 막 1: 1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기다린 것이지만, 본문에서의 기다림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1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시면, “내가 여호와의 도움을 끈기 있게 기다렸더니 그가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끈기 있게”하나님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 때나, 아무 것이나 마구잡이로 기다리지 않습니다. 어느 때 기다립니까? 두 가지가 충족될 때,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는, 대상에 대한 “신뢰”입니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의 말은 신뢰하지 않기에,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수많은 시간이 가도 기다립니다. 이는, 그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의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뢰를 한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의지”가 약하다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즉,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2절을 보시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라고 합니다. 그는 평안한 상태에서, 여유롭게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의 구덩이와 오물의 수렁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렸던 겁니다. 이러한 다윗을 끌어 올려 두신 곳이 어디입니까? 반석 위에 두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때문에, 오해 살 때도 많이 있고, 손해 볼 때도 많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법”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물이 가는 길”이 됩니다. 곧, 세상이 흘러가는 데로, 따라가면, 오해 살 일도, 손해 볼 일도 적습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대해, 역행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입니다. 이러한 충돌을 피했던 자가 사울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아말렉을 전멸시키라고 했지만,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살찐 좋은 가축들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무엘이 말하길,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엔게디 동굴 안에 부하들과 숨었을 때, 그 곳으로 사울 왕이 혼자 들어왔습니다.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몸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부하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면서, 상황과 형편에 따라, 행하기를 권했습니다. 1: 600으로, 600명이 원하는 것을 혼자 부인한다면, 그 자리가 웅덩이와 수렁 속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수렁을 경험했기에, 시 62편을 비롯한 다윗의 여러 시를 보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 “나의 요새, 산성, 피난처, 반석, 보호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폭풍이 칠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그 어떤 위험 중에서도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왜? 부활하셨습니까? 구약에서 약속을 했기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부활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세상에 대해 역행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구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져, 반석 위에 굳게 설 수 있다는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 사태로 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으며,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담대함이 있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이 하나님께 올릴 찬송은,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작에서 소개한 이경미 교수와 백기현 교수가 전 세계로 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피아니스트이며, 성악가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경미 교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가능했고, 백기현 교수는 55년간 곱사등이로 지내던 것을 치료하셨기 때문입니다. 눅 19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성을 치자, 곁에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야단치소서. 조용히 하라고 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40절을 보시면,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한 것은, 그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마음에만 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구원하신 것은, 그에게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그의 입에 두신 것과 같은 일이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찬양을 담아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또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곧, 우리로 하여금, 실망과 좌절과 낙담의 자리로 이끌어가는 상황들과 또, 우리로 하여금, 염려와 근심과 걱정, 두려움으로 몰고가는 상황들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은, 사울의 질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사울이 죽기까지 사울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협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다윗이라면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학생 시절에 만났던 동료 목사님은, 선천적 심장질환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자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심장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불규칙적이어서, 자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기에, 자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고백하기를, 이러한 웅덩이와 수렁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같이,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준비된 영생의 복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 증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없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의 은혜 말고도, 시시때때로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더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한 아이는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더 줍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춘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끝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는,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죠지 뮬러는,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술고래였습니다. 또, 도벽까지 심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 73년 2개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에 있어서, 5만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죠지 뮬러는, 10,000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고, 2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후원하였으며, 42개국을 다니며 3백만명 이상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존 파이퍼 목사는, 죠지 뮬러의 사역에 대한 글을 정리하면서, 끝에는, 죠지 뮬러의 호소를 인용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과 필요를 다 하나님께 맡기는 행복한 길을 가지 않으렵니까? 이 길은 나처럼 여러분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곤고한 날에 그분을 부르도록 초대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여, 이렇게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게 되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늘 아버지가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죠지 뮬러처럼, 또, 다윗처럼, 수렁과 웅덩이에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깨닫는다면, 어찌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한 경우들을 보면, 주로 예배드릴 때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표제에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합니다. 곧, 성가대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찬양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던 대부분의 시간들은, 예배의 자리였고, 그랬기에, 다윗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한일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정장복 교수는, “예배란, 예배자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며, 예배의 목적은, “인간의 교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교단의 총회장이신 김태영 목사는, 지난 4월 4일자 기독공보에서, 담화문의 성격을 가진 목회서신을 통해, “기독교인에게 예배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부활절을 맞은 오늘,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삶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1791년 11월 14일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 클레어에서 대패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얼굴에서는, 전혀 불안한 기색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걱정이 된, 참모가 “장군님, 결정적인 패배가 앞으로 큰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때 워싱턴은, “자네는 뭐가 걱정이 되나? 이겨도 하나님을 믿고, 져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라고 했습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의 가사를 보면,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 주님께 맡기세요 /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 주님께 맡기세요 / 우리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 허덕이며 가야 하는 우리 인생인데 / 이럴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 주님 밖에 없어요 / 나는 그길 갈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우리의 집, 우리의 직장, 우리의 교회에 계실까요? 성도된 우리의 기준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일, 우리의 행위, 우리의 판단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오, 하나님,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빈 무덤을 만드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면서, 정녕,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의 부활을 진실로 믿는지를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과연, 몇 점짜리 인생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을 헤아리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의지하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