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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43)의 손가락과 입술은 얇고 길다. 지난 20여년 동안 그 손가락으로 전자 현을 튕기며 사랑을 노래했다. 최근엔 그 입술로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며 ‘샛별 예능인’으로 각광받고 있다. 대단한 재능을 가진 손가락과 입술인 셈이다 사진=김영관 |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록 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43)이 그런 부류다. 그는 독특한 화법을 자랑하는데, 그 비법은 세 가지다. 어미를 ‘~ㅂ니다’로 통일시켜 남 이야기하듯 고백하기, 빠른 말투를 갑자기 느리게 바꾸며 강약(强弱) 조절하기, 목적어와 서술어를 앞에 세워 궁금증 유발하기 등이 그것이다.
록 음악을 숭배하는 또래들에게 김태원의 말솜씨는 유명하다. 실력있는 멤버로 조직된 부활은 그의 입담에 기댄 바 크다. “김종서도, 이승철도 그렇게 빼왔습니다. 제가 그게 좀 쎕니다.” 차마 확인 못했지만 그가 경험한 수많은 사랑도 세치 혀 덕분이리라. 최근 들어 그의 입담에 녹아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초등학생도, 중·고등학생도, 대학생도, 가정주부도, 40대 직장인도 그의 말솜씨에 자지러진다. 덕분에 김태원에겐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샛별 예능인.’
일산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그를 만났다. 신곡 준비에 바쁜 그는 인터뷰 내내 맥주를 마셔댔다. 음악에 빠져 있을 땐 먹는 행위를 금한다고 했다. 안주는 칡즙이다. 액체로 취하고 액체로 보양을 하시는군요? 그랬더니 얼른 피자 두 판을 시켰다. “그렇습니다. 나도 가끔 굶어 죽을까 걱정 됩니다.” 모두가 까르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나눌 땐 예능인이 되고, 기타를 들면 록커가 되는 남자, 김태원이다.
◆적당한 욕심, 집요한 노력
김태원은 스스로 미운 오리새끼라고 말했다. “부모님 외모가 예술입니다. 형제들이 모두 오드리 헵번에, 그레고리 팩입니다. 다 모델이야. 근데 나만 못받았습니다, 외모를. 거기에 공부도 못하지. 싸움만 잘했습니다. 그런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기타를 듭니다. 외모도, 공부도 딸리니까 기타라도 잘해야지 싶었던 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외국 밴드의 연주를 듣고 똑같이 따라하는 카피(copy)방식으로 기타를 배웠다. 영국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일본 라우드니스(Loudness) 음반이 교과서였다.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작사, 작곡에 능숙한 밴드 리더가 되자. 콤플렉스가 많아서 노래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이름을 꺼낼 순 없지만 우리나라엔 노래 부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곡만 하면 되는데. 노래도 안되면서 음반을 내고. 그건 욕심입니다.”
남들이 2년간 연습하는 분량을 1년 만에 끝내고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기타 때문이었다. “아침까지 기타를 치니까 낮엔 잠을 자야지 않겠습니까?” 고교를 졸업할 무렵. 마침내 ‘강북엔 김태원, 강남엔 신대철’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모든 걸 포기하고 매달린 덕이다. “하나만 파고 들면 무조건 도가 틉니다. 저는 그걸 믿습니다.”
1985년 록 밴드 ‘부활’은 첫 앨범을 냈다. 결심한 대로 그는 리더로써 작사, 작곡만 하고 무대 정면에 나서진 않았다. 기대한 대로 앨범은 대박이 났다. “길을 걷는데 버스에서 ‘희야’가 흘러나옵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뛰어가서 운전기사에게 이게 내 곡이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2집까지 줄줄이 히트를 쳤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절망은 나의 힘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의 상징은 보컬리스트인 이승철이었다. ‘부활=이승철’이라는 공식은 밴드 리더 김태원에겐 비극이었다. “모두 승철이만 알아봤습니다. 무대에 올라가지 못할 뻔 한 기억도 있습니다. 승철이가 지나가니까 팬들이 모여 들어서 길이 막혔습니다. ‘나도 올라가야 하거든요’하고 부탁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누구신데 이러세요?’ 웃긴 이야깁니다. 큭큭큭큭.”
이승철은 솔로로 독립했고 부활은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접었다. 창작에 대한 초조함이 그를 절벽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저건(대마초) 한번 해봐야 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었죠. ‘마지막 콘서트’는 (대마초에) 취해서 만든 곡입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귀신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마치 50대가 유작을 쓴 느낌이 들죠. 제 나이가 스물 두 살이었는데. 그만큼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대마초라는 게.”
두 번이나 구속되고 나서야 대마초를 끊었다. 극진한 아내의 내조와 창작에 대한 열망 덕분이었다. “아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를 왔습니다. 거기에 감명을 받은 겁니다, 제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멜로디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알았죠. 아, 음악을 관두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이구나. 그 이후로 대마초와 인연은 끝납니다.”
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린 대마초는 사라졌다. 하지만 절망은 곁에 있었다. 힘겹게 내놓은 ‘사랑할 수록’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보컬 김재기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Lonely night’은 작품성을 인정 받았지만 큰 사랑을 받진 못했다. 이승철과 ‘Never ending story’를 내놓고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그동안 김태원은 노숙자처럼 거리의 부랑아로 지낸 적도 있고, 아내와 불화를 겪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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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기타리스트의 이름을 새겨 넣고 판매하는 기타는 드물다. 김태원(43)은 자기 이름을 새긴 기타를 작업실에 진열해 놓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 그게 바로 김태원이다. 사진=김영관 |
“창작은 궁지에 몰려야 합니다. 인생의 쓴 맛을 봐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겁니다. 일례로 여자를 잘 꼬시는 사람보다, 자주 채이는 사람이 좋은 곡을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마어마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좋은 작사가 나오질 않거든요. 절망은 창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젠 웬만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피터팬을 꿈꾸는 남자
팔팔했던 10대의 록커는 이제 40대의 가장이 됐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김태원은 아내와 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특히 작곡을 시작한 딸의 재능에 대해선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그 친구가 작곡을 하고 있어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길을 걷다가 전화기를 들고 ‘아빠, 잠깐!’하고는 떠오른 음을 녹음합니다. ‘라~라~라~라~.’ 이게 바로 피(血)라는 겁니다. 큭큭큭큭.”
긴 절망의 터널을 지나 힘겨운 인생을 즐기게 된 남자. 김태원에게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 “순수함을 지키는 게 힘듭니다. 작곡은 결국 감성입니다.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작곡을 하는 방법은 표절 뿐입니다. 사춘기의 순수함을 간직해야 하는데. 나이를 들어가니 그게 제일 어려울 수 밖에요. 제가 만든 좋은 곡들은 궁지에 몰려서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나온 겁니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Never ending story’의 가사를 떠올려 보면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힘겨워 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마지막으로 밴드 ‘부활’의 팬을 대변해서 한 마디. 늦둥이 예능인으로 변신한 김태원을 안타까워하진 않을까. 그는 말했다. “저는 곧 록커로 돌아갑니다. 믿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믿어 주시면 밴드 ‘부활’은 반드시 부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