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영웅인가, 날강도인가
미국 어느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콜럼버스를 재판하기 위한 모의법정을 열었는데 여기서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남미의 볼리비아에서는 그의 동상이 동유럽의 레닌 동상이나
이라크의 후세인 동상이 당했던 것처럼 성난 민중들에 의해 끌어내려져 내동댕이쳐졌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적 항해가로서 세계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추락하고 있을까.
하워드 진 전 보스턴대학 교수가 저술한 '미국민중사'는 콜럼버스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라스 카사스의 기록에 근거해 콜럼버스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많이 밝혀냈다.
라스 카사스는 가톨릭 사제로서 오랜 기간 서인도제도에 살면서 원주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라스 카사스는 교황청 앞으로 원주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취급을
금지시켜 줄 것을 청원하는 등 원주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말하자면 그는 최초의
인디언 인권운동가인 셈이다. 한편 라스 카사스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드 브라이는
라스 카사스가 기록한 인디언의 참혹한 모습을 조각 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렸다.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의 역사적 벤처투자
15세기 셀주크 터키가 소아시아와 인근 지역을 장악하면서 종래의 무역로가 막히게 되자 유럽은
새로운 동서 교역로를 찾기 위해 육로 대신 바닷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하는 등 동방무역로 개척을
선점해 나갔다. 한편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곧바로 인도로 가겠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고 경제적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지만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단숨에 따라잡기 위해선 모험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프론테라항을 출발한 콜럼버스는 10월 12일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섬을 발견했다. 콜럼버스 일행은 바하마제도와 쿠바에 잠깐 들렀다가 히스파뇰라섬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있는 섬)에 상륙해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육지가 인도의 동쪽 끝쯤이라고 착각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곳이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유라시아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인도제도, 인디오, 또는 인디언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콜럼버스의 악행
콜럼버스의 악행은 첫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히스파뇰라섬의 원주민인 아라와크족 한 명을 매우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죽였으며 귀국길에는 여러 명의 원주민을 스페인으로 잡아와 노예로
팔아넘겼다. 1차 항해를 끝내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땅에는 금은
물론이고 그 밖의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난다는 식으로 크게 과장된 보고를 해 국가적 영웅으로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2차 항해 시에는 17척의 배에 1200명의 대규모 인원을 파견해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의 인디언에 대한 만행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라와크족이 보유하던 금 장식품들은 멕시코로부터 유입된 것일 뿐 히스파뇰라섬에는 금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침입자들은 원주민들에게 일정량의 금을 주기적으로 바칠 것을
강요했다. 초기에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을 바쳤지만 더 이상 금을 구할 수 없게 된
원주민들에게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형벌이 가해졌다. 원주민들의 손목을 잘라버렸고, 손목이
잘린 인디언들은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의 만행이 두려워 카사바라는 독성식물을
먹고 자살을 선택하는 원주민도 많았다. 라스 카사스의 기록에는 콜럼버스가 예쁜 원주민
여자들을 납치해 선원들에게 성노리개로 선물했다는 사실도 포함돼 있다. 스페인인들은 칼의
성능을 시험한다면서 살아있는 인디언의 몸을 토막 내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1494년 라스 카사스가 처음 왔을 땐 300만명이 넘던 아라와크족이 1508년에 다시 왔을 때는
6만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스페인 원정대의 북미대륙 본토 탐험
북미대륙 본토 탐험은 1528년 스페인의 나르바에즈 원정부대에 의해 시작됐다. 그들은
플로리다의 탬파베이에 도착해 육로로 아팔라치만까지 북진한 후 다시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해 미시시피강 입구를 지나쳐 텍사스의 갤버스턴까지 탐험했다. 내륙 깊숙이까지
처음 탐험한 사람은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도 데 소토다. 그는 1539년 5월부터 약 3년간
600여명의 대원과 함께 오늘날의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앨라배마, 미시시피, 오클라호마, 텍사스주 일대를 금은보화를 찾겠다며 헤집고 다녔다.
원정부대는 수천명의 인디언을 살해하고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입혔다. 데 소토 탐험대는
흙피라미드 문명의 한 갈래인 미시시피 문명을 처음으로 발견함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이 원주민에게 안긴 가장 큰 재앙은 전염병이었다. 데 소토 일행과 만났던 원주민들 중 많은
사람이 유럽인들이 가져온 홍역, 천연두 등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감염돼 많은 경우 사망할 수밖에 없었다.
1540년 2월에는 정복자 코로나도가 역시 황금의 도시를 찾아 멕시코를 출발해 미국 내륙 깊숙이
원정길에 오른다. 원정대는 2년간에 걸쳐 애리조나와 뉴멕시코를 거쳐 캔자스까지 갔다 왔으나
금은 구경도 못하고 고생만 실컷 했다. 원정 중에 식량을 뺏기 위한 전투를 벌여 푸에블로 인디언
수백명을 죽였는데 이 시점을 인디언 살육전쟁의 본격적인 시발로 보고 있다.
-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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