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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7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본문 : 다니엘 1: 1-7 출 처| 이정선 목사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었더라
6.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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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운 것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세계 많은 민족들 가운데 우리 한민족만큼 외세의 침입에 고통을 당하고 서러움을 당했던 민족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청나라와 한판 맞장을 떴다가 아주 묵사발을 당하고 최악의 치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병자호란이지요. 싸움에 패한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청나라 군대 20만이 남한산성을 에워쌌습니다. 그 해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 닥쳐왔는데 성 안에는 겨우 50일 버틸 식량밖에 없었고, 성 밖에서는 청나라 군사들이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인조는 성 밖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치욕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나라의 주권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또 나라의 모든 백성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유다 왕 여호야김 역시 이런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왕위에 오른 지 겨우 3년이 되었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침공을 해 왔습니다. 인조 임금이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명나라와 화친하고 새로 일어난 청나라와 대적하다가 무참하게 당했던 것처럼, 오랜 강대국인 애굽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던 여호야김은 신흥 제국 바벨론과 대적하다가 몰매를 맞은 것입니다.
유다 왕국은 결국 느부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하지만, 이 첫 번째 침공으로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말 안 듣는 여호야김을 단단히 혼만 내주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이처럼 치욕스럽고 분통 터질 일이 없는 것이지요. 그나마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던 기구들을 뺏어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기물마저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써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유발시켰고, 민영환은 조약을 무산시키려고 애쓰다가 안 되자 국민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수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왕이 적에게 붙잡혀 수모를 당하고, 나라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그나마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기물마저 약탈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분해서 민영환처럼 자결을 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런 급박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왕이 항복을 한 것,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의 기물을 빼앗긴 것, 이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본문은 이 기막힌 사건을 단 한 줄로 설명합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만물을 지으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별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거? 내가 그렇게 시켰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그릇들을 빼앗은 느부갓네살은 그것들을 가지고 가서 자기 신의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바벨론의 신이 유다의 신 여호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동안 전쟁의 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여호와 하나님은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세요. “그거 내가 조금 그렇게 내줬다니까...”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에는 세상의 종말처럼 보이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콘트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잘나가던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몰리는 수도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던 사람이 한순간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패가 나뉘어 싸우다가 교회가 깨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도무지 일이 풀리지 않고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모든 일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만드시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들에도 그 현장 속에 계시면서 사건을 콘트롤하시고 수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시는데 바벨론의 신이 하나님을 잡아갔다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이겠습니까?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이 짧은 문장 속에 다니엘의 역사관,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은 보통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당연히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뉴스에서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여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니엘과 같이 이 사건을 성경 속에 기록한다면 뭐라고 쓰겠습니까? 다니엘 같으면 “주께서 그 백성의 간악함을 한탄하사 큰 비를 내리시매,” 혹은 “주께서 그 백성을 겸양케 하시려고 하늘 문을 여시매 큰 비가 내려 200명이 죽었더라.” 뭐 이런 식이 되겠지요?
내일 모레면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인 9.11 1주년이 되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기록을 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다니엘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방식처럼,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세상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다니엘은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그것도 앞날이 창창한 젊은 시절에 말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눈에 보이는 현상만 바라보고 절망하고 포기했더라면 그런 위대한 삶을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는 포로로 잡혀간 신분이었지만, 여러 왕조를 거쳐 최고위층에 포진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슬픔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에 부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우리의 생애가 훨씬 성숙하고 멋진 모습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서러움으로 우리의 삶이 부서지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고 아름답게 회복되고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법은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평탄하고 풍요한 길만 허락하셨다면,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일이 잘 풀려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어버리지는 않는지, 혹은 그 잘난 바리새인처럼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믿음이 최고인 것으로 착각하는 교만에 빠지지는 않는지 테스트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기를 써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기를 쓴다는 것이 가당치 않는 일이지만,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의 일기를 하나님이 쓰신다면 어떻게 쓰실까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린이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다면 어떤 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 아이린이 감기로 열이 나고 기침을 해서 고생을 좀 했다. 정선이와 탄옥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니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녀석들, 나도 자기들을 위해서 이처럼 노심초사하고 관심 갖고 있다는 것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뭐 이런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럼 여러분에게 숙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에 요즘 여러분이 고민하는 문제나 아니면 좋은 소식을 주제로 하나님의 일기를 한번 써 보세요. 제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숙제를 안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잘 아시죠?
여기서 잠깐 곁길로 나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다니엘이 바벨론과 페르시아 왕조에서 최고위층에 있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성경적인 관점에서 다니엘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요즘 한창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습니다. 이광수와 같은 민족의 선구자들, 주요한 같은 유명한 기독교 시인, 김활란 같은 교육자, 이런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쩌면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그들의 재능을 실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니엘 역시 친일파처럼, 자기 나라를 무너뜨린 적국에 협력해서 높은 지위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관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왕이 무릎을 꿇고 성전기물마저 빼앗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신 일이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망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단 말이지요.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귀환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지자인 다니엘이 그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성경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이 중요하지 않게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은 독립운동가들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는 독립운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이름이 잊혀지고 하나님 역시 패배한 신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상황 속에서,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젊은이들에 의해 그 민족의 이름이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명백하게 증거될 수 있었습니다. 왕이 무릎을 꿇고 나라가 망하는 암담한 현실이지만, 나라와 민족의 미래와 희망이 세계제국의 핵심부에 자리잡은 이 젊은이들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출발한 이스라엘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왕되심은 영원한 것입니다.
유다는 비록 실패하고 쇠망하게 되었지만,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탐낼만한 젊은 인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본서의 주인공인 다니엘과 그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죽어버린 껍데기 속에서 참된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이방 나라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아가면서까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과 예배로 그 믿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한번 실패했다고 아주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번 범죄했다고 영원히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때 꼭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비록 이스라엘처럼 때때로 실패했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때가 많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지고 자라도록 키워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다니엘 같은 훌륭한 믿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공동체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의 뿌리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키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부모님들도 우리를 그런 마음으로 키웠는지 모르지요.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리고 얼마나 변화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으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