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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본문 : 느헤미야 3: 1-32
탈무드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궁궐 안에 매우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오차>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왕은 그 과일나무를 지키기 위해 경비원 두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였고, 또 한 사람은 다리가 부자유스러운 지체장애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왕의 명령을 받고 <오차> 나무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은 그 과일을 따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까’ 상의한 끝에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시각장애자가 자기 어깨 위에 지체장애자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는 직접 과일을 딸 수는 없었지만, 지체장애자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서 맛있는 과일을 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진기한 과일들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뒤늦게 점점 그 진기한 과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몹시 화가 나서 두 사람을 잡아가둔 후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자는 “앞을 볼 수 없는 제가 어떻게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지체장애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두 사람이 그 진기한 열매를 따먹은 것이 분명한데도, 증거가 없어서 더 이상 두 사람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탈무드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의 힘은 한 사람의 힘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더불어 힘을 모으면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결의 힘(Unity Power)’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 되면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하나 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 되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주전 586년 남쪽 유다 나라는 당시 세계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에 의해 망하였습니다.
그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제국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페르시아제국의 고레스 왕이 해방을 선포함으로,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1차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파괴되었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재건 작업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이방사람들의 방해공작으로 성전재건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15년이 지난 후 학개와 스가랴를 중심으로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4~50년이 지난 주전 458년에 에스라 선지자가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을 ‘2차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주전 444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가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온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타버리는 등,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식기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4개월 만에 마침내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많은 건축 재료들을 싣고 무너진 성벽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것을 ‘3차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 일행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합니다만,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망해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어 강해지는 것을 시기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야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의 많은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러한 방해들을 뚫고 무너졌던 성벽재건 공사를 끝내고 맙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분명합니다.
느헤미야의 금식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많은 건축자재와 사람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52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서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느헤미야 외에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힘을 모았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무려 7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물론 앞서 본문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 그 다음은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 그 다음은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라고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러한 내용을 설교할 가치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몇 곳 더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태복음 1장의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반복되는 말씀을 보고 ‘도대체 산부인과복음도 아니고 왜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창세기 5장의 ’누구는 몇 세에 죽고, 누구는 몇 세에 죽고‘라고 반복되는 말씀을 보고 ’도대체 장의사복음도 아니고 왜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로 하여금 반복하여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가 할 일이 없어서 본문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뭔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본문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무려 75명이나 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그들을 보면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곳만 살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1절은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매우 특이합니다.
건축 전문가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제사장과 그의 형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은 대제사장 가문이라고 뒤짐 지고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성벽재건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또 8절을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금장색’이란 금 세공업자를 의미합니다.
금 세공업자와 향품 장사들도 성벽재건에 참여하였습니다.
또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보통은 OO의 아들 OO가 건축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살룸이라는 사람은 딸들과 함께 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또 14절부터 19절까지를 보면, 6개 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들과 레위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공사에 자진해서 참여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주도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동참한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제사장, 레위인, 정치인, 금 세공업자, 상인, 성문지기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또 나이가 든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아들이나 손자, 등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또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직업을 나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냥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느헤미야 3장에 다양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의미 없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지 않으신 줄로 믿습니다.
뭔가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특정한 직업, 특정한 계층, 특정한 연령층의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머집에서 <세대별 버스풍경>이라는 유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0대 커플들은 버스에 올랐을 때 자리가 생겨도 서로 앉지 않고, 둘이서 계속 수다를 떨면서 간다고 합니다.
20대 커플은 자리가 생기면 여자만 앉히고 남자는 서서 간다고 합니다.
30대 커플은 주로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이를 안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탄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대 커플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가끔 콩나물 값 이야기와 기저귀 값 이야기를 가지고 토론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40대 커플이 버스에 올라타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부인을 먼저 앉히고, 남편은 뒤로 떨어져서 앉는데, 앉고 나서도 애써 부인의 시선을 외면한다고 합니다.
50대 커플이 버스에 올라타면 어떻게 할까요?
주로 아줌마가 짐을 지고 타며, 아저씨는 먼저 뛰어가서 혼자 자리에 앉는다고 합니다. 가끔은 아줌마가 자는 동안 혼자 먼저 내릴 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세대 차이를 많이 느끼는 시대입니다.
또한 이 시대는 연령 뿐 아니라 학벌, 수입, 직급 등에 따라 차이를 많이 느끼는 시대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글에 의하면 서울 강남에 있는 모 초등학교에서 50평 이상 되는
대형아파트에 사는 한 아이가 34평 짜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에게 수준차가 나서 놀 수 없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또 어느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그랜저 급’ 이상 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집안의 아이하고만 놀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지 않은 모습이 교회 안에 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못 들어가게 제지당하자 문밖의 계단에 앉아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더랍니다. 그 때에 그 흑인은 대답하기를 "예, 제가 흑인이라고 해서 이 교회에 못 들어가게 하므로 슬퍼서 웁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그 교회에 못 들어갔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사실은 나도 아직 이 교회에 못 들어가 보았다"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인종간의 갈등이 있었던 옛날 미국교회 이야기입니다만,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이와 학벌과 수입과 직업과 피부색깔, 등에 따라 차별을 한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온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 된 사람들
오늘 본문을 보면 비록 직업과 나이와 집안과 성별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그 다음은(Next)’이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에 29번이나 나오는데, 이 말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질서를 지키며 협력하여 성벽재건공사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교회와 함께 ‘하나 됨(Unity)'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 사도와 흑인 시므온과 구레네에서 온 이방사람 루기오와 귀족 출신인 마나엔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바울, 등이 함께 어우러져 사역하던 교회였습니다. 피부색깔과 출신성분과 출신지역 등이 달랐지만, 그들은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중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까지 감당할 만큼 비전 안에서 하나 된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7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성벽재건이라는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예루살렘 근처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드고아에 사는 평민들은 공사에 참여했지만, 드고아에 사는 귀족들은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하는 것이 귀족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했다가 자기들의 기득권이 사라질 것을 염려했는지 모르지만, 드고아에 사는 귀족들은 그곳에 사는 평민들과 달리 성벽재건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고아의 귀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벽재건이라는 비전 안에서 하나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 당시 제사장들과 일반백성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과 어린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가, 가문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벽재건이라는 비전 안에서 서로 힘을 모은 결과, 52일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거지 한 명이 부자의 집 담벼락에 등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자는 “왜 남의 집 담벼력에 등을 비비고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거지는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 부자는 거지를 측은하게 여겨서 집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욕을 시켜주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 입혀주었으며 먹을 것까지 주어서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거창한 대접을 받은 거지는 너무나 기뻐서 친구 거지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한 거지부부는 자기들도 그러한 호강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부자 집에 가서 둘이 나란히 담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담벼락에 등을 비비는 거지 부부를 본 부자는 또 물었습니다.
“아니, 왜 당신들은 남의 집 담벼력에 나란히 서서 등을 비비고 있소?”
이 말을 들은 남편 거지는 친구거지가 가르쳐준 대로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부자는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 이 거지부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지부부는 대접해 주기는커녕 몽둥이찜질을 하는 부자에게 억울하다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전번 거지는 혼자였으니 등이 가려우면 담에 비빌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둘이 아니냐?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이기 때문에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주면 될 것을 뭣 때문에 남의 집 담에다 등을 비비느냐?”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나 혼자서는 가려운 등 하나 긁을 수도 없지만, 더불어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해도 서로 힘을 합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부부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부모 자식 간에, 형제 간에, 친구 간에,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등을 돌린 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주위에 보면 다른 사람과 접촉을 끊은 채 살아가는 유학생 부모와 이민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정말 안타깝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접촉을 끊은 채 살아가는 것을 좋지 않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언급하면서 ‘하나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장 19절과 20절에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똑똑한 한 사람을 쓰시지 않고 부족해 보여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이 항상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혼자서 수백만 명을 이끄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장인 이드로를 통해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들을 세우게 하여 더불어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 한 사람씩 보내신 것이 아니라,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과 접촉을 끊은 채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홀로 신앙생활이 아닌 더불어 신앙생활 하는 것을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되어 힘을 모으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1부 예배 후에 있을 <2009년 전교인체육대회>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평상시에는 아동부, 소년부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청년들이 오후 2시에 따로 2부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전교인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시내 대성당 광장에서 만난 한 청년에게 전도하려고 접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동안 청년들과 성인들 사이에 서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일 것입니다.
오늘 주일 1부 예배에 나오신 모든 분들은 예배 후 그냥 가지 마시고 행사에 다 참석하셨으면 합니다.
교회와 이웃하고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행사 장소도 멀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식을 들며 교제도 나누고 남선교회에서 준비한 푸짐한 상품을 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행사를 통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주안에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리더쉽 전문가이신 존 맥스웰 목사님의 책에 언급되어 있는 ‘기러기 예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기러기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여행을 할 때 ‘V자 대형’을 지어 날아갑니다. 기러기들은 ‘까옥까옥’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데, 소리를 내는 것은 앞쪽에 있는 기러기가 아니라 뒤쪽에 있는 기러기들입니다. 그것은 제일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속력을 늦추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이 V자형을 만들어 나는 것은 뒤에서 따라오는 기러기들이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날개를 휘저어 만드는 바람 파도를 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뒤를 따르는 기러기들이 70퍼센트나 쉽게 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은 V자형으로 날아가다가 제일 선두에 선 기러기가 힘이 빠지면 그 기러기는 제일 뒤로 가고, 다음 기러기가 서두에 서서 다른 기러기들을 이끌어 가고, 또 선두에 선 기러기가 힘이 빠지면 그 기러기는 제일 뒤로 가고, 다음 기러기가 서두에 서서 다른 기러기들을 이끌고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이 무리를 지어 그룹으로 날아가면 혼자서 날아갈 때보다 70%의 힘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심하면 상승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미물인 기러기들을 통해 ‘협동의 원리’를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면 큰일도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홀로가 아닌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홀로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개인, 가정, 샘, 부서,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 공동체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