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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25편 20절-22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그러니까 성실과 정직이 아니면 보호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실과 정직으로 살려면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느냐? 주를, 하나님을,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진리성도 다윗이 주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 주의 성실과 정직으로 보호를 받고자 한다. 어디서? 환난 가운데서.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실과 정직으로 보호를 받고자 한다는 거다.
하나님 당신 자체가 선한 분이니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선행이다. 인간처럼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고 활동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선이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활동은 인간 보기에는 야속한 게 있고, ‘왜 저러나?’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한다’ 하는 것도 있겠지만 영원 궁극적 결과적으로 죽음 저 너머에 가서 보면 선으로 나타난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데, 그 선행이 죽음 저 너머에 가서도, 쉽게 말하면 신령천국에 들어가서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효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반사람들은 선행을 안 하느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행은 그 생각이나 소원 목적이 말로나 행동으로나 물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유익이 되게 하는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 사람 속에 선이 들어있는지 악이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인간 앞에서는 눈에 보이게 나타남으로서 ‘선이다. 악이다’ 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제일 귀중한 것이 인격인데 이 인격이, 즉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선이나 사랑이나 거룩이나 진실이나, 또는 옳은 것이나 이런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들어가 있으면 선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속성품이, 속사람이 선이라.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언행심사는 전부가 선이다. 왜냐? 전부는 하나님을 닮은 데서 나온 신령한 성질이요, 신령한 성격이요, 그래서 죽음 저 너머 가서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효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을 대함이나, 일을 대함이나, 돈을 대함 등 모든 면에서 그 총 결산이 죽음 저 너머에 딱 내려져 있다. 그러니까 그 무엇을 하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따먹으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 활동에 대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따먹으려고 한다. 그런다고 해서 다 따먹느냐? 아니다. 못 따먹고도 죽고, 예를 들면 부자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만 보다가 부자로 못 살고 죽기도 하고, 또는 부자로 살았다고 해도 죽을 때는 그걸 다 내버리고 가고, 다른 사람이 그걸 다 차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젊음, 시간, 노력, 모든 물질적 투자가 이 세상에서 그치고 만다. 한 시대 두 시대가 지나가면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소원 목적은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 물질에 속한 것, 부귀나 명예나 영광을 가지고 누리는 것 등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것을 가지고 누리고자 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치고 이것이 아닌 사람이 있느냐? 한 사람도 없다. 대통령에게도 그게 들어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 들어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옳게 바르게 믿는다면 그런 거는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속 성품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처럼 닮는 것. 사람이 이렇게 되면 지식이 고상하고, 지혜가 고상하고, 진실 면이 고상하다. 지식에도 옳은 것이 있고, 지혜도 옳은 것이 있고, 사랑도 옳은 것이 있고, 진실도 옳은 것이 있으니, 옳은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성질과 성격과 성품으로 된 것은 그 질이 신령성이기 때문에 죽음 저 너머까지 가지고 간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은 사람은 그의 가치판단 평가 기준 이해타산이 전부는 죽음 저 너머에 내려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면서 일을 만나던, 사람을 만나던, 무엇을 하던 죽음 저 너머에 해당이 되는 정신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물질을 대하고, 세상살이 일을 해 나간다. 그러니 그 마음 그 정신이 얼마나 고상하냐? 얼마나 마음이 넓으냐? 얼마나 지식이 높으냐?
길을 가다가 보면 도로 한 쪽을 파고 전화선을 묻고, 얼마 안 가서 보면 또 그 자리를 파고 가스관을 묻는다고 파고 한다. 이러니 국민들 세금이 얼마나 낭비가 되느냐? 이게 뭐냐? 이러니 나라가 부강해 지겠느냐? 이게 ‘나쁘다. 좋다’ 이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치를 말하는 거다. 사람은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치를 모르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선한 마음, 선의 지식, 모든 사고방식이 선으로 인격적으로 똘똘 뭉쳐져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값진 사람으로 여기신다.
사람은 사고방식이 각각 차등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잡고 산다. 쉬운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의 소원 목적이 뭐겠느냐? 그 다음에 청년의 소원 목적이 뭐겠느냐?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의 소원 목적이 뭐겠느냐?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소원 목적이 뭐겠느냐?
어린아이의 소원 목적이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앞으로 뭐가 되어야지’ 그러느냐, 아니면 누가 먹고 있으면 그걸 쳐다보며 ‘나도 저거 먹고 싶다’ 하느냐? 어린아이는 먹고 마시는 것을 소원 목적한다. 그 다음에 청년의 소원 목적은 뭐냐? 자기들끼리 모여서 돈 가지고 놀러 다니길 좋아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현실위주로 나간다. 세상에 속한 것을 원한다. 그 다음에 어른들을 보면 그 소원 목적이 돈 많이 벌어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 이것도 세상에 속한 거다. 모두는 세상을 소원 목적한다.
이치를 알아라. 아무리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고,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고, 그것 때문에 아옹다옹하며 살지만 그 욕심을 부리다 사람이 망가지고, 그 욕심을 부리다 사람을 죽이고 한다. 이치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사람이 인격적으로 깨달아지고 고차원적으로 되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오늘 아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가만 보니까 그 분이 주관성이 굉장히 강했다. 옛날 어른들이 명령만 해대는 그런 주관성이 들어있었다. 일에 대한 목적을 두고 그걸 밀고 나가는 것만 알았지 사람과의 관계성에 문이 닫혀버렸다. 그래서 가정에서 외톨이가 돼버렸다.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일이 바로 되려면 먼저 사람끼리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일이 쉬워진다. 사람이 마음 문을 닫아놓고 일을 하려고 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부작용이 일어나고 일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사람이라고 하면 깨달아져야 한다. 누가 나를 만들었느냐? 흔히들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라고 하는데 말은 맞는 말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상은 못 들어간다. 인간을 누가 만들었느냐? 부모가 만들었느냐? 아니다. 부정모혈의 방편을 통해서 엄마의 태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부모 제 마음대로 낳은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가 어느 구석에 있다가 자기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느냐? 불교의 교리로 말한다면 조상 중에 누군가가 정말 선하게 살아서 사람으로 되어 나온 거냐? 그러면 소가 되고 뱀이 된 것은 조상이 지독하게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거냐? 이건 이치에 안 맞는다. 이치에 안 맞는 생각을 하면 사람이 어리석고 미련해진다.
인간 자기는 방편으로야 어떻게 태어났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았다. 그 이치가 자식이 부모를 닮은 것처럼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니까 인간 자기가 이 세상에서 바로 살려면 말하자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왜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내놨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바로 사는 겁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어떤 것이 인간이다. 어떤 소원 목적을 품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 가는데, 나그네로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한다’ 이게 다 들어있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 하나같이 ‘인간으로 왔으니 잘 먹고 잘 살다 가자’ 하고 있다. 이거 빼놓으면 뭐가 있느냐? 그래서 잘 살고 잘 먹고 편히 살다 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온갖 술책을 쓰는 거다. 인간의 사고방식이 그 이상 못 올라간다. 깨우침이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선악과를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했는데 인간이 그러지를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이 되었는데, 타락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을 죽였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면 그 자체가 타락인 거다. 그리고 타락이 된 자의 소원 목적은 땅에 속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이 이치를 전혀 모르는 거고,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성경을 통해서 이것을 이치적으로 모른다면 그 소원 목적은 여전히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아무리 세상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해도 이 이치를 모른다면 인격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안 됐구나.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고도, 또 많은 돈이 있어도 그 돈 때문에 감옥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직장에서 잘리기도 하는 거다. 성경으로 통해서 보면 이게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세계역사를 보면 성경을 믿고 사는 민족이 월등하게 높다.
자기가 자기를 알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뭐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기가 자기를 알면 자기를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린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다. 인간 자기가 ‘이래볼까, 저래볼까?’ 고민을 안 해본 사람 있느냐? 앞에서 말한 오늘 내가 만난 그 분도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해서 나를 찾아온 거다. 이치를 몰라서 그렇다.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줄 안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 왜 그러냐?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돈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 차원이 높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훤히 알아서 상대를 리드할 수 있다는 거다.
사기꾼들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는 하는데 아는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돈 뺐고 재산 뺐고 하는 거지만 그러나 사람을 참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의 차원이 이치적으로 낮구나. 소원 목적이 세상에 있구나. 세상만 쳐다보고 있구나. 사고방식의 차원이 낮구나’ 하는 것을 알고 ‘이것을 올려줘야지. 영특한 자로 만들어야지. 총명자로 만들어야지.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야지’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고, 목사님들의 가르침이고,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 생활이 가난하고 부자고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가정을 바로 인도하게 되고, 가정이 바로 되면 사회가 바로 돌아가고 국가도 바로 돌아가게 되는 거다. 이치가 그렇다. 성경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봐라. 그러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 주겠다’ 라고 약속을 했다. 즉 인간 중에 최고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다.
다윗의 기도가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라고 했는데,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실과 정직의 성품으로 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하나님은 진리이고 생명이시니 하나님의 모든 활동성은 진리진실이라. 그래서 진리진실로 된 모든 활동은 생명적이라.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면 자기 속이 바꿔지는 거다. 저질적인 마음을 품던 것이 고차원적으로 바꿔진다. 이걸 새사람이라고 하는 거다. 다윗은 자기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거다.
일반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성실도 있고 정직도 있다. ‘정직하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뭘 따먹고 나온 지식이라?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이라. 다시 말하면 세상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라 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머리를 쓰고 아무리 고상하게 말을 해도 물질적 정신 위로는 못 올라가는 거다. 원리가 그렇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물질 위에 있다. 쉽게 말하면 하늘이라 그 말이다. 하늘의 지식이라 그 말이다. 그래서 말씀의 정신을 가지면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물질을 다스리고 사람도 다스리고 모든 것을 해 나가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이게 안 된 사람은 그 정신 사상이 목적이 돈 밑에 가서 있다. 돈을 쳐다보는 것은 돈 밑에 있는 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감옥, 창살 없는 감옥에 딱 갇혀서 한 발작도 못 나오는 거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 때문이라든지 뭣 때문이라든지 근심 걱정으로 날을 새본 일이 있느냐? 자기가 자유롭다면 거기에서 탈출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걱정을 안 하려고 해도 그 마음에 근심 걱정이 떠나지를 않아서 고통을 겪는 일이 있다.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이런 마음과 정신의 고통으로 인해 죽는 거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는 거다.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마음의 힘을 잃으면 기가 다 죽어버린다. 몸은 건강한데 기가 죽으면 밥을 못 먹는다. 이러면 밥을 먹는다고 해도 기가 안 산다. 사람은 이렇게 되어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했다. 왜냐? 육체의 병은 자기의 마음을 못 다스려서 오기 때문이다. 이게 이치라.
이런 상태의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 하겠는데, 창살 없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야 되겠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이게 진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죄에서 빼낸다 그 말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빼낸다 그 말이다.
성경에 보니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을 갔는데, 도망을 가다가 이탈리아 밑에 있는 지중해, 아프리카 북쪽이 되겠는데 이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났다. 이 풍랑은 하나님께서 불게 한 거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달아나는데 하나님께서 풍랑을 보내서 요나가 탄 배를 깨는 거다. 이럴 때 요나로서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 회개가 되어야 하겠는데 회개가 안 된다.
그래, 나중에 그 배의 선원들과 선장들과 모여서 ‘이 일이 왜 왔나?’ 하고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렸다. 걸리게 되는 거다. 그러자 요나는 ‘나 때문에 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러니 나를 물속으로 던져라’ 라고 했는데, 보통 이걸 요나가 회개한 거라고 하는데 이건 그게 아니라 물속에 빠져 죽더라도 자기의 그 패역한 성질은 못 고치겠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돌아서겠다는 거다. 그러니 그 성격이 얼마나 고약한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를 사랑하시는지라 큰 고기를 보내서 요나를 집어 삼키게 했다. 하나님이 보낸 큰 고기가 와서 요나를 집어삼키니 요나가 그 큰 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기도를 하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성경에서 이런 걸 보면 신비스러운 얘기 같으나 이걸 정신 사상적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기고 패역을 부리는 자에게 큰 사건을 보내서 그 사건 속에 쏙 들어가게 해서 그 사건 속에서 그 자를 만드는 거다.
‘성실과 정직’이라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과 정직이 있고, 선악과 따먹은 데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한 데서 나온, 즉 안 믿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실과 정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성실과 정직은 이 땅에 관한 거고, 하나님의 성실과 정직은 죽음 저 너머에 가서도 영원한 효력을 볼 수 있는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 자기 속이 이것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성실과 정직의 사람이라 그 말이다.
일반세상은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을 한다. 그러면 그 행동이 다 좋은 거냐? 아니다. 사기꾼일수록 사람에게 잘 해준다. 그러나 그 마음의 뿌리는 사람의 마음을 사냥하고 사람을 속여서 물질을 빼앗고, 몸도 빼앗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빼앗는다. 이런 사람이 성실과 정직으로 행한다고 해도 그 정신이 어디에 박혀 있느냐? 마음이 어디에 박혀 있느냐? 그 성실과 정직의 행동이 어디에 뿌리를 박아놓고 나온 것이냐?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그 정신 사상 정신 소원 목적이 물질에, 세상에 딱 박혀 있다.
다윗이 환난 중에 성실과 정직으로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환난에서 성실과 정직의 마음으로 넘어지지 않고 승리자가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얼마나 훌륭한 기도냐? 예를 들어서 말하면 ‘하나님, 내가 지금 어떤 연유로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 중에 내가 넘어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면 이건 참으로 고상한 기도다. 고통 중에 사람이 넘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정신이 넘어지는 걸 말한다. 사람이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그의 마음이 넘어지지 않고 정신이 넘어지지 않으면 그 고통을 통과하고 나오는 거다.
환난 가운데서 성실과 정직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나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쇠몽둥이를 풀무불 속에 집어넣어 빨갛게 달구어서 망치로 두들기면 쇠에 붙었던 쇠똥이 다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가 그 쇠가 식을 만하면 또 다시 풀무불 속에 집어넣는다. 또 새빨갛게 되면 그것을 꺼내서 또 다시 두들겨서 쓸 만한 도구로 만들 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어려운 사건 환경 속에 집어넣어서 나쁜 생각 나쁜 정신이 자꾸 떨어져 나가게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 병으로 통해서, 가난으로 통해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 다음에 경제로 통해서 등등 여러 가지 방편을 쓰신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다. 그런데 이걸 못 보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 환경을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너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깨닫는 사람은 ‘아,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려고 그러시는구나. 나를 고차원적인 지혜지식자로 만드시려고 그러는구나’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가 겪은 그 사건을 거울 삼아서 ‘아,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지.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 깨닫고 만들어지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적인 자기로 만들어져 나간다.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해서 ‘우다닥’ 해 놓으면 뭐가 되느냐?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우리는 사건 환경이 왔을 때 ‘이 사건 환경이 나에게 뭘 깨닫게 하려고 그러나?’ 이걸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면서 ‘아차, 내가 미처 몰랐구나.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사람을 대했구나. 이제는 다시 깨닫자’ 하며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 나가는 거다. 그래야 잘못한 죄를 또 짓지 않게 되는 거다. 사람은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는 게 별로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데, 부모가 죽던 조상이 죽던 어떻게 죽었던 귀신이 되어서 떠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아니다. 몰라서 그러는 거다. ‘인간이 뭐다.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된다’ 하는 걸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힘이 세고 건장한 사람이라도 신앙의 이치를 모르고 인간이 이치를 모르고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밤에 다니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한다.
다윗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악한 무리들은 죽음 저 너머까지 영원한 효력성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이것을 대단히 미워하는 정신들이다. 악한 무리들은 죽음 저 너머에서 자기가 효력성을 볼 수 있는 것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이 옳은 소리를 하면 그만 눈에 쌍불을 켜며 미워한다. 악한 자들은 바른 이치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기 속에 숨어있는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지적하면 굉장히 싫어한다.
생각을 해봐라. 우리가 일반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어린아이는 무슨 책만 보느냐? 이론으로 복잡하게 된 책을 보느냐, 그림으로 된 책을 보느냐? 그림으로 된 책을 본다. 그 다음에는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수준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자 하고, 잘 하고자 하고, 뭔가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깨알 같은 이론적인 책을 많이 본다. 그러나 세상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로 인해 돈을 억수로 벌어도 그 사람의 머리의 수준은 세상밖에 안 된다. 이런 세상공부보다 최고의 공부,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공부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공부다. 사람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수준이다. 이 공부는 성경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골백 살을 먹어도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뭔가 특별하게 산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알고 보면 결국은 다 세상에 속한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우리가 배울 게 하나도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았다면 ‘아하, 이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헛살았구나. 이 세상에서도 본받을 게 없고 죽어서 죽음 저 너머에 가서도 뭐가 있겠나?’ 하게 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못 깨달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도 최고의 고차원적인 깨달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뭐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못 살겠고, 무엇 때문에 서로 쥐어뜯고 하느냐? 못 깨달아서 그렇다. 못 깨달았다는 말은 사람이 안 됐다는 말이다. 사람이 안 된 채 부자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다음은 망해 들어가게 되어있다. 정신면에서는 날마다 음란방탕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진리성도 다윗이 환난 속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으니 그 마음속에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 환난 속에서 먹고 살기 힘들지, 나쁜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해 오지, 말로 사람을 홀리지, ‘어떻게 하면 죽일까? 하고, 엿보고 있지. 이런 환난 속에서,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거짓된 사람이 될까봐, 수치스런 사람이 될까봐 무척이나 염려하고 근심한 것을 그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믿는 나는 가난할 때 ‘하나님, 이 가난을 통해서 나로 깨닫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가난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이 가난에 빠지고, 마음이 가난에 빠지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도둑질도 들어가고, 거짓말도 들어간다.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과 정신이 가난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잡아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마음을 잡아달라는 여기에는 진리를 붙잡는 게 들어있다. 마음이 하나님 말씀을 붙잡으면 자기가 가난에 빠지지 않는다. 이치가 그렇다. 왜냐? 진리의 깨달음이 자기가 안 빠지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아무리 사건 환경이 어려워도 가난에 빠져들지를 않는다. 오히려 그 가난을 다스리고 부자를 다스리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다스려 나간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냐?
사람이 마음이 가난에 빠진다는 것은 그 속에는 돈이 들어있지, 물질이 들어있지, 세상이 들어있는 거다. 사람 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으면 이 사람의 가치는 없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이 사람은 가치가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이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제일 가치 있게 보고 가치적으로 올리신다.
돈이 귀하냐, 사람이 귀하냐? 사람이 귀하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부자가 귀하냐, 사람이 귀하냐? 사람이 귀하다. 그렇다면 자기를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게 좋겠느냐, 인간 자기가 가난이 오던 어떤 고통이 오던 그걸 이기고 넘어갈 수 있는 차원 높은 사람이 더 좋으냐? 한국의 은행을 자기에게 다 주는 것이 좋겠는지, 아니면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차원 높은 사람이 더 좋은지? 가치판단의 수준이 있는 거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자기에게 환난 고통이 오는 걸 싫어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걸 빨리 물리쳐 달라고 한다. 그 어려운 것이 자기는 싫다 그 말이다. 그래서 보면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추석 때도 그렇고, 설 때도 그렇고, 생일에도 그렇고 ‘시기수부 시기사지, 재앙수부 재앙사지, 문 앞에 문신장군, 방 안에 무슨 장군’ 하면서 손을 비비고, 밥하고 술을 비벼서 싸리문 앞에 버리고 했는데 그걸 까치가 와서 먹더라. 그렇게 열심히 빌면서도 걸핏하면 형제끼리 돈 때문에 싸우고 한다. 그래서 지금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안 돼서 그렇구나.
물질은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 물질은 사람을 위해 있는 거다. 돈은 사람을 위해 있는 거다. 사람을 위하다 보면 돈은 돌고 돌아서 자기에게 온다. 그 다음에 사업이 먼저냐, 사건이 먼저냐? 이럴 때는 사람을 위해서 사건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사건 속에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이니까. 사람을 넘어뜨려 놓고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사람이 귀한 줄 알고 물질을 사람을 위해 쓸 줄 알아야지 물질을 위해서 사람이 망가져 들어가던 말던 자기 착복만 하고 있다면 이건 사람이 아니다.
말로 행동으로 사람을 잘 할퀴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느냐? 고양이라고 한다. 피부와 골각은 사람인데 그 안의 정신 사상은 짐승과 같은 성질이 들어있다는 거다. 자기밖에 모르고 먹을 것만 찾는 사람에게는 돼지라고 한다. 인간의 너울을 썼지만, 피부와 골각은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안에 든 것은 돼지와 같은 성질이라는 거다. 우리 속의 이런 성질을 고치자. 사람으로 바로 만들어지자.
환난 고통 속에서 성실과 정직의 사람으로,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항상 이걸 잊지 말아라. 안 그러면 네가 또 어떤 환경을 만나면 또 짐승 같은 짓을 하게 된다. 깨닫지 못하면 또 그런다. 그걸 알아라. 네가 알지 못하면, 이치를 알지 못하면 너는 이용물이다.
옥수수는 껍데기가 왜 있는 거냐? 말하자면 농부가 옥수수를 왜 심는 거냐? 껍데기를 바라고 심는 거냐, 알맹이를 바라고 심는 거냐? 알맹이다. 세상 물질성은 껍데기다. 이 껍데기가 있는 동안에 속사람을 알맹이로 잘 만들어 가다가 죽을 때 껍데기는 벗어버리고 속사람이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된다. 이 껍데기가 있는 동안에 속사람을 알맹이로 잘 만들어라. 부지런히 깨닫고 차원 높은 사람이 되어라.
사람이 사람을 인도할 줄 알면 이 사람은 차원이 높은 사람이다. 사람을 데려다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집어넣는 교훈은 세상에는 없다. 교회라면 이런 교훈을 줘야 하는 건데 오늘날 교회는 요지경이고 도둑의 세상이 되어서 누가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하면 가까운 아무 교회나 나가라고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
20절-22절: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환난을 만났느냐?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꿔서 깨달음으로 나와야 내가 영원히 수치스러운 사람이 안 된다 그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깨닫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환난 핍박이 지나갔다 할지라도 또 다른 각도로, 또 다른 방편으로 환난이 올 때는 너는 또 넘어지고 또 수치스러움을 당한다. 바로 서지 않으면 너는 또 수치스러운 자가 된다. 인격 면에, 마음 씀씀이 모든 면에서 너는 또 수치를 당하게 된다. ‘잘 산다. 못 산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인격 면의 수치, 사람 됨됨이의 수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