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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21. <마음 하나 젖지 않을 법한 우산> 240822
매년 4월에서 5월 즈음이면 아직은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듯한 어색한 양복이나 투피스 정장을 입은 낯선 청년들이 학교에 나타나곤 한다. 분명 얼굴은 아직 어린데 복장이 이러하니 ‘갑자기 외부인이 나타났다’라며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부장에게 전화를 넣게 하는 이들, 장차 선생님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학교에 나타난 이들은 교육실습생, 줄여서 교생이라고 부른다. 매일 변함없는 수업에, 꾸역꾸역 밀려들어 책상 한 켠을 제자리인 양 차지한 업무에, 아이들과의 씨름에 짬을 낼 여력이라고는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하길 꿈꾸는 후배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매년 실습생 지도를 자청하곤 했다. 특히 나는 학생부에 주로 있으니 국어 교과 수업보다도 학생들을 대할 때 내가 갖는 마음가짐과 여러 가지 험한 경험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사실 내가 원래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기보다는 내가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만났던 지도 선생님께 배운 거라고 봐야 한다.
대학교 4학년 1학기의 5월, 학교 근처의 모 중학교로 배정이 되었다. 학부 4학년이긴 했어도 집안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워낙에 공부를 안 한다고 소문이 났던 나였기에, 같이 수업을 듣던 과 동기들끼리 으레 삼삼오오 구성하는 스터디 그룹에 누구 하나 끼워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는 것도 거의 없는데 실제 학교 수업을 맡게 될 거라는 사실이 내겐 거의 공포감에 가깝게 다가왔다.
게다가 두 학년 위 남자 선배 중 가장 키 크고 사람 좋고 인물 좋기로 유명한 한 선배와 1학년 같은 반에 짝꿍으로 배정받아서 잔뜩 주눅도 들어 있던 상태였다. 학원 강의나 과외로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칠판 앞에 선다는 상상만 해도 긴장감에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엔 서로 경계하면서 거리를 좀 유지했지만, 둘째 날부터 교실에선 민망한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교실에서 급식을 먹었는데 선배와 내가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밥을 먹고 있으면 아이들이 그 형만 둘러싸고 말을 걸고 친한 척을 하는 거였다. 그 모양을 위에서 조감도로 내려다봤다면 딱 막대자석의 한쪽 극에만 쇳가루를 뿌려 놓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한 며칠 그랬더니 교실에 있는 것이 나도 선배도 좀 민망해졌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운동장 스탠드에 나와 홀로 앉아 있는 내 곁으로 담당 선생님이 다가와 앉으셨다.
“아이들 대하는 게 쉽지 않으시죠?”
“선생님, 저어, 아이들한테 제가 뭘 해야 될까요?”
“뭘 하긴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괜찮아요.”
“네?”
“선생님이 대학에서 배운 것들이 많지도 않겠지만, 그게 선생님이 학교에 오셨을 때 그대로 쓰이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교생 실습 기간도 너무 짧아서 수업에 대해 배우기도 어려워요. 다만, 아이들과 재미나게, 편안하게 지내다 가세요. 이야기도 많이 나누시고, 가르치려고 생각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대화를 나눠보세요.”
글로만 써놓고 보면 선배 선생님이 후배를 무시하는 말투 같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생님이 따뜻한 표정으로 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예비 선생님’이 아니라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는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데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에요. 너무 선생님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형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아직 학교와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도 혹시나 무시당할까 봐, 졸업도 하지 못했는데도 선생님 대접을 받으려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과 말투로 내가 먼저 아이들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곁을 내어 주지도 않고선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고 혼자 상처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주말을 보내고 나서 선생님이랍시고 폼 잡는 대신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5분도 안 돼서 급식을 다 먹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농구공을 튕겼다. 그랬더니 학교 올 때도 가방에 농구공 가방을 함께 매달고 오던 남자애 몇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눈빛과 패스를 몇 번 주고받은 후 우리는 한 팀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렇게 몇 번의 점심시간이 지나 같은 책상에서 급식을 먹고 곧장 농구하러 나가는 것에 익숙해졌을 즈음 아이들은 공을 던지면서 자기들의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었다. 몰래 피시방에 갔다가 엄마한테 등짝 맞은 이야기, 매일 술 마시고 욕하는 아빠 이야기, 온천천에서 담배 피우다 동네 형들한테 혼난 이야기, 좋아하는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님에게 겨우 꺼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기 개미가 한 마리 지나가네?’ 같은 느낌의 무심한 말투로 말이다. 친구에게니까 굳이 어렵게 각 잡고 분위기 조성하면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가르쳐줄 것 없으니까 그냥 너 원래 살던 대로 잘 지내다 가라고 말씀하셨던 그 선생님은 학년이 끝날 때 즈음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평생 동지, 평생 친구’라고 고백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지, 그리고 친구라. 학생이라면 선생님 앞에서 자연히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그저 ‘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니었구나. 선생은 아이들보다 조금 더 살았고 조금 더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사람이 아니구나.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는 근본적으로 친구 같아야 한다는, 때로는 격의 없이 친해 보이지만 수평적으로 서로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그렇게 내게 들려주셨던 것 같다. 아이들은 대체로 선생을 존중하는 편이니 그런 태도는 선생들에게 더욱 필요한 자세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수업 시연 단원으로 ‘홍길동전’과 ‘옥상의 민들레꽃’을 받았고 선배와 함께 답도 없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수업은 폭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습이 끝나던 날 담당 선생님께서 찍어주신 사진 속에 서 있는 선배와 나는 무척이나 환하게 웃고 있다.
모교로 교생 실습을 오는 예비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는 해에는 실습 시작 전날에 나의 실습 마지막 날 반 아이들이 써주었던 편지들을 꺼내본다. 그 편지 속에도 나의 기억 속에도 공개수업 장면은 거의 없다. 대신 같이 농구공을 튕기고 체육대회 때 어깨동무하고 소리를 지르고, 운동장 스탠드에서 쭈쭈바를 빨며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중 1인데도 초등학생들만큼이나 괴발개발 써놓은 글씨들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속 깊은 친구가 되어 주겠다던 내 다짐은 얼마나 깎여 나갔나 생각한다. 요즘 후배 선생님들은 선배들의 조언을 잘 새겨듣지 않는다든지, 능력은 좋은데 제멋대로라든지, 학교 공동체 대신 자기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라든지 하는 비난에 별생각 없이 쉽사리 동조하는 꼰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내 얼굴도 한 번 턱을 괴고 같이 쓸어본다. 그리고 다음날 내게 배정되어 찾아온, 긴장한 얼굴의 예비 선생님에게, 그가 만날 수많은 아이에게 나이만 좀 많은 속 깊은 친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업해야 할 단원에 자기 삶의 이야기를 좀 녹여주고, 아이들의 자기 이야기 할 시간도 만들어주라고 조언하다 보면 가끔은 사촌오빠와 동생 사이처럼도 되었다가 결국은 내가 뭔가를 가르쳐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 사람도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갖춘 훌륭한 예비 교사라는 걸 인정하게 될 때쯤 한 달간의 실습이 마무리된다.
“선생님, 이전처럼 여전히 제 하늘은 잿빛이지만, 저도 선생님처럼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맑게 갠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또 이따금 비가 쏟아져 제 어깨를 누르는 날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할게요. 그러면 제 마음 하나 정도는 젖지 않도록 우산을 펼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지를 써놓고 보니 잔뜩 칭얼거리기만 한 것 같아 민망하네요. 음, 그냥 선생님이랑 시간이 좀 엇갈려서 만나지 못한 고등학생 진숙이가 뒤늦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해 주세요.”
몇 년 전 교생 실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예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일부다. 신은 자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도 무척 바쁘다. 엄마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으니, 우리에겐 선생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우리 모두 인생에 무척 서툰 사람이지만 다행히도, 선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먼저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다가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전국에 수십만이 있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비를 맞고 있을 아이들에게 그 마음 하나 젖지 않도록 우산을 펴주는 이들이 있어 나도, 하루를 학교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책 한 권을 마치며
대학 생활을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두루 존경받던 노(老)교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 하나만은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태우고 이편 언덕에서 저편 언덕으로 갈 수 있도록 돕는 뱃사공입니다. 뱃사공이니, 건네주고 나면 미련 없이 이별해야 합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들은 쉽지 않은 관문들을 거쳐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강물을 헤엄쳐 건너가는 어른스러운 아이들도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 무척 허우적거리게 마련입니다. 부모나 친구와의 갈등, 원하지 않는 경쟁, 희망을 찾기 힘든 사회 환경 등과 같은 암초를 만난 아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강물에 잠겨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교사가 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교사 노릇을 하게 되기까지는 결국 아이들이 저를 가르쳐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업의 전문가 학교 경영의 전문가, 새롭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전문가 등 교사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저는 부표(浮標)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차가운 물 속에서 딱 저기까지만 가면, 일단 저걸 붙잡고 잠시 그 자리에서라도 떠서 숨을 고를 수 있는 부표 말입니다. 거친 시대의 물살을 거슬러 저편 언덕에다가 승객을 턱하고 안전하게 내려놓아 줄 만한 능력도 강단도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물결이 세면 센 대로, 잔잔하면 잔잔한 대로 둥둥 떠 있다가, 조난당한 사람이 저를 잡는다면 일단 살았으니 괜찮다고, 잠시만 여기 같이 떠서 숨 고르다 지나가는 배에 올라타든, 힘이 회복돼서 헤엄을 쳐 보든 다시 한번 해 보자고 속삭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게 매달려 있다가 마침내 자신의 삶을 건져내어 생(生)의 다음 단계로 무사히 넘어가는 친구를 일 년에 단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무척이나 보람 있는 삶이라고 자부하며 살 겁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웃고는 뒤돌아서서 다시 다음 조난자를 기다릴 겁니다.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지게 된 순간을 떠올립니다. 왜 누군가는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가, 아니, 와야 하는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온다는 건 대개 누군가의 돌봄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돌봄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교사이면서 학생부장인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매일 아침 저만의 체육복을 입고 아이들을 맞으려 나섭니다.
저는 계속해서 아침 등굣길에 음악을 틀어놓고, 호떡을 굽고, 어묵을 삶고, 따뜻한 코코아를 나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표정과 걸음걸이와 옷차림을 살피겠습니다. 언젠가 정미소 출판사의 김민섭 씨에게 말했던 것처럼, 교문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말을 건네려 합니다. 성장과 삶이라는 강물에 떠 있게 지쳐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같이 떠 있어 줄 부표가 여기 하나 있으니 날 좀 보라고, 여기 와서 같이 잠깐 숨을 좀 고르자고.
그리고 다시 살아가 보자고 말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정 마음> 이상으로 7개월간 이원재 선생님의 <체육복을 읽는 아침> 연재를 마칩니다. 전부는 아니고 2/3정도 옮겼습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친구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유정 생각>
내 삶의 전부이다시피 한 34년의 긴 교직 기간이 나에게도 참으로 귀하고 아까운 시간이었습니다만 후회가 참 많습니다. 그렇게 귀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래도 많이 모자라고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많은 관심과 보살핌으로 더 따뜻하게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더욱 죄스럽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많습니다.
첫 담임, 1971년 3월 하순 계성제지공업주식회사 다니다가 학교에 자리가 났다고 가겠느냐고 했을 때 엄청나게 가고 싶어 퇴직을 하겠다고 하니 단 며칠이라도 더 다니며 인수인계를 해 달라고 하여 오후 3시 정도까지 회사에서 근무하고 야간 학교로 출근을 하였습니다. 첫 담임이지만 이미 먼저 담임이 다른 곳으로 떠나 내가 대신 담임까지 맡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새로 맞은 담임한테 정을 주기보다는 먼저 담임을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선뜻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마음을 다독이기 시작했고 이왕 떠난 담임보다는 새 담임에게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학생에게 서로 마음을 열고 노력하자는 제 말에 서먹했던 사이가 차츰 가까워지기 시작했지요. 아무튼 그렇게 시작하였지만, 나에게는 첫 학생들이라 지금도 그 아이들 아니 예순일곱이나 여덟의 제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다른 아이들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 편애한다고 하니 나도 참 속상했지만,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더 공평하게 해 주려고 마음을 바꿔 노력하니 아이들이 좋게 생각하고 우호적으로 바뀌어 더 가까워지게 되더군요. 그리고 벌써 55년이 흘렀지만 이름을 아직도 몇 명은 기억납니다. 사람이란 첫정이 무섭다지요. 첫해 또 다음 해 만나 같이 동고동락할 때의 제자들이 무척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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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생은 언제나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가 가장 자연 스럽지요.
34년 대단히 긴시간, 한평생을 몸 바쳐 지낸 좋은 시간 ,
수고하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정민 선생님을 기역하는 제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진 회장님, 고맙습니다!
학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보니 그때가 좋았습니다.
퇴직후 벌써 19년이 지났군요. 그렇게 옛날 생각하며 삽니다.
다음 주부터 새 책 새 글로 시작하겠습니다. 계속 글 올리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