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주의는 어떠한 이념들의 토대 위에 있는가?
- ‘정치적 종교’로서의 민족주의
당연히 서양의 민족주의 선도국가들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호소했다. 그 전통이 과거 수천 년간 국민성을 특징지었고, 사고의 지평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격변기는 안정과 정당성을 약속하고, 동시에 격변의 의미대로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는 신화의 시대였다. 때문에 과거 민족주의의 주창자들은 신화들이 포함된 기독교의 유산, 그것의 근대적 변이형인 신교,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 말할 나위없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구약성서에 초점을 맞춘 칼뱅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민족주의의 확장을 위해 관련 단체들이 형성된 것처럼, 민족주의는 그 관련 종교, 즉 유대교 및 기독교의 핵심적 전통에 토대를 두었다.
민족주의는 곳곳에서 구약성서의 다음 네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였다. 첫째 ‘선민’의식을 받아들였다. - 모든 민족은 구원의 약속을 확신한다. 여기에 ‘약속의 땅’ 내지는 ‘성지’라는 개념이 신의 뜻에 따라 돌아가야 할 섭리적인 본향으로 덧붙여졌다. 물론 이 두 핵심 사상은 위험한 모든 적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는 위협적인 결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적이라는 존재가 거룩한 영토 안의 구속사적 특권 민족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 떄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골리앗의 블레셋 사람들을 원수로 삼았던 것처럼, 변화 가능한 적대적 관계를 과장할 뿐만 아니라 폭력 사용 역시 정당화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는 민족주의와는 분리하기 어려운 민족주의의 한 요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원수를 구분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민족주의는 역사적 사명을 주장하는 메시아주의의 전통과 연결되었다. 이 역사적 사명은 세속화된 예정론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민족을 미래의 민족국가라는 거룩한 땅위의 예정된 목적지로 이끄는 미래의 메시아나 성지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냈다. 그와는 달리 신약성서로부터는 형제애 사상이 덧붙여졌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본을 받아 민족을 성찬과 혼인을 통해 하나가 되는 공동체로 이해하게끔 하였는데, 결국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기독교 교회 내지 중세-근대 도시 시민들의 길드와 유사했다. 극도로 긍정적인 법칙을 내세우는 자연법과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권을 미화시키는 계몽을 통해서 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더욱 더 공고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고안된 질서였기에, 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으로의 소급은 민족주의의 사상체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민족적 신학사상은 모든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로 침투해 들어갔고, 이러한 민족주의적 성스러운 공동체는 특권적인 통치공동체와 문화공동체로 여겨졌다.
‘예정’, ‘세계정신’, ‘역사’와 각 민족 간의 계약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옛 이스라엘의 배타적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계약은 엄격한 구별짓기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혹은 그리스 사람이 바르바로이와 스스로를 구별했던 것처럼, 이제 민족의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과 스스로를 차별화시켰다. 이것은 내적 동질성을 더욱 더 강화시켰고, 새로운 ‘선민’에게 그들의 원수들과의 상징적인 경계를 명확히 그어주었다. 이러한 특별한 대우 때문에 한 민족의 가치와 관심이 절대적인 우선권을 향유했다.
모세의 언약에서 나오는 ‘약속의 땅’, ‘고국’, 조국, 성스러운 어머니의 땅으로 변화했다. 민족주의는 원래부터 존재했음직한 민족의 영토를 운명적으로 주어진 성스러운 거처라며 계속 떠받들었다.
민족주의가 종말론이 내포되어 있는 유대-기독교의 전통에 하나의 사상적 토대를 두었다는 것은 민족주의 또한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리라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또한 유구한 유대교 전통과 메시아 주의는 자기 민족에게 세계 속의 우위를 점하게 되리라는 세속화된 형태의 민족적 소명을 살찌웠다. 서양 민족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헤겔의 학설로 이러한 사상이 다시 한 번 효과적으로 성문화되었다. 예를 들면 영국에겐 ‘새로운 로마’로서 온 세상을 문명화시킬 과업이 주어졌다. 미국은 공화국의 전형으로서 전 세계에 모범이 되어야 했다. 프랑스 역시 ‘위대한 민족’으로서 모범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리고 세계는 독일의 힘을 입어 치유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정치적 종교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종교 개념으로 민족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이에 반해 옳고 그름을 나누는 분별력을 가진 이데올로기 개념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종교와 같은 거대한 문화체계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실제로 민족주의가 가진 영향력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