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본다. 적절한 용도의 붓 크기를 바꾸어 가며 팔레트에서 캔버스로 오가던 손길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림은 절절했던 생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캔버스에 씌워진 촘촘한 작은 망사에 나이프로 물감을 채워가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아내가 느껴진다. 작품을 바라보던 예리했던 눈길도 생생하다.
화가의 아내가 넋을 놓고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는 이유가 있다. 며칠 전, 실감 나는 영화를 본 탓이다. 그녀가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모드 루이스’라는 유명한 캐나다 화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에단 호크’와 ‘샐리 호킨스’가 주연한 ‘내 사랑’ 영화를 본 지도 한참이 지났건만, ‘모드’의 삶에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이입된 감정에서 좀처럼 풀려나지를 못하고 있다. 액자와 마주한 눈길을 차마 돌리지 못한다.
미술 작품을 본적도, 미술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불치병인 루게릭병에 걸려 심각한 관절염을 앓았다. 어릴 때부터 장애인으로 남들과 다른 시절을 보냈다. 몸이 왜소한 절름발이 캐나다 여류 화가 ‘모드 루이스’다. 창문 너머로만 바라본 세상을 관찰하여 광활한 풍경과 그녀의 상상력이 작품 활동에 영감을 준 요소들이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회적인 편견, 가족들의, 멸시의 아픔이 있다. 모드는 최악의 경험을 맛본 드라마틱한, 삶의 표본이다. 영화 속에서 본 그림들은 아기자기한 색감에 순수함이 느껴진다. 장애가 있지만, 손재주 하나만은 특출하다.
액자 속에서 머물고, 있는 화가의 부모 형제도 그의 재능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면 밥 빌어먹기, 십상이라 야단만 쳤다. 칠 남매의 막내라면 부모 형제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련만 언제나 데려온 자식처럼 소외되었다. 그림 그리기에 주어진 환경은 불리했지만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에 끈기와 노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갔다. 늘 부족하기만 했던 미술 재료 때문에 캔버스에 넉넉한 물감을 덧칠하지는 못해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녔고, 정지된 사물에는 생명을 불어넣어 예술 작품으로 환생시켰다. 본래부터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지만, 하찮은 것과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소외된 것들을 소재로 선택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름답지 않은 것에서 내면의 본질을 추구해서 그려냈다. 하루도 빠짐없이 캔버스와 마주하고 앉은 그의 손에는 늘 붓과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화가의 아내는 남편을 위한 내조에 최선을 다했다. 남편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아내다. 긴 세월에 힘든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제쯤 화가의 작품이 인정받게 될지 정해진 바는 없다. 가냘픈 몸으로 애들 키우랴 살림하랴 경제적인 문제까지 도맡았다. 행여 물감이라도 떨어지면 저녁 장은 포기하고 물감을 사게 했다. 그림 재료를 가득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파했다. 화가의 고정된 수입은 없다. 무명작가의 경제적 무능을 탓하지도 원망하지 않았다. 긴 세월을 내색하지 못하는 슬픔은 언제나 안으로만 꾹꾹 다질 뿐이다. 언젠가는 분명히 인정받을 그만의 작품 세계를 그려낼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었다.
대부분, 화가들의 아내는 모델이 되기도 한다. ‘박수근’은 빨래하는 아내를 모델로 그려 명화로 남겼다. 살아서 명성을 가장 많이 누렸던 세계적인 거장 스페인 화가 ‘피카소’는 여인들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유명한 그림을 남겼다. 빛을 그린 화가 ‘모네’는 아내 ‘카유미’를 작품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담았다. 아내와 두 아들을 그렸던 천재 화가 ‘이중섭도 아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외로움이 병이 되어 단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가도 아내를 모델로 몇 작품을 그렸다. 그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내색하지 못하는 사랑을 온통 붓질로 마음을 표현한 초상화다. 60호 크기로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다.
화가 모드 루이스와 생선 장수 에버렛은 서로에게 물들어갔다. 그들의 사랑을 풍경처럼 화폭으로 옮겨 담았다. 불편한 몸은 그녀에게 전혀 콤플렉스가 되지 않았다. 순수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이 느껴진다. 모드의 그림들은 색감이 생생하다. 작품은 동화(童畫)처럼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두 사람에게는 장애도 가난도 결코 불행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영화를 본 화가의 아내가 실감한 삶의 의미다.
남다른 고생을 감내하는 아내가 마음 아프지만 그림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내는 하늘이 내려준 생에 최고의 행운이라 여겼다. 화가와 아내도 가난한 예술가의 생활 속에 익숙해져 갔다.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이 감동하는 그런 작품을 그려낼 거라는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화가는 혼자만의 세계를 그려냈다.
화가의 아내는 거실 벽에 온통 그림으로 채웠다.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행복하다던 삶과 애환들이 이제는 모두 액자 속에 녹아 있다. 정말 재능 있는 화가였다. 일찍 떠나지 않고 쭉 그림을 그렸다면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을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하는 화가의 아내다.
그림을 바라본다. 액자 속 화가만의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다. 화가의 삶이 오래도록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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