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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인 인물로서의 콜럼버스 신화
콜럼버스가 탁월한 항해자라는 사실은 그 당대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구할 수 있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오랜 항해 경험에 바탕을 두어 면밀하게 항해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집요하게 실천했다.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콜럼버스를 상식을 넘어선 매우 창조적인 인물로, 또 비전과 영감을 지닌 철학적인 풍모의 인물로까지 그려 왔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일화가 그 한 예이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는 세우지 못한 달걀을 그가 한쪽 모서리를 깨뜨려서 테이블(탁자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구구체설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는데, 그만이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 횡단에 나섰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신념의 인간이자 그야말로 위대한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날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다(지나지 않는다 – 옮긴이). 1828년에 ‘워싱턴 어빙(1783 ~ 1859)’이라는 사람이 쓴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 』라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빙은 이 책에서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기 이전인 1486년에, 스페인 ‘살라망카 대학’에서 콜럼버스와 학자들, 성직자들 사이에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이들이 모두 고대의 책들을 인용하며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한 데 비해,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후 100년 이상 역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계속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픽션이다. 당시에 교육받은 유럽인들은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스페인(사실은 ‘바스크’로 불리는 ‘에우스카디아’ - 옮긴이) 어부들은 이미 대서양 한복판까지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었다. 그러니 배가 먼 바다로 나아가면 절벽에서 떨어져 우주 깊은 곳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또 살라망카 회합에서 실제로 논의된 것은 대서양의 넓이에 관한 것이다. 이때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항주(杭州)’까지의 거리를 약 5,600킬로미터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인 ‘토스카넬리(1397 ~ 1482)의 8,000킬로미터보다 훨씬 짧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40년대에 자세히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신화를 믿고 있는 것은 콜럼버스의 창조성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이 허구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 유럽의 배나 항해 기술이 특별히 우월했나
15세기 말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까닭은 – 옮긴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서양 역사가들은 유럽 문화와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들고 있다. 이 시기에 항해술, 천문관측술, 조선술, 제도술(製圖術. 기계/건축물/공작물의 도면이나 도안을 그리는 기술 – 옮긴이) 등의 여러 기술이 발전했고 나침반, 태양의 고도를 재서 위도를 알게 해 주는 사분의(四分儀) 등의(같은 – 옮긴이) 항해 기구들이 사용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의 일부는 맞는 말이다. 15세기에 와서 유럽의 조선술이나 제도술, 항해술 같은 것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침반이나 사분의, 또 화포의 사용도 일반화되었다. 그런 것들이 발전하지 못했다면 장거리의 대양 항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도 많다. 우선 15세기 후반 유럽의 조선술이 전보다 많이 나아져 ‘캐러벨’이라는 원양 항해가 가능한 배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유럽의 배는 아직 규모도 작고 설비도 시원치 않았다. 15세기 말의 상황에서 유럽의 선박 건조술이나 항해술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견주어 – 옮긴이)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다.
사실 조선술이나 항해 기구, 항해술의 많은 부분은 비유럽 지역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캐러벨선의 앞뒤에 설치하여 배의 방향을 쉽게 바꾸게 하는 삼각돛은 이슬람 배를 모방한 것이며, 나침반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또 선박의 규모도 매우 작다. 콜럼버스가 기함(함대의 군함들 가운데 사령관이 탄 군함 – 옮긴이)으로 사용한 ‘산타 마리아’ 호는 배수량이 기껏 80톤 정도의 작은 배로 선원 30 ~ 40명 정도만을 태울 수 있었다. 다른 배들은 더 작아서 세 척의 배에 모두 104명의 선원이 탑승했을(탔을 – 옮긴이) 뿐이다.
물론 나중에 더 커지기는 하나, 그래도 당시 중국(명나라 – 옮긴이)의 배와는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중국의 명나라 초기인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환관인 ‘정화(1371 ~ 1435?)’가 이끄는 대함대가 일곱 차례나 인도양으로 항해를 했다. 수백 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가장 멀리는 아프리카의 케냐 해안(바닷가 – 옮긴이)까지 도달했는데(다다랐는데 – 옮긴이), 그 가운데 정화가 탄 기함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약 120미터이고 폭이 약 50미터에 달했다. 이는 돗대가 아홉 개에 배수량이 약 3,000톤으로 추산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다. 유럽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크기였다.
또 장거리 항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 함대의 대원정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항로는 바스코 다 가마 이전에도 이슬람 상인들이 잘 알고 있는 길이었다. (단지 – 옮긴이) 방향만 다를 뿐이었다.
또 헤로도토스의 『 역사 』에는 고대 이집트(케메트. 중세 이후의 이름은 ‘미스르’ - 옮긴이)에서 파라오의 명을 받은 일단의 페니키아인들이 아라비아 만에서 출발하여 리비아(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서 3년째 되는 해에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인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 이집트로 귀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미 수천 년 전(정확히는 2600여년 전 – 옮긴이)에 고대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일주한 것이다. 그러니 15세기 말 유럽인들의 항해를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나 문화 능력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 유럽인은 어떻게 아메리카에 도달했나
그러면 아시아 국가(나라 – 옮긴이)들, 특히 태평양에 면해 있는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데 왜 아메리카에 갈 수 없었을까? 그것은 중국의 해양 정책이나 지리적인 이유와(까닭과 – 옮긴이)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인 1421년에 도읍을 양자강(장강 – 옮긴이) 하구에 있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수도는 북쪽에 있었을 뿐 아니라, 수도를 북으로 옮겨, 그때까지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던 몽골족(할하 몽골인과 오이라트족 – 옮긴이)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해금(海禁. 바다[海]를 금지함[禁] → 자기 나라 바닷가에 다른 나라 배가 들어오거나, 그곳에서 고기잡이 하는 것을 못하게 막음 : 옮긴이) 정책을 취했다. 함부로 바다로 나가는 것을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나라가 넓어 중앙집권을 중시한 중앙정부가 아마로 해안 지역에 강력한 상업 중심지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후 중국은 해외 무역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1415년에는 남경에서 북경을 잇는 대운하가 다시 개통되었다. 위험한 해로 대신 남북 간을 잇는 보다 안전한 수로(물길 – 옮긴이)가 확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로의 효용성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태평양은 너무나 큰 바다로서 쉽게 건널 수가 없었다. 풍향이나 조류가 복잡하고 중간에 쉴 수 있는 곳도 남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뿐이다. 이 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그래서 태평양에는 폴리네시아 인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정착하지 못했다 – 옮긴이).[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의 바람은 비교적 일정하고 안정적이었던 데 비해, 태평양의 바람과 조류는 매우 복잡하여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는 것은 대서양에 비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 지은이의 보충설명]
반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로 나아가는 데 매우 유리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인도 제도까지의 거리는 중국에서 멕시코(메히꼬 – 옮긴이)의 ‘아카풀코’까지 거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지나지 않는다 – 옮긴이). 또 대서양의 바람은 풍향이 비교적 일정하고 안정적이다.
적도와 그 부근의 저위도 지역에는 무역풍이라는 동풍이 불고, 고위도에서는 편서풍이라는 바람이 연중 서쪽에서 불어온다. 이는 대서양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람이었다. 따라서 항해자들은 스페인(바스크/에우스카디아 – 옮긴이)에서 카나리아나 아조레스 군도 부근까지 내려간 다음에 무역풍을 타고 서인도까지 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바람의 흐름을 더 멀리까지 확대하고 중간에 아메리카(거북섬 – 옮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시아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아니다. 콜럼버스가 이용한 것도 바로 이 바람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먼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발견’(사실은 도착 – 옮긴이)은 이런 우연적인 요소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 아메리카는 왜 고작 수백 명씩인 스페인 군대에게 정복되었나
당시의 아메리카에는 멕시코 지역에 아스텍(올바른 이름이자 정식 국호는 ‘메히까’ - 옮긴이)제국이 있었고, (그 밑에는 마야 제국[諸國]이 있었으며 – 옮긴이) 남미의 페루 지역에는 잉카(올바른 이름은 ‘타완틴수요’ - 옮긴이)제국이 있었다. 모두 상당히 많은 인구에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대국가들이었다(그러나 메히까 제국과 마야 제국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문화를 지녔고, 타완틴수요 제국에는 글자가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 옮긴이). 그 외에 중남미나 북미 지역에도 수많은 원주민 정치체들(예를 들면, 서양에는 ‘이로쿼이 연맹’으로 알려진 북미 지역의 호데노쇼니 연맹 – 옮긴이)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이 대제국들은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멸망했다(단, 마야 제국은 17세기 말까지 악착같이 저항하여, 메히까 제국이나 타완틴수요 제국과는 달리 그 저력을 과시했다 – 옮긴이). 1521년에 ‘코르테스’가 이끄는 고작 500명 정도의 군대가 아스텍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로부터 11년 후(뒤 – 옮긴이)인 1532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1471/1476 ~ 1541)’가 이끄는 180명의 군대가 역시 잉카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러면 인구가 수천만인 아메리카의 대제국들이 왜 고작 수백 명씩인 스페인 군에 의해 그렇게 쉽게 정복될 수 있었는가? 유럽의 무기가 발달했기 때문일까?
당시 스페인 군은 말이나 대포, 총을 갖고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화포는 별로 유용하지(쓸만하지 – 옮긴이) 못했다. 습한 열대 지역이라 화약이 눅눅해져 사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보다 유용했던 것은 칼이나 창 같은 철제 무기였다. 원주민들은 흑요석 날을 박은 나무칼이나 곤봉, 끝에 구리 날을 박은 도끼 등을 무기로 사용했으므로(썼으므로 – 옮긴이), 스페인인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스페인인(에스파냐인/카스티야인 – 옮긴이)들이 승리한(이긴 – 옮긴이)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 옮긴이) 함께 갖고 들어온 천연두, 홍역, 티푸스 등(같은 – 옮긴이) 유럽의 병원균에 있다. 이에 대해 아무 면역력도 갖고 있지 않은 원주민들은 무력이 아니라 병균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코르테스의 군대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며 전염병이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는 군대가 진군하는 속도보다 빨랐으므로, 스페인 군대는 병을 뒤따라 진격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극심한 혼란 속에 빠진 멕시카(아스텍) 제국은 공격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스페인 군이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오늘날의 멕시코시티 – 옮긴이)의 성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가며 진군해야 할 정도였다.
또 스페인 군이 들어가자 다른 원주민 종족들의 반란군이 이에 가세했다. 이 원주민 종족들과의 동맹은 수도를 포위할(에워쌀 – 옮긴이) 때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20만 명의 대병력은 당시 유럽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숫자였다. 이런 동맹 세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코르테스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스텍제국이 이웃 종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서 반감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공격하러 갔을 때는 잉카제국도 이미 전염병으로 거덜이 난 뒤였다. 당시 인구 3,500만 가운데 아마 3분의 2(그러니까, 대략 2332만 명 – 옮긴이)가 이미 죽은 것 같다. 그러니 사회/정치체제가 거의 붕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왕(사실은 황제. 현지어로는 ‘잉카’ – 옮긴이)까지 병으로 죽자, 후계 다툼이 일어났고, 따라서 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남미의 토착 문명은 1550년경에 모두 붕괴하고 만다(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마야 제국만큼은 17세기 말까지 에스파냐에 맞서 싸웠다 – 옮긴이).
1492년의 아메리카 인구는 적게는 5,000만 명에서 많게는 2억 명 정도까지도 본다. 그러나 1억 정도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와 거의 맞먹는 것이다. 그 가운데 4분의 3(그러니까, 7500만 명 – 옮긴이)이 16세기 한 세기 동안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또 17세기 중반이면 90퍼센트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들어간 것이 아메리카인에게 얼마나 큰 참화를 가져다준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