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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A]
각 장에 대한 진실의 수준
제1부
1장 ..................... 780 2장 ..................... 830
3장 ..................... 750 4장 ..................... 770
5장 ..................... 740 6장 ..................... 710
7장 ..................... 740 8장 ..................... 820
제2부
1장 ..................... 800 2장 ..................... 780
3장 ..................... 770 4장 ..................... 800
5장 ..................... 870 6장 ..................... 870
7장 ..................... 730 8장 ..................... 760
9장 ..................... 770 10장 ..................... 770
제3부
1장 ..................... 830 2장 ..................... 890
3장 ..................... 870 4장 ..................... 860
5장 ..................... 880 6장 ..................... 860
[부록B]
운동역학 시험 방법
과학적인 증거는 반복이 가능해야 한다. 일관된 결과가 누구에게서나 나타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책에 기술된
운동역학 시험 방법을 아래에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존 다이아몬드 박사가 '행동 운동역학'에 기술한 방법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1단계
두 사람이 우선 필요하다. 피험자가 적절한 사람인지 알기 위하여 시험자는 피험자가 수평으로 내민 팔의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저항하라'고 말한다.
즉 누르는 힘에 저항하도록 한다. 정상인은 저항에 의해 팔이 바닥과 수평으로 유지된다.
가끔 누르는 힘에 팔을 지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약한 에너지와의 접촉이나 좋지 않는 건강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시험의 좋은 대상자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가슴을 '하나 둘 셋'의 박자로 쳐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하며 웃어 보라고 하면 회복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강한 반응'을 보이며 정상적인 시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처방'은 네 시간 정도 효과가 지속될 뿐이어서 '흉선치기'를 다시 반복해야 한다.
2단계
시험 도중에 개인의 감정이 주입되어서는 안 된다. 웃거나 사사로운 담화는 피해야 한다.
주위에 잡음이나 음악이 들려서도 안 되고, 아이들이나 애완동물의 방해가 있어서도 안 된다.
피험자는 안경이나 시계, 목걸이 등도 모두 풀어놓아야 한다.
시험자의 향수나 면도후의 로션 같은 자극이 시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신집중을 위해 피험자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는 것이 좋다.
3단계
피험자가 계속 약한 반응을 보이면 시험자의 목소리를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
피험자들을 계속해서 약하게 만드는 목소리는 시험자로서 마땅치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4단계
피험자의 후보자와 모의시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피험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고 한 후 옆으로 뻗은
팔의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눌러 본다. 정상인은 강하게 반응하여 팔이 내려가지 않는다.
다음에 그가 미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노여워하는 사람, 혹은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을 생각하라고 한다.
정상인은 약한 반응을 보이며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시험의 일관성을 알기 위해 상반되는 자극들을 시험해 본 후 시험자와 피험자의 신뢰감을 쌓도록 한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개념이나 시청각의 예는 다음과 같다.
약한 반응 ............................................ 강한 반응
미움 ................................................. 사랑
나치의 깃발 .......................................... 성조기
스탈린 ............................................... 마하트마 간디
랩 음악 .............................................. 고전 음악
(더 자세한 목록은 제1부 7장 참조)
5단계
피험자가 정상적인 진술에 신뢰할 만한 반응을 보이면 시험자는 선언적인 진술 형식으로 시험을 진행시켜야 한다.
미래의 사건을 묻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거기에 대한 반응은 신빙성이 전혀 없다. 정작 묻고 싶은 질문 전에
'내가 --------에 대한 질문을 해도 괜찮다'(예/아니오?)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옳은 질문방식이다'(예/아니오?)는 식으로 질문 자체도 검사할 수 있다.
'피고는 그 도둑질을 했다'(예/아니오?)는 식의 진술은 시험자나 피험자 누가 해도 좋다. 질문이 언급될 때마다,
시험자는 피험자에게 피험자의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누를 때마다 저항하라고 미리 말해 둔다.
우리는 여러 계층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예를 들어 20 혹은 30에서부터 1,000에 이르는 사람들을 두 그룹
으로 나누었고, 시험자와 피험자의 역할을 교대로 바꾸어 가며 하게 했다.
전체 그룹에게 동시에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독립적인 연구를 위해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할 수도 있다.
100명의 그룹(50인으로 이루어진 두 팀)중에서 한두 명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흉선 치기’를 받게 하고 합류시키면 정상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 시험은 어느 곳, 어떤 사람들에게 하더라도 늘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를 상상하는 것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며, 이것은 피험자들이 히틀러를 전혀 알지 못한
다든가 그를 국가적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6단계
물건에 대한 시험은, 시험 대상의 물건을 피험자의 명치(태양 신경총) 옆에 갖다 댐으로써도 가능하다.
인공감미료, 살충제, 혹은 봉투에 감추어진 히틀러의 사진 등은 피험자를 약화시킨다. 영양가 있는 음식이나
몸에 좋은 영양제, 혹은 숨겨진 링컨 사진 등은 근육을 강화시킨다.
7단계
시험 결과는 피험자가 대상이 되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나 거기에 대한 견해, 믿음, 혹은 그 어떠한 태도를 갖고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넬슨 만델라를 상상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강화시킨다. 그를 역겨워하는
인종 차별주의자들도 강한 반응을 보인다. 바흐의 음악은 피험자가 좋아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지만, 헤비메탈은 피험자가 그것을 좋아한다 해도 약한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결과의 확실성은 지난 20년간 수천 명의 임상가들이 그들의 연구와 임상을 통해 보장하는 바이다.
사실 종래의 의학 검사보다 더욱 뚜렷한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든다면, 심장이 약한 사람들도
심전도에서는 가끔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운동역학 시험에서는 예외 없이 약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용어 풀이(1)
과학적인 (Scientific)
자연에 대한 조사로 물질의 영역에서 예측할 수 있는 현상의 법칙이 유도되도록 설정된 방법.
현대의 과학이론은 16세기 데카르트의 연역법에서 시작되었고 베이컨의 귀납법이 그 뒤를 이었다.
그 후 뉴턴은 <프린키피아(Principia)>를 세상에 내놓았다.
로크(John Locke)는 '과학적'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물체의 상호작용의 확실성은 물체를 관찰한
자료에 근거한다고 했다.
이 개념들은 기계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우주의 모형을 만들었지만,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결정론보다는 우연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양자이론에 의해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과학이 기존 이론들의 직선적인 연장으로 발전하지 않고 그 관점의 변화에 의해 도약한 것을
보여준다.
결국 과학이란 관점의 반영이고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사이에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성 원리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물질이 에너지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봄(Bohm)의 홀로그래피 모형은 보이는 질서는 숨은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형태는 개념의 결과이고 시간과 공간은 구속력이 아니며 거기에는 '여기' 혹은 '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의 전체성).
결국 우리가 묘사하는 우주는 무한의 차원을 포함하고 고차원의 실재를 갖는다.
동승 (Entrainment)
행동이나 상황들이 동시성이 되어 주는 현상. 시계의 추들이 서로 가까이 놓일 때 추들은 결국 동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들이 같이 생활할 때 점차 생리가 동시에 나오게 되는 것. 이것은 소리굽쇠가 옆의 소리굽쇠와
진동수가 같아지기 시작하는 현상과 같다. 이 때문에 다리를 건넌 후 행군의 보조가 깨어진다.
맥락 (Context)
하나의 관점에 의해 보이는 모든 것들. 맥락은 사건이나 진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모두 포함한다.
자료는 맥락이 정의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맥락을 무시한다'는 말은 의미를 줄 수 있는 여건을 무시하고 중요한 사건을 왜곡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재판에서 흔히 나타난다. 변호사는 증인이 진술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증인의 진술을 왜곡하며
'예/아니오'의 대답만을 요구한다.
모순어법 (Oxymoronic)
간단하고 모순된 어휘로 복잡하고 불분명한 것의 표현을 시도하는 어법으로 모순의 해결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대조와 병렬이 흔히 사용되며, '추운 불', 혹은 '현명한 바보' 등을 들 수 있다. 모순어법은 역설의 본질을 보여주며,
역설은 다른 관점과 이해의 개념에서 생기는 여러 추상적인 수준의 대조에서 발생한다.
반복 (Iteration)
비선형적인 반복은 많은 체계에 존재한다. 계속적인 반복은 아주 작은 변화로 결국 원래의 상태와 달라지는
원인이 된다. 팽창의 공식에서 지나간 반복의 출력은 다음 반복의 입력이 된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열여섯 번째의 소수점을 산출해 낼 때, 열일곱 번째의 소수점은 사사오입하게 된다.
이러한 극소수의 오차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확대되어, 원자료를 크게 왜곡시킬 수 있고 예측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반복되는 생각의 작은 변화는 큰 변화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비선형 (Nonlinear)
시간이 경과하는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이 불규칙한 '잡음의' 주기가 없는, 우연의, 일정하지 않은 추측통계학의
수학적 실례는 dx(t)dt=F(xt)+w(t)이며 여기서 w(t)는 추측통계의 과정에서 잡음의 표시이다.
비선형이란 수학적 풀이를 묘사하고 비선형 체계의 결과에 대한 시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계학적 분석도 포함
한다.
비선형은 국소적이 아니고 혼돈을 뜻하며, 수학이나 확률적인 이론과 일치하지 않고 미적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혼돈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주제이고, 수학에 뉴턴의 이론이 아닌 새로운 개념을 불러일으켰다.
비이원론 (non-duality)
역사적으로 600 이상의 의식수준을 성취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은 현재의 첨단과학이론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흡사한 바가 많다. 고정되고 제한된 우리의 감각이 초월될 때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들은 보이지 않고 가려진 암시의 우주와, 가시적이고 형태로 관찰되는 우주로 동시에 존재한다.
현실에서 이러한 형태들은 본래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의 내용을 단지 경험할 뿐이다. 비이원론의 수준에서 관찰은 존재하지만 관찰자는 존재
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모든 것을 신성으로 경험하는 하나가 되고 만다. 700의 수준에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
존재하는 상태, 즉 모든 것은 의식이고 생명, 무한함, 신, 그리고 부분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다.
신체는 큰 자아(One Self)의 표현일 뿐이고, 육체적인 이 차원에서는 잠시 그 본질을 잊고 3차원의 세계의 착각을
허용할 뿐이다.
육체는 정보교환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자신의 육체를 '나'라고 보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숙명이며,
결국 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다. 죽음이란 '나'라는 육체의 잘못된 생각에 의한
착각이다.
비이원론의 상태에서 의식은 그 자체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경험하지만 경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을 갖는 현실이란 인식작용일 뿐이다.
착각의 세상에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눈을 뜰 때 사물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눈을 감을 때 그들이 사라진다고 믿는
바보와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신경망 (Neural Network)
신경조직 내에서 보이는 신경세포간의 교차 현상
신경전달 물질 (Neurotransmitters)
호르몬과 같이 신경조직에서 신경세포간의 전달을 관장하는 뇌의 화학물질. 미세한 화학물질의 변화로 감정,
사고 혹은 행동에서 굉장한 주관적, 객관적 차이를 초래할 수 있다. 이 분야는 정신과의 중요한 연구분야이다.
에너지 장 (Energy Field)
끌개 장의 공간에 의해 정해지는 에너지의 범위. 더 큰 에너지 장인 의식세계 속에서 작용하여 인간 행동의
특성들을 통해 관찰된다. 에너지 장의 강도는 전류, 자장, 혹은 끌개 장의 전압처럼 측정된다.
M-장 (M-Fields)
형태생성의 장(場). 견인력 패턴과 비유될 수 있다. 루퍼트 셀드레이크는 다음과 같이 가정했다.
형태생성의 장은 형태의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론의 일부로, 형태는 형태의 에너지 장에 의해 생기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우뇌 (Right-brain)
일반적으로 전체적이고 평가, 직감, 그리고 중요성의 이해, 의미, 추리 등을 가능하게 하는 뇌. 비선형,
즉 뉴턴의 인과관계에 의한 논리적인 연쇄반응보다는 패턴과 상호관련성을 통해 작용한다.
우뇌는 부분보다는 전체를 다룬다. 아날로그 컴퓨터같이 과정을 다루고, 시간의 개념 없이 작동할 수 있다.
또 복잡한 자료 속에서 본질을 캐낸다. 이 자료들은 겉으로 볼 때 이해되는 분석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창조성이나 '사랑하게' 되는 현상 등이다. 즉 왼쪽 뇌, 오른쪽 뇌의 어휘는 뇌의 일정한 부분에 의해
나타나는 인식 현상에서 유래되지만, 프리밤(Karl Pribam)이 증명하듯이 뇌는 해부학적인 정확한 위치보다는
홀로그래피로 작용한다.
우주 (Universe)
우주에는 무한한 차원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3차원의 세계는 많은 차원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우리의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착각일 뿐이다. 혹성 사이의 공간은 텅 빈 것이 아니고 에너지의 바다이다.
1평방인치의 에너지 잠재력은 물리적인 우주의 모든 물체의 힘과 같다.
데이비드 봄은 들이포갠/펼치는 존재의 상태에 대한 모형을 제안했다.
이 상태는 깨달음을 얻고 비이원적인 것을 경험한 선각자들이 말하는 나타난/숨겨진 실재의 상태와 비교되는
실재의 보이는/안 보이는 질서를 말해
용어 풀이(2)
인과에 대한 모형 :
A->B->C는 열린, 보이는, 나타나는, 분별할 수 있는 형태의 우주이다. ABC는 가려져 있고, 함축성 있고,
나타나지 않는 잠재력으로 형태 없는, 유형과 무형의 얽히고 설킨 무한의 짜임이다.
이것은 전능, 전지, 전재를 말한다.
위상공간 (Phase Space)
시간-공간 자료를 여러 차원의 형상으로 압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표. 포인케어 도표는 저변에 존재하는
끌개가 보이도록 다차원의 형상을 자른 단면을 그래프로 나타낸다.
이상한 끌개 (Strange Attractor)
1971년 루엘(Ruelle)과 타켄(Taken)이 처음 사용한 용어. 우주의 비선형 패턴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것은
독립적인 세 가지 동기뿐이라는 이론을 펼치는 데에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상한 끌개는 위상공간 내의 패턴이다. 이것은 동역학의 체계 속에서 동역학의 점으로 추적된다.
끌개 장의 중심점은 궤도의 중심점으로 비유될 수 있다.
끌개는 프랙털이며 길이는 무한하다. 끌개 그래프는 포인케어 도표를 옆으로 자름으로써 나타난다.
위상공간의 지형학적인 모양은 접어놓은 도넛이나 꽃받침 같다.
이원론 (Duality)
물체들이 분리되어 보이는 형상의 세계로 우리들은 '이것/저것', '여기/저기', '그때/지금'. '너/나'의 양분적인
개념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한정된 감각을 갖는 것은 고정관념의 제한성 때문이다.
과학은 이제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인위적인 분리를 논하는 17세기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초월하여,
이것들이 하나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주는 중앙이 없고 모든 점에서 똑 같이, 그리고 동시에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별의 원리는, 우주가 뉴턴의 생각처럼 인위적인 시간과 공간의 체계 속에서 인과관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시간과 공간 그 자체는 더 높은 차원을 단지 측정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좌뇌 (Left-brain)
이성 또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직선적인 형식의 사고 자료를 A->B->C의 순서에 의해 처리하는 디지털
컴퓨터에 비유된다.
직선적인 (Linear)
뉴턴의 물리학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미적분과 재래적인 수학을 사용하여 해결이 가능하다.
창조 (Creation)
시작과 끝이 없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이 과정에 의해 눈에 보이는 우주가 형성된다.
우주는 세 시점에서 시작하여 반복의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 시점은 프랙털에 의해 무한한 형상을 창조한다.
즉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만델브로트 모형(Mandelbrot Set)'에서 나타난다. 산스크리트에서는 경험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세 시점을 라자즈, 타마스, 사트바로 표현한다. 이것들은 힌두의 신인 시바, 비슈누, 브라마로
상징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해당된다.
추측통계학적 (Stochastic)
우연의, 예측할 수 없는, 비직선, 불규칙한, '잡음의', 혼돈의
패러다임 (Paradigm)
전체를 보는 차원, 혹은 장(場), 개인의 현실 인식에 따라 변수가 주어진다는 한계성을 지닌다.
패러다임이란 일반적으로 개인의 한계에 따라 현실 인식 능력도 제한된다는 뜻을 지닌다.
프랙털 (Fractal)
프랙털의 현상은 불규칙적이고 무한대의 길이를 특징으로 한다. 이상한 끌개는 프랙털 곡선으로 구성된다.
좋은 예는 영국의 해변의 길이를 측정해 보는 것이다.
아주 작은 해변의 수치들을 더할 때 무한대의 길이가 되고 만다. 프랙털은 유한의 영역에 무한의 길이를 암시한다.
혼돈 이론 (Chaos Theory)
상태보다는 과정을 다루는 과학. 예측할 수 없는 사물의 상황 속에도 일정한 형상이 존재한다는 발견에서 비롯
되었다. 국소적인 현상보다는 전체적인 것을 다루고, 국소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질서를
보여주는 복잡한 상황의 기본 패턴을 관찰하기 위하여 지질학의 패턴이나 모형을 사용한다.
혼돈학은 복잡한 상태가 철저한 혼돈과 조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1800년 후반 헨리 포인케어(Henry Poincare)는 뉴턴의 물리학이 두 물체의 상관관계를 다룰 때는 수학적으로
정확하지만 세 번째의 요소가 첨가될 때 종래의 공식은 신빙성에서 멀어지는 것을 알았다.
즉 대강의 해답만이 가능했다.
이런 비선형 개념은 어떤 체제이든 시간이 지나면 반복과 귀환에 의해 예측 가능성이 어려워지는 것을 암시했다.
1963년 로렌츠의 <결정적인 비주기적 흐름(Deterministic Non-periodic Flow)>은 과학의 새로운 관점을 초래
했고 요크(James Yorke)가 유명한 논문인 '제3기는 혼돈을 암시한다'에서 혼돈 이론으로 명명했다.
혼돈 이론은 기간이 두 배로 길어지는 것, 반복, 프랙털, 두 갈래로 갈라짐 등을 포함하여 유한한 공간에 무한한
차원이 있음을 암시한다.
혼돈에 대한 첫 회의는 1977년 '뉴욕과학협회'에서 이루어졌고, 1986년에는 의학과 생물학에서 혼돈 이론에 대한
첫 회의를 가졌다.
홀로그램 (Hologram)
레이저 광선의 반은 물체를 거쳐 사진판에 투사되고 그 나머지가 사진판에 직접 투사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물체의
3차원적인 영상. 이 현상은 사진판에 간섭형상을 만들어 사진판에 투사되는 레이저 광선은 물체의 3차원의
영상을 재현시킨다. 사진판의 모든 부분이 전체의 영상을 재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홀로그램의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저자 후기(1)
내 영혼의 여정
이 책에서 기술된 진실들은 과학적으로 도출되었고 객관적으로 정리되었지만, 모든 진실이 그렇듯이, 처음에
개인적인 경험으로 시작되었다. 내 삶을 점철해 왔던 앎을 향한 열정은, 나 자신의 깨달음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방향타 구실을 해주다가, 마침내 이 책으로서 작은 열매나마 맺게 된 것 같다.
세 살 때, 나는 어느 순간 존재의 충만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이해였다.
하지만 나는 곧 이어 '나'라는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인식을 더불어 맛보아야 했다.
이것은 무지의 상태에 잠겨 있다가 존재 자체를 비로소 의식하게 된 순간적인 깨우침이라 할 수 있다.
그 순간 나라는 개인이 태어난 셈이고,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론이 내 앎의 영역에 들어왔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존재의 모순과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반복되었다.
나 자신은 가끔 더 큰 비인간의 '자신'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처음 느꼈던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
즉 무(無)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1939년, 나는 위스콘신에서 매일 25킬로미터를 돌면서 신문을 배달했다. 추운 겨울 날,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하 20도의 눈보라를 만났다. 자전거는 얼음판 위에 넘어졌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 자전거 손잡이의
바구니에 담긴 신문들을 얼음과 눈으로 덮인 들판으로 마구 흩날려 버렸다.
좌절과 피로에서 오는 눈물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내 옷은 꽁꽁 얼어붙었다.
바람을 피하려고 나는 높은 눈둔덕의 얼음장을 깨고 구덩이를 파고는 그리로 기어 들어갔다. 으스스 떨리던 몸에
따사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가 찾아왔다.
시작도 끝도 없는 찬란한 빛과 무한한 사랑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포용했다. 그 빛에 감싸여 나는 나 자신을 잊어
갔다.
나는 육체와 주변의 모든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고, 내 의식은 만물에 내재하는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내 마음은 점점 고요해졌고,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 시간과 묘사의 영역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이었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나는 누군가가 무릎을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 아버지가 수심에 잠겨 있었으니까.
마치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나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죽음이란 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것처럼 느껴질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이런 체험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그런 것을 이해시킬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들이 생애에 대해 읽거나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다른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그때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을 하고 나자 세상의 모든 현실이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쳐지기 시작
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가르침은 의미를 잃었고 역설적으로,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모든 존재를 정화시킨다고 내가 느꼈던 신성의 빛에 비하면, 전통적인 종교에서 거론되는 신성의 빛은 오히려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종교를 잃는 대신 영성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는 위험한 지뢰탐지 부대에 배치되었고, 죽음의 그림자에 가까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요원들과 달리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전쟁이 끝나자, 마음의 복잡성에 매료된 나는 정신치료학을 공부하고자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나를 지도하는 콜롬비아 대학의 정신분석학 교수도 불가지론자였다.
우리는 전통적인 종교에 만족할 수 없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공부는 잘 되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 경력도 쌓여갔다. 내 인생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직업생활은 나를 조용히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되었다. 38세에는 최악에 다달아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내 몸을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내 영혼은 극도의 절망과 번민에 휩싸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내 마음에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람?'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갔다.
나는 기도 중에 부르짖었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로 계신다면 지금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알 수 없는 그분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의식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는 경외감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나 자신이나 에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무한한 힘을
가진 무한한 존재만이 있었다.
이 존재는 과거의 '나'를 대치했고, 내 육체와 행동은 이 존재의 무한한 의지에서만 움직였다. 세상은 이 무한한
'하나'의 밝음으로 비치기 시작했고, '하나'는 만물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나타냈다.
이러한 고요함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자신의 의지를 갖지 못했다.
내 육체는 무한하고 강력하고 끝없이 부드러운 존재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통솔되었다.
이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진실은 자명했고, 어떠한 개념화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가능하지도 않았다. 동시에, 나의 육체적인 신경계는 극도로 피로해졌다.
순환에 필요한 허용량 이상의 에너지가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유용한 기능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모든 걱정과 두려움, 모든 세속적인 동기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했으므로,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명성도, 성공도, 돈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친구들은 정신을 차리고 개업을 하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그렇게 해야 할 아무런 동기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저마다의 개성이라는 것을 받쳐주는 현실에 대한 인식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개성'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바로 그것이 감정적인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개업을 했고, 크게 번창했다
저자 후기(2)
환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찾아왔다. 나는 50명의 치료사와 직원, 2천 명의 외래 환자, 25개의 사무실, 연구소,
뇌파 시험실을 갖추고 1년에 1천 명 이상의 새로운 환자를 맞기에 이르렀다.
나는 라디오에도 자주 초대되었고, <맥닐/레어 뉴스 시간>, <투데이 쇼>, <바바라 월터 쇼> 같은 TV 프로그램
에도 출현했다. 1973년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 박사와 함께 <영양요법에 의한 정신치료
(Orthomolecular Psychiatry)>를 통해 나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10년 정도 앞섰던 이 책은, 물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의 신경조직의 병변은 차츰 회복되었고, 이때쯤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유쾌한 에너지의
줄이 척추로부터 뇌에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강렬한 열락의 세계에 나를 맡기곤 했다. 삶의 모든 것들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일어났고, 모든 것이 다 기적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의 원천은 나 자신의 개성
적인 존재가 아니라 위대하신 분의 '현존'이었다. 개성적인 '나' 자신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 현상들의 한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위대한 '나',나 자신이나 내 생각보다 위대한 그 '나'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내가 경험한 상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붓다와 여러 깨달으신 분들, 후앙 포, 그리고 보다 최근의
스승들로는 라나마 마하라쉬, 니사가다타 마하라지 등의 영적인 가르침을 읽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내 경험이 나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가바드 기타가 돌연 완전한 의미를 갖고 이해되기도 했다.
스리 라마 크리슈나나 그리스탄 성인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영적인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이 광채를 띠고 있었고,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살아 있는 만물이 고요함과 찬란함 속에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내적인 사랑에 의해 고양되고 있는
데도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모르면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
들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과 저녁이면 늘상 하던 한 시간의 명상을 그만두어야 했다. 명상을 통해 오는 기쁨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눈둔덕에서의 어릴 적 경험이 자꾸 되살아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홀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오는 일이 점차
어려워졌다. 만물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완전함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추악하다고 보는 속에서도 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곤 했다.
이러한 영적인 사랑은 내 모든 지각을 가득 채웠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너와 나라는 모든 경계선이 사라
졌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내면의 침묵에 잠겨 있었고, 위대한 그분(Presence)의 힘은 커져 갔다.
나에게는 개인적인 생활이 없었다. 개인의 의지라는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무한하신 그분의 도구였고, 그분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내뿜는 오라(aura)속에서 기이한 평화를 느끼곤 했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서 해답을 얻으
려고 했지만, 데이비드라는 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들이 '진아(Self)'로부터 해답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진아라고 해서 나의 그것과 다를 리는 없었다.
누구를 보더라도 그들의 눈 속에서 나는 나의 '진아'가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육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상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러 해 동안 고통받았던 지병들이 사라졌다.
내 시력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항상 쓰던 돋보기 안경이 필요 없게 되었다.
가끔씩 나는 축복의 에너지,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가 내 가슴에서 방사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에 이런 에너지가 내 가슴속에서 방사되기 시작했다.
굽은 길을 돌아들었을 때,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 있었다. 전복된 자동차의 바퀴가 아직 돌고 있었다.
그 에너지는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파고 들어갔고, 거기에서 저절로 멈추었다.
또 한번은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에너지가 나보다 한 블록 앞서서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갱들이 싸우는 현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뒤로 넘어진 후 웃기 시작했고, 에너지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심각한 인식의 변화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곤 했다.
롱아일랜드의 로스만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는, 떨어져 보여야 할 물체와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가 강렬해짐에
따라 하나로 융합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무런 동작도 일어나지 않는 절대의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런 '사건들'도 '사물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식의 가공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분리된 '나'가 존재
한다는 착각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처럼 한정된 가짜의 자기가 진정한 근원인 우주적 진아에
융합될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귀향의 안도감과 절대적인 평화를 느끼게 되고,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구원감에 잠기게 된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나라는 에고가 존재한다는 환상에서 온다. 자신이 곧 우주이고, 완전한 존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실은 하나이며,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극도로 절망적인 환자들도 있었다.
괴상하고 비틀린 환자들이 담요에 싸여 고질화된 정신이상이나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나먼 병원에서 이송되어 왔다.
근육이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랫동안 벙어리인 채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구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정수를 선연하게 볼 수 있었다.
통상적인 눈으로는 이 사랑과 아름다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을 받게 된
것이리라.
저자 후기(3)
어느 날, 말을 못하고 몸이 굳은 환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심한 신경병변으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환자는 마룻바닥에서 경직 상태로 들어가 눈이 뒤집어졌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진 그녀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집안이 넉넉하여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다 찾아다니며 모든 방법을 다 취해 봤지만 치료 불능 환자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마음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하느님, 이 여인을 어찌하오리까?"
나는 오직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이 필요한 모든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내적인 자아가 그녀의 눈 속에 비치고
있었고, 나는 나를 그 사람의 본질과 연결시켰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진정 누구였는지 깨달았고, 치유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육체에 생겨난 일들은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은 환자에게 일어났다. 어떤 환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복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환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회복이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내면의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됨에 따라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위대한 그분의 '자비심'이 환자 개개인의 관념을 바꾸었고 그로써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초월한 상태에서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로써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내면의 평화는 시간과 사람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포용해 주었다.
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에고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러한 진실을 한자들의 마음에 조용히 말해 주곤 했다. 환자들의 내적인 폐쇄 현상을 직감하고 오랫동안
벙어리 상태로 지내는 경직된 환자에게 마음을 통해 "네 에고가 너에게 한 일을 너는 마치 하느님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하느님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고,
옆에서 보고 있는 간호사는 놀라 자빠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환자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병상이 비기를 기다렸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또 다른 병원을 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한 번에 한 환자밖에 볼 수 없는 현실과 끝없는 인간 고통의 파도에 좌절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바다에서 물을 퍼내려는 행위와도 같았다. 사람들이 흔히 겪는 침체 상태나 영적인 고민, 인간 고통의
끝없는 격랑의 원인을 다룰 수 있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운동역학을 만났을 때, 나는 즉시 그 잠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라는 두 우주 사이의 '벌레 구멍'이었고, 두 차원 사이의 접촉면이었다. 자신의
근원을 잃어버리고 잠자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 운동역학이야말로 잃어버린 높은 실재와의 연관을
다시 찾게 해줄, 그래서 모두에게 그 근원을 똑똑히 보여줄 수 있는 도구였다.
나는 모든 사물과 생각,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나의 연구소 직원들도
모두 그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형광등, 살충제, 인공감미료 같은 부정적인 자극은 사람들을 하나같이 약화시켰지만, 영적인 수련을 하여 의식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에게는 웬일인지 근육의 약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의식에서는 뭔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
믿는 바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위한 부단한 수련만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부침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준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일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나는 점점 더 강하게 이끌렸다.
사랑이 부재하는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는 볼 수 있었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도 특정한 시기에 이런 사랑의 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변화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제, 이러한 임계점에 대한 통찰력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말할 여지없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프쉬케(마음)라는 것이 그렇게도 기만당하기가
쉽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불협화음과 투쟁은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기본적인 딜레마의 해결법을 갖게 되었다. 의식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해줄,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뉴욕 5번가의 아파트와 롱아일랜드의 별장을 오가는 생활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뭔가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 자신이 온전한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이 커짐에 따라 나는 마침내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나는 세상을 떠나 시골에서 은둔하기 시작했고, 7년 동안 명상과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애써 구하기 않아도 넘쳐나는 축복의 상태를 다시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나는 깨달았다. '신성한 그분'
안에 머무르는 법을 나 자신에게 가르쳐야 마땅하지만 동시에 세상일에서도 제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당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연구와 저작을 위해서는 모든 영적 수련을 그만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신문을 읽기 시작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거기에 오르내리는 여러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최근의 사회적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세상과 사귀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집단 의식에로 보냄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는 신비주의자들의 영역처럼,
진리에 대한 주관적이고 예외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인류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영적인 것을 추구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나는 평범한 존재 자체가 곧 신성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이유에서 한껏 평범해지기도 작정했다.
참 자아에 대한 진실은 일상의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관심과 친절을 갖고
사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하느님은 결코 일상생활과 구분된 영역에 존재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기나긴 순환 여행 끝에 나는 가장 중요한 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이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존재'를 내 힘이 닿는 한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다.
저자 후기(4)
'위대한 존재'는 침묵 속에서 평화를 실어 나른다. 삼라만상은 그분에 의해 그분 안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존재
하며, 그분의 실재를 경험한다. 그분은 무한히 온화하지만, 바위와 같기도 하다. 그분고 함께 있을 때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영적인 기쁨은 설명할 길 없는 고요한 황홀 상태에서 나타난다. 시간 관념이 멈추고,
근심 걱정도, 후회도, 고통도, 어떠한 기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쁨의 원천은 끝이 없으며, 언제 어디
에나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더 이상 상실감도 없고, 슬픔이나 욕망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흠이 없다.
시간이 정지할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문제란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위대한 존재'가 있는 한, 육체와 마음의 분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 속에서 침묵이 점점 커져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되면 '순수 의식'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삼라만상과 온 우주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시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은 의아해하곤 한다. '이러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체험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계단을 밟아 올라
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적어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내 열망은 아주 강했다. 그런 다음엔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법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자비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나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비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엔 모든 욕망을 기꺼이 멈출 수 있어서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의지를 항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생각, 느낌, 욕망, 행위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
그럴 때만이 마음의 평화는 커져간다. 처음에는 모든 문장과 구절들을, 그 다음엔 생각과 관념까지도 나는
신에게 바쳤다. 자신의 생각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은 채 나아간다면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
하고,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다. 결국, 나는 생각으로 무르익기 이전의 에너지까지도
신께 맡길 수 있었다.
일상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도 나는 언제나 정신을 집중하여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명상하는 도중에도 산만해지는 순간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주 힘겹게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습관화되고 자동화되어 점점 쉬워졌으며,
나중에는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지만 일단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타성에 의해 저절로 움직인다.
홀연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깨어 있음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졌고, '위대한 존재'는 실수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며, 거기에 계셨다.
자아가 죽는 아픔도 없지 않았지만,'위대한 존재'의 절대성이 경외의 불빛을 비추며 격려해 주었다.
자아의 죽음과 함께, 이제껏 알아 왔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황홀한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감이었다. 격심한 충격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위대한 존재'와 함께
있는 사랑이 떠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보호와 도움이 없다면 누구라도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에고가 살아 남으려는 발버둥을 치는 순간에도 공포가 다가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 자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에고가 죽은 그 자리에는 진아가 들어섰다.
모든 것이 오롯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진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는 곧 모든 것이라는 인식이 뒤따라 주었다. 그 하나는 온전히 모든 것이었고, 완전했다.
모든 신물을 뛰어넘어, 모든 성(性)을 뛰어넘어,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는 이제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런 경지에서는, 신체의 무엇이 일어나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영적인 깨달음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신체의 병은 저절로 없어지거나 가벼워진다.
하지만 절대의 상태에서는, 그런 현상들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 육체는 예정된 과정을 밟은 후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고,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육체는 '나'라기보다는 '그것'이 된다. 방안의 가구 같은 또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이 육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너'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만,
이러한 상태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로 깨우쳐 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섭리'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에도 한때 축복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그 강렬한 황홀감을 숨기기 어렵다.
세상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 오라와 함께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영적인 추구자나 영혼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때 그는 그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될 수 있고,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깨달은 자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들과 나누고 싶고 모두의 유익을 위해 그 깨달음을 사용
하려는 욕망이 있게 된다.
이 상태를 동반하는 황홀경이 절대적으로 계속되는 것만이 아니다. 번민의 순간들 역시 존재한다.
가장 큰 번민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황홀감이 그쳐 버리는 것이다.
심한 절망감에 빠지는 이런 시기에는 위대한 존재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락은
우리의 여정을 힘겹게 하며, 상황을 환원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의지가 필요하다.
이 수준을 초월하거나 ‘은총의 하락’의 뼈아픈 고통을 항구적으로 감내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역시 이원성을 초월하는 힘겨운 과업의 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황홀경의 영광 또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아경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금사슬을 끊어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치 신을 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고,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두려움이 일어난다.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외로움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비존재의 두려움이 엄청난 것이어서, 그런 두려움이 다가올 때면 번번이 뒷걸음질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민에 사로잡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새우고 나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이 주어지는 것은, 극도의 노력을 아끼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왕래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존재 자체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에 대한 욕구마저 항복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전부와 무를,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과업이 가장 어려운 고비이고, 최종적인 분수령이다. 이 정점에서 존재에 대한 신기루를 초월하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단계에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으며, 돌이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 마지막 장벽이 되어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자아의 이 마지막 대전환의 지점에서, 홀로 남아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을 푸는 것은,
우주적 신성에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개인적인 의식도 선택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 마지막 단계는, 그때, 오직 신에 의해
서만 주어진다.
옮긴이의 말
아름다웠던 어떤 만남
1995년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 해였다. 미국에 이민 온 지 어언 20여 년,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세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으며(사실 첫 두 아이들은 자기들이 혼자 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부모의 도움 없이 자랐다), 부인과 내분비학 전문의인 나의 위치는 확고했으며, 또 내 개업 상태도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넓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집,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나에게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1995년은 아이들 엄마와 30여 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해가 되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기 생활의 한 면,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의 한 부분같이 여기던 사람과의
헤어짐은 마치 가까운 사람이 저 세상으로 떠날 때의 아픔과 아쉬움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아이들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이 헤어짐은,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나에게는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이 헤어짐이 오기까지 우리들에게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풍요와
행복 밑에 심각한 두 사람의 문제가 오랜 세월 계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후회도 해보고 원망, 분개, 절망도
했었다. 한동안 나는 사람들이 혹시 암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오래 즐겨온 단식 장구는 많이 진보했으며,
두 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한 번만이라도 이겨 보겠다고 도전을 해온다. 세상사에 대한 나의 관점
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나의 열정은 테니스 코트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더욱 뚜렷해진 것 같다.
이제 나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후회, 원망, 미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 엄마와 나 사이에서 일어난 과거의 모든 일들은 그때 그렇게 밖에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이해하고 있다.
거기에 잘, 잘못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두 사람의 관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
각자의 관점에서는 서로의 '진실'이었다는 것, 이 세상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우리가 잠시 지나가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것, 고통은 영혼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항상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려는 노력이라는 것...... 삶에 대한 이러한 방향 전환은 나를 부드럽게,
또 포용력이 조금 더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애리조나 주 세도나로 가서 저자인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를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은둔하며 영적 생활을 하는 그의 소박함과 솔직함에 감명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와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그의 경건한
자세가 너무 좋았다. 이 책과 저자와의 아름다웠던 만남은 내 생애에 하나의 이정표로서 남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께도 아름다운 만남이 있기를!
부인과 전문의 이종수
(미국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