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공부하시는 모든 분들은, 공[空]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깨달을 게 바로 공[空]입니다.
이것은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금강승 불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초기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도
무상/고/무아 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되고, 반드시 공[空]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부처님과 같은 그런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고....
단지 공을 한번 힐끗보는 일별을 말합니다.
부처님같은 그런 깨달음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본질적인 차원은 같지만, 그 깊이는 너무나도 극도로 차이가 납니다.
공[空]을 깨달아야,
부처님께서 뭘 중생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는지의 그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논서 중 하나인, 청정도론에 정말 기막힌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청정도론에서의 핵심이라면 바로 이 삼해탈문에 관한 내용일 겁니다.
청정도론에는
속제인 무상/고/무아와
진제인 삼해탈문, 즉 공/무상/무원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즉, 무상/고/무아가 어떻게 다리 역할을 해서
깨달음의 영역인 공/무상/무원으로 진입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무상/고/무아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해하실 것이고,
공/무상/무원을 설명드리자면,
공[空]은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고,
무상[無相]은 어떤 모습/표상/형상/니미따가 없다는 걸 말하고,
무원[無願]은 아무런 바램이 없다는 걸 말합니다.
어떤 대승경전에서는 무원[無願]을 무작[無作]으로 한역했습니다.
무작[無作]이란 그 어떤 작위/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걸 말합니다.
무원과 마찬가지 뜻이죠.
수다원에서 아라한, 벽지불, 보살의 경지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공[空]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삼해탈문은,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뜻이 다른게 아니죠.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은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다만 표현상으로 다를 뿐이죠.
그래서 해탈의 문이 세 종류이고, 종착지는 같습니다.
실체가 없어 공[空]하니,
공 그 자체에는 어떤 표상/니미따가 없어서 무상[無相]이고,
또 그 어떤 작용할만한 실체가 없으니 무원[無願]입니다.
이 삼해탈문이, 사실 공을 깨닫는 요령입니다.
그 방법이 그대로 글자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공[空]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 입니다.
공[空]은 마음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공[空]을 깨닫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따로 글로 올리려고 합니다.
공[空]을 깨닫는 것은 반드시 삼매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경전에도 나와 있다시피
부처님 설법만 듣고서도 깨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삼매에 든다고 해서 모두 다 공[空]을 깨닫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관하다가 공[空]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의 내용을 인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