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교인들에게 많은 사랑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들어온 몇몇 사람들의 거짓된 이야기를 듣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고린도 교회를 직접 찾아갔지만 냉담한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에 바울은 매우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고린도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눈물로 쓴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3절 이하에 보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아데미의 신상을 만들어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을 풍족하게 살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수입이 줄어들자 그 이유를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분노하여서 온 시내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안전상의 이유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돌로도 맞고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당한 이러한 일들을 환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환란으로 번역한 단어는 위와 아래에서 내리 누르는 압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8절과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란에 대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망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겁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셨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시지, 나를 그냥 죽이려고 하시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그럼 바울이 오늘 본문 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환란을 겪고 있는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심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찬송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형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은 하나님을 어떻게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비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 환란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4절 상반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멘 바울은 극심한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에게 환란이 넘쳤지만 그 환란 중에 하나님의 위로도 넘치게 받았습니다. 바울이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겪은 환란보다 하나님이 주신 위로가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환란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이 느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 중에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경험하니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란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란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환란의 고통보다 위로의 은혜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환란이 없는 삶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환란이 없으면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환란 중에서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환란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하시는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기 때문에 위로가 없는 삶보다 환란이 없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환란에서 바로 건져주신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의 위로는 파라클래시스라는 원어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먼저 신학자 랄프 필립 마티는 파라 클래시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파라 클래시스의 의미는 컴포트, 편하게 해주다, 콘솔레이션, 달래서 위로해주다가 아니라 인커리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편하게 해주고 달래서 위로해 주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단계까지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우리를 달래주시고 편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셔서 다시 일어나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할렐루야
다음으로 위로 파라 클래시스는 곁에서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계속 불러주는 겁니다. 환란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도록 곁에서 불러주고, 슬픔의 동굴에서 헤쳐나오도록 곁에서 불러주고, 절망의 늪에서 건져져 구원을 받도록 곁에서 불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 파라 클래시스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계속 불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보혜사사 파라클레토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라는 단어인 헬라어 파라클래시스는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키는 용어인 파라클레토스와 어근이 같습니다. 늘 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분, 늘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늘 곁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위로의 근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의 통로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위로 그 자체가 되십니다. 환란 가운데 계십니까? 그 환란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 넘쳐 흐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환란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우리 본문 9절과 1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멘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환란 속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환란에서 건지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바울은 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열심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났고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여러 환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란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환란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가르쳐줍니다. 나는 스스로 환란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환란을 통해서 그 사형 선고에서 건지실 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환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육신과 마음의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경제적, 영적인 가난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관계적, 사회적인 소외로부터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건지십니다.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고, 지금도 건지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은 환란 가운데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환란 가운데에서 살 길을 찾았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환란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을 겪을 때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길 원하십니다.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맞추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에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환란 중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멘, 바울은 환란 중에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을 보겠습니다. 5절부터 7절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도야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란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오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므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오함과 애통함과,
아멘 바울이 몸을 피해 마의 도냐에 있었지만, 바울은 그 마귀의 누냐에서도 여전히 큰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디도를 마게도냐로 보내셔서 바울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그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우리가 환란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환란 중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에서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안에 충만해질 때 우리는 환란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란을 홀로 견디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서로 함께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고난 중에 서로가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환란 중에 위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교회를 핍박하는 아버지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큰 환란이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박해받으며 신앙생활하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시험 결과로 여러 번 대입에 실패하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입시 문제로 좌절하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급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의식을 잃으신 아버지가 손발이 묶인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암으로 아파하는 성도님들과 그런 가족을 간병하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26살에 아버지를 잃고 외동아들로 어린 나이의 가장이 되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부모님을 잃은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지식과 경험도 없이 사업을 하며 여러 가지 소송과 세금 문제에 휘말리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여러 번의 유산을 경험하며 몸과 마음이 상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또 아이를 너무 갖고 싶었지만 시술을 통해서도 오랜 기간 아이를 갖지 못하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아이 문제로 아픔을 겪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방암 투병 후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어머니를 고국에 홀로 두고 외국에 살면서 마음을 졸이며 불효자로 살 수밖에 없는 환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같은 상황에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환란 중에 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길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이 위로의 말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표정이 위로의 표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위로의 태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위로의 마음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로의 신앙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위로의 섬김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위로의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존재가 위로의 존재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환란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환란 중에 있는 우리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환란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현재 마게도냐에 왔지만 여전히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바울을 직접 도우러 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그들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바울을 환란으로부터 구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리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붙여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멀리서 위로하는 이들, 그를 위해 중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좀 기도를 해줘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줘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너희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고, 너희는 그 기도 응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란 가운데 계십니까?
그런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여러분에게 붙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우리를 위한 기도를 시키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한 누군가의 중보 기도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루는 누군가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가능한 하루하루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누군가의 중보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 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이 환란 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여러분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을 반드시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그 기도로 말미암아 환란을 극복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누군가의 중보자가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기도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서론 부분에 드렸던 질문입니다.
바울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심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까?
사형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은 하나님을 환란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 어떻게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까?
환란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환란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란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이 환란에서 반드시 건지신다. 그리고 그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환란 중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에 그는 환란 중에서도 외롭지 않았고 환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사랑하는 파리 선한 장로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고 찬송하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