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조선 인조 때이다. 퉁소를 잘 불고 바둑을 잘 두는 어떤 재상이 신선 같은 사람을 만나 사돈을 맺기로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문가라면 당연히 명문가의 규수를 맞이해야 할 텐데 의외로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선뜻 혼약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강산에 찾아가 문제의 신부감을 데려왔는데 그 용모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신부의 용모를 본즉, 얽은 중에 추비(거칠고 촌스러움)한 때는 줄줄이 맺혀 얽은 구멍에 가득하며, 눈은 달팽이 구멍 같고, 코는 심산궁곡(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의 험한 바위 같고, 이마는 너무 벗겨져 태상 노군(노자의 존칭) 이마 같고, 키는 팔척 장신이요, 팔은 늘어지고, 한 다리는 저는 모양 같고, 그 용모 차마 보지 못할러라.
고소설 주인공 중에서 이렇게 못생긴 인물이 또 있던가? 주인공이 아닌 악인의 경우에는 흔한 일이지만 선한 주인공이 이렇게 박색이라는 것은 파격 중에서도 파격이다. 이 때문에 신랑 이시백은 신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그것이 소설의 초반부를 이끌어 가는 주요 갈등이다. 그렇게 박대 속에 보내길 3년, 박씨가 친정 아버지를 뵙기 위해 금강산엘 다녀오고 난 뒤 드디어 문제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그리고는 둘도 없는 절세 미인으로 탈바꿈한다. 비할 데 없는 추녀가 다시없는 미녀로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단은 여성들에게 잠재해 있는 미적 욕망을 실현해 주는, 일종의 대리 만족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못생긴 여자가 잘생긴 여자로 바뀐다는 설정은 많은 여성들에게 통쾌함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통쾌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미모만 탐하는 것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시아버지 되는 사람은 박씨가 외모는 괴상하나 재주가 기이하고 덕을 겸비하여 가문을 빛낼 인물이라 칭찬하며 미색을 탐하는 아들을 꾸짖는다. 또 박씨는 자신이 본얼굴을 감춘 이유는 남편이 미색에 혹해서 학업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일시적으로 추한 여성을 내세워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이다.
2. 여성도 힘이 세다 - 여성영웅소설
<박씨전> 같은 소설은 고소설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흔히 ‘여성 영웅소설’로 분류된다. 그자 그대로 여성이 영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박씨전>에서 박씨가 그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을 몇 가지 짚어보자. 우선, 오륙 인이 해도 못할 만한 일을 혼자 한다. 박씨는 시아버지가 내일 당장 입어야 할 관복을 하룻밤 새에 지어놓는 괴력을 발휘한다. 시아버지는 그 관복을 입고 임금을 배알하는데, 임금은 관복에 그려진 굶주린 학의 그 생생한 모습에 놀라 박씨에게 매일 세 말씩의 쌀을 내리도록 한다. 이런 신기한 일은 한둘이 아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망아지가 천리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과거 보러 가는 남편에게 신기한 연적을 주어 장원 급제시키며, 전쟁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예방한다. 여성이 그렇게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면 갖출수록 남성은 어쩔 수 없이 더욱 왜소해 보이게 마련이다. 남편 이시백은 몇 차례에 걸쳐서 아내의 재주와 역량을 직접 확인했으면서도 아내가 추하다는 이유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박씨가 허물을 벗고 미인이 되자 태도를 180도 바꿔서 사죄를 하고 나선다. 그런데 그 사죄라는 것이 가관이다. 자식을 못 낳고 죽으면 불효가 되니까 거듭 생각해 달라는 식이다. 참으로 얄밉고도 안쓰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자 박씨가 점잖게, 그러나 아주 엄중하게 훈계를 한다.
조선은 예의지방이라 하였는데, 사람이 오륜을 모르면 어찌 예의를 알리오. 그대는 아내가 박색이라 하여 삼사 년을 천대하였으니 부부유별은 어디 있으며, 고인이 이른 말이 ‘조강지처는 불하당(不下堂-마루 아래로 내려가게 하지 않음)’이라 하였는데, 그대는 다만 미색만 생각하고 부부간 오륜을 생각지 아니하고 어찌 덕을 알며, 처자의 심천(深淺-깊음과 얕음)을 모르고 입신 양명하여 보국안민할 재주가 있사오리오. 지식이 저다지 없을진데 효와 충심을 어찌 알며 안민지도를 알으시리오. 이후는 효도를 다하여 수신제가를 명심하소서. 첩은 비록 아녀자이나 낭군 같은 남자는 부러워 아니하나이다.
이 대목처럼 선명하게 남성 대 여성을 의식한 발언이 또 있을까. 그 당시 남성에게 억압받던 여성들로서는 이 박씨 부인의 훈계에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낭군 같은 남자는 부러워 아니한다는 그 한마디에 여성보다 훨씬 못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군림하는 졸장부들에 대한 질책이 숨어 있다.
3. 졌지만 이긴 전쟁 - 정신적 승리
이처럼 박씨와 남편 이시백 사이에 얽히고 설킨 이야기가 작품의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청나라의 침입을 둘러싼 박씨의 대활약으로 채워진다. 사실 괜찮다는 문학치고 개인 문제만으로 점철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어떤 개인이든 시대와 사회라는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게 마련이며, 문학 역시 그런 상황을 잘 포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조선 인조 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때이므로, 전쟁 문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는 병자호란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각설, 북방 호적이 강성하여 북변을 침범하매 임경업이 백전백승하여 물리치고 북방을 살피니, 무지한 호제 조선을 치려 하고 만조 백관으로 의논 왈, “우리 나라는 지방이 광활하되 조선 장수 임경업을 제어할 사람이 없으니 이 어찌 가련치 아니리오. 어쩌면 조선을 도모하리오.” 제신(모든 신하)이 묵묵부답이더라. 차시, 호 귀비는 비록 여자나 쌍이(견줄 만한 것이) 없는 영웅이라. 상통천문(위로는 천문에 통달하고) 하달지리(아래로는 지리에 통달함)하여 앉아서 천리 일을 헤아리고 서면 만리 밖 일을 아는지라. 호제께 주왈, “조선에 신기한 사람이 있사오니, 경업을 제어하여도 조선은 도모치 못할까 하나이다.”
오랑캐의 왕이 조선을 침략하려 하지만 임경업과 신인(박씨부인)이 무서워서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미인계를 동원하여 이시백을 교란시켜 보지만 모두 허사였다. 또 오랑캐 장수 용흘대는 죽임을 당하고 그 형 용골대는 모욕을 당하는데 모두 박씨 부인의 힘 때문이었다. 변장하고 들어온 사람을 미리 알아채고, 적의 칼은 피화당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막아 주었다. 나무가 용과 범이 되고 그 가지가 새와 뱀이 되며, 무수한 수목이 병사가 되고 가지와 잎은 창과 검이 되었다. 사세가 그리 되자 적의 장수는 어쩌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역사 속의 병자호란은 완전한 패배였음에 유념하자. 임진왜란은 어렵기는 해도 승리를 거둔 전쟁이지만 병자호란은 임금이 직접 나와서 항복을 해야 했던 치욕의 역사이지 않던가. 하지만 소설에서는 진 진쟁을 그리면서도 박씨의 활약으로 부분적인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이런 문학을 '정신적 승리'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청나라에 대한 현실적 패배를 허구 공간인 소설에서나마 승리하도록 꾸몄다는 말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받는 억압을 넘어섰던 것처럼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굴종 역시 그런 방법으로 넘어서려 했던 것이다.
4. 역사와 도술 사이에서
이렇게 읽어내려가면 소설의 결말은 뻔하다. 박씨가 남편 이시백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동시에 침입한 외적을 임경업 장군과 더불어 혼내 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과 조선의 승리인 셈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점에 심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상황을 보자면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고,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했는데 대체 이런 작품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보는 시각은 사실상 상반되어 있다. 이런 작품을 ‘역사 군담소설’이라고 해서 ‘역사 소설’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하나의 시각이고, 변신과 도술을 중심으로 해서 ‘도술 소설’로 설명하는 것이 또다른 시각이다. 분명 이 작품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깔려 있다. 병자호란이 나오고, 실존인물 이시백과 임경업이 등장하며, 임금이 항복하고 왕자가 인질로 끌려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또 박씨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적군을 완전히 물리쳐 조선의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식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왕명을 어길 수 없다고 하면서 적군을 놓아준다든지, 여성이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하여 분함을 삭인다든지 하는 데서 역사적 사실성을 미약하나마 엿볼 수 있다. 특히 청나라로 끌려가는 부인들이 박씨 부인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죄로 만리 타국에 잡히어 가는고. 이제 가면 하일 하시에 고국 산천을 다시 볼꼬?” 라며 탄식하는 부분은 비통한 민족사 그 자체이다. 이 점에서 <박씨전>은 역사소설이라고 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박씨의 도술로 적군을 제압하고 임경업이 분풀이를 하는 대목은 완전한 허구여서 역사 소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이 작품은 시종일관 도술담의 연속이다. 처음부터 추한 모습으로 액운을 감추며, 피화당이라는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서 전란을 예방한 것, 수삼 일 만에 금강산을 다녀온 것, 신기한 술법으로 적병을 물리친 것 등이 다 그렇다. 더욱이 주요 이야기 흐름과 관계없이 아예 도술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까지 등장한다. 여러 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치마에 불을 붙여 세탁한다든지 술잔에 비녀를 꽂아 술을 반으로 가른다든지 하는 도술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 점에서 <박씨전>은 역사적 맥락 등을 십분 고려한 현실성이 강한 소설이라기보다 오히려 신화적인 속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 환상성이 강한 소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자체 모순으로만 보이는 이야기 구성이 오히려 대중적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다. 주제의 무거움과, 그것을 풀어가는 가벼움이 다양한 욕구의 독자들을 끌어들였다 하겠는데,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이 실제 생활에서 겪어야 하는 억압과 굴종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