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시인>
오태환
<신작시>
능소화 외 2편
누구는 징역이라 읽었고 누구는 노을빛 띄운 바다를 보았다 벼랑 위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기
직전의 그, 아슬아슬한 허공
또는 허공의 탁란
담홍들이 이슬에 팡! 젖은 채 하들하들 떤다
담홍들이 담홍째로 무너져서 지네 발치께에 착! 착!
쟁여지는데
저편 양달에서는 죽은 자들끼리 모여 그림자도 없이 울고 있다
어떤 손은 덩굴을 데리고 또
그늘 같은 벼랑을 그늘처럼 타고 오르는데
그늘처럼, 한사코 타고 오르는데
누구는 징역이라 읽었고 누구는 노을빛 띄운 바다를 보았다
* * *
옥수수밭에서
옥수수밭이 일여덟 마지기는 너끈하겠다 너무 맑아서 여차하면 살을 베일 것 같은 늦가을의 하늘 숫돌에 갈 듯 초록을 가으내 갈아내고, 겨우 남은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가 햇노란 햇살을 받으며, 또 햇노랗게들 사각이며 지천이다 바람이 일 때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햐! 노을구름떼처럼 모였다가는 배돌며 또 싹 빠지는 그 햇노란 사각과 햇노란 사각의 찬란한 틈서리들을 보면, 그냥 국으로 숨만 쉬어도 한 상 뻐개지게 차려 먹은 듯싶다
햇노란 옥수수밭에 싸락눈이 내린다 은단(銀丹) 같은 싸락눈이 바람이 일 때마다 이리저리 쟁반 기울어지듯 짜르르 짜르르 몰리더니,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에 가서 일일이 부딪는다 싸릉싸릉 싸릉싸릉 청까지 튕기며, 아주 쬐끄맣고 투명한 그늘처럼 뛰어올랐다가는 자빠지고 자빠졌다가는 또 허천나게들 부딪는데, 싸릉싸릉 튕기는 맵시가 비장 속까지 햇노랗게 기뻐 죽겠단다
* * *
상강(霜降) 무렵
환하게 볕드는 주방 싱크대 오른쪽의 마블상판 위에 흰 커피잔 두 개가 포개져 있다 커피잔이 조금씩 들썩이더니, 하나가 다른 하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하나의 목덜미에 자기 목덜미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밀어올리고, 아랫배를 누르며 올라타려 한다 커피잔 하나는 간신히 숨을 참으며 깍지 낀 두 손으로 다른 하나의 목을 힘껏 끌어당긴다 커피잔 하나가 소리를 죽이고 다른 하나의 마른 입술을 자신의 마른 혀로 핥는다 커피잔 하나는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고개를 젖히면서 허리를 비튼다
가스레인지와 후드팬 사이 흰 타일을 붙인 A4용지 두어 장 넓이의 벽면 위에 죽은 남자와 죽은 여자가 누워 있다 죽은 남자가 죽은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죽은 여자의 목덜미에 자기 목덜미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밀어올리고, 아랫배를 누르며 올라타려 한다 죽은 여자는 간신히 숨을 참으며 깍지 낀 두 손으로 죽은 남자의 목을 힘껏 끌어당긴다 죽은 여자가 소리를 죽이고 죽은 남자의 마른 입술을 자신의 마른 혀로 핥는다 죽은 여자는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고개를 젖히면서 허리를 비튼다
느닷없이 전파잡음 같은, 춥고 어두운 울음소리가 귀청을 꿰뚫고 지나갔다(발견2013봄)
<근작시>
춘사(春思) 외 2편
애초엔 도린결 따라 옮기며 켜 들더니, 성냥불 탁탁 당겨놓은 듯 으슥한 심짓불만 다문다문 켜 들더니, 말짱 고드름장아찌 희미론 나무거울 꼴값인 줄 여겼더니, 아파라 수수꽃다리 자운영 모란 바람꽃 꽃그늘 속에서 불에 덴 듯 아파라 얼레지 영산홍(映山紅) 수양벚꽃 찔레 산수유(山茱萸) 노루귀, 느닷없이 후림불로 번지는 천지의 꽃그늘 그늘에 덴 듯 몸알이 아파라 천년을 저지른 사랑이 저런 빛깔로 도지는구나 식겁할 후림불로 도지는구나 아버지의 아버지 훨씬 더 먼 아버지 적 그리움이 맨발인 채로 어귀마다 뒤란마다 작신작신 다시 도지는구나 해바른 봄날 감잎애순 덖어내듯 아픈 몸알서껀 덖어낼까나 몸알의 그리움 덖어낼까나 차라리 맹독(猛毒)의 향내처럼 덖어낼까나 소슬한 무쇠솥 혼자서 머리에 이고 자꾸 몸알 가무는 봄날 천년을 더 사랑하고 싶은 봄날 천년을 더 죽고 싶은 봄날 (『시평』 2012년 여름호)
* * *
홍어
쐐한 박하(薄荷)잎 향기가 쓸쓸했다 썩은 두엄더미와 썩은 볏짚 속에서 삭힌 한 철 내내
비뚜로 구겨진 채 검게 빈 구강, 아직 선득선득한 배지느러미, 방패연같이 납작하고 흐린 몸피, 미늘 같은 가시가 돋친 꼬리, 울금빛 애까지 샅샅이
항구의 그림자처럼 어두워졌겠다 항구의 그림자에 항구의 그림자가 포개진 것처럼 어두워졌겠다
불완전연소의 허기
콧속과 인후를 양잿물에 재 놓은 것 같다
뱃살 한 점에 미나리를 얹고 양념간장을 찍어 입안으로 가져간다 그러니까 소주잔을 곁들인 무심한 젓가락질은
다만 그것의 쓸쓸함과 내통하거나, 그것의 어둠에 독하게 부역하는 일
이 숨죽인 식욕을 채우는 저녁나절, 눈발 날리는 항구의 저녁나절(『현대시학』 2012년 11월호)
* * *
맨드라미
맨드라미가 하늘귀에 흥건히 엎질러졌다 잔인하도록 맑은 선홍들이 발뒤꿈치까지 다투어 엎질러졌다 꼭지마다 화살촉 비슷한 것을 비죽비죽
비집고 나오는 구름들의 수급(首級)
그, 무슨 근성 같은 것의 황폐하고 또 황폐한 칠갑
어떤 화살촉 비슷한 것은 닭살처럼 오톨도톨 묽어졌는데
붉은 줄기에 도래매듭으로 엇나가게 매달린 붉은 잎새 잎새 잎새가 꼭 사시미칼에 베인 상처자국 같다
무참히 붉어
차라리 그늘에 보랏빛을 비치는
선지피의 황홀한 결사(結社)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던 구석기의 혈거인류(穴居人類)가 가을하늘에 고요히 마지막 눈을 적시며 바라봤을지 모르는
이제 막 쌍살벌 한 마리가 노란 햇볕을 먼지처럼 털며 비껴 나는 (『유심』2013년 1월호)
<시작노트>
시와 죽음에 대한 단상
지난 가을부터 올 봄까지 여기저기 발표한 시가 30편 남짓 되는 것 같다. 더 정확히 월간지로는 12월호, 계간지로는 지난 겨울호까지 13편을, 그리고 『웹진발견』을 아울러서 올 봄에 19편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작년 9월 16일부터 10월 말까지 만해마을 문인집필실에서 한 달 보름을 기숙하면서 쓴 34편 가운데 32편을 어영부영 소화해 낸 셈이다.
붓을 안 쥘 때는 몇 년이든지 오불관언 시 한 줄 쓰지 않다가, 한번 내키면 몰아서 써 제끼는 내 못된 병통을 감안해도 적잖이 생산해 낸 형국이었다. 만해마을에 깃든 45일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일 때문에 서울에 머문 날을 제하면, 술은 술대로 거의 사양치 않은 와중에 거의 하루 한 편 꼴로 부지런을 떨었다.
만해마을을 에워싼 내설악의 산빛과 북천의 물소리는 도시의 번요(煩擾)와 일상의 질곡(桎梏)에 지친 내 눈과 귀를 세척하고 갱신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구석구석, 마치 햇빛과 흙을 그냥 놀려두기 아깝다는 듯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가을꽃들은 장관이었다. 나는 가을에 피는 꽃들이 그렇게 다채롭고 흐벅질 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하루 한 차례씩 마실가듯 들렀던 계곡은 청명하기가 빈틈이 없었다. 해가 들면 빛으로 짠 물무늬의 그물을 계곡바닥에 연필로 베낀 듯이 황홀할 정도로 선연했다. 수면 위에 푸른 그늘을 드리운 흰 수석(瘦石)들의 맑은 풍광도 잊기 어렵다.
내 다른 관심은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퇴실을 보름 정도 남겨놓고는, 체력이 소진됐는지 작은 부림에도 쉽게 피로를 탔다. 몸에 대한 무의식적 불신 때문인지 괴란쩍은 엄살 때문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욕조의 더운 물에 담그고 죽음에 대한 우울한 잡념에 빠져들곤 했다. 아래의 시는 그 중 하나인데 길지 않으므로 그대로 옮긴다.
내가 눈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희미한 노을 몇 잎뿐이었고
내가 귀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궂은 빗소리 몇 마디뿐이었고
내가 입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쓴 소주 몇 잔뿐이었고
내가 손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부질없는 시(詩) 몇 줄뿐이었는데
세상이 한번 나를 탕진하니 이렇듯 되고 말았다
―「묘비명」, 전문, 『시와 시학』, 2013년, 봄호
'죽음은 이미 지나갔거나, 미구에 닥칠 것이다. 죽음에 현재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맞다면, 죽음에 현재는 늘 부재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아예 애써 생각지 않거나 지나치게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시 쓰기의 향방을 짐작하거나 예단하는 짓은 설사 본인이라도 위험천만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죽음의 환상이 어떤 각도와 농도에서든 내 글의 한 모서리에 집요하게 서려 있을 거라는 예감에서 잘 벗어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