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마음이 많은 이는 여우가 될 것이고 속이기를 잘하는 이는 미치광이가 될 것이고
살생 많이 하는 이는 단명하고 병이 많을 것…
佛法은 마음을 돌려 비춰보는 데 있는 것이니
제발 마음을 관하라…생사문제서 벗어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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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만공, 보월스님의 가풍을 이은 금오스님. |
한국불교 정화역사에 큰 역할을 한 금오당 태전스님(1896∼1968). 스님은 16세에 금강산 마하연선원으로 출가해 28세에 예산 보덕사에서 보월스님에게 법을 인가받았다. 김천 직지사와 보은 법주사 조실,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역임하며 법을 폈고 1968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경허, 만공, 보월스님의 가풍을 이은 스님은 평생 엄격한 수행정진으로 일관했다. 제자로는 맏상좌인 월산스님을 비롯해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탄성스님, 혜정스님, 월주스님과 이두, 범행(입적), 월서, 월탄, 월성, 설조스님 등이 있어 ‘금오문도회’를 형성할 정도다. 본지 1978년 7월16일자에 게재됐던 ‘마음 짓는 이치’ 주제의 생전 법문을 현대에 맞게 요약했다.
법계(法界)의 이치를 깨닫고 우주를 보면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각성(覺性)이요, 둘째는 삼라만상의 유상(有相)이요, 셋째는 무형(無形)한 허공이다. 그러한 물체에 있어 오직 마음만이 주(主)가 되나니, 만일 사람이 마음의 주인을 알기만 한다면 만 가지 이치를 한 번에 통할 것이다.
각성(覺性)은 상주불변하여 겁외(劫外)에 초연하고 자유롭지만, 삼라만상의 유상(有相)은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해서 고통스러울 뿐이며, 또 무형한 허공은 물체가 아닌 듯해 보이지만 그것도 심리작용으로 변천된 허공인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만법(萬法)의 본원(本源)이며, 만화(萬化)의 주체이기 때문에 인생이 닦아나가는 향상(向上)의 도정(道程)에 있어서도 만일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법 진리는 체달(體達)하지 못할 것이다. 저 형형색색과 천차만별의 이치라든지, 천경(千經)과 만론(萬論)에서 거론된 것 등이 모두 한마음을 밝히는 데서 풀어질 것이며, 제불제조(諸佛諸祖)도 오직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다. 이렇듯 일체 만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마음에서 일체가 나오지 않음이 없나니, 그러므로 일심(一心)으로써 종(宗)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근본심이 흔들리면 허망한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갖가지 과보를 받게 된다. 즉 삿된 마음이 많은 이는 여우가 될 것이고, 속이기를 잘하는 이는 미치광이가 될 것이고, 독한 마음이 많은 이는 독사나 호랑이가 될 것이고, 탐하는 마음이 많은 이는 가난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욕심이 많은 이는 아귀가 될 것이고, 살생을 많이 하는 이는 단명(短命)하고 병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인과법을 철저하게 믿어 내생에 선보(善報)를 받아 나게끔 선업(善業)을 지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본래심(本來心)을 깨치고자 온갖 성심성의를 다해 선지식 앞에 공양 예배를 하되 교만심과 아만심을 없애고 텅빈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한 구절이라도 듣지 못했던 법을 듣고 기뻐하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七寶)를 갖고 보시한 공덕보다도 뛰어나고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만 가지 이치가 본시에 계합되면 유심조(唯心造)의 도리는 절로 알아질 것이다.
저 날짐승과 길짐승이라든지 물고기 자라 곤충 벌레 등도 당초의 한 생각이 잘못되어 갖가지 모습을 받아 나게 된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는 것이며, 또 부처 밖에 마음이 별달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제 머리를 두고 먼 데서 제 머리를 찾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조용히 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도 마음이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웃는 것도 다 마음인 것이다.
이 마음이 범부도 되고 성인도 되는가하면, 삼계에 윤회하여 천만 가지로 과보를 받게 되나니, 다 심식(心識)의 환변(幻變)인 것이다. 아, 가련하구나. 마음의 고향을 떠난 중생이여. 얼마나 많은 부모 형제, 처자, 권속들이 서로서로 번갈아가면서 아비는 자식을 생각해 부르짖고, 자식은 아비를 생각해 곡을 하며, 이렇게 형은 동생을 동생은 형에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에게로 얼마나 숱하게 곡을 하여 왔던가.
이러한 쓰라린 과보는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합해 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니 자심(自心)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제취(諸趣)에 돌아다니면서 천만의 형용(形容)으로 업보를 받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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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짓는 이치’ 주제의 법문이 게재된 1978년 7월16일자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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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이여! 불법은 다만 마음을 돌려 비춰 보는 데 있는 것이니 마음을 반조하지 못하면 바깥 물(物)에 쫓기고 전도(顚倒)되어 억겁토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부자유함이 한정없을 것이니 그 괴로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한번 머리를 돌이켜보라. 비로자나 청정법신은 잠깐 일념(一念)에 착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법신(法身)은 따라 나타날 것이요, 일념에 악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법신은 역시 따라 나타날 것이며, 내지 청·황·적·백의 색처(色處)에도 나타날 것이고, 공공적적(空空寂寂)한 곳에도 나타날 것이니, 이러한 법리(法理)를 어찌 부처님들께서만 미루어 둘 일이랴.
모든 것이 다 일념의 공심(空心)이지만 마음의 형용을 보기란 어려운 것이다. 비유하면 바닷물에는 짠맛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지만, 맛을 잡아낼 수가 없듯이, 사람이 개개의 심체(心體)도 허허(虛虛)한 허공과 같아서 모양이나 빛깔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저히 볼 수 없건만 참(眞)을 잊고 외형에 사로잡힌 까닭에 공연히 외형상으로 찾아보려는 생각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아무리 제 마음의 형상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니, 볼 수 없는 마음을 사무쳐 보라. 그리고 바꾸라. 나귀의 똥을 갖고 안주(眼珠)와 바꾸어라. 안주와 바꾸기만 하면 안광(眼光)이 햇빛처럼 반짝하여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어 모든 법을 다 통달할 것이며, 마음과 마음이 도(道)와 계합되어 삼라만상의 물상(物像) 그 어느 곳에서든지 부처를 만나고 조사를 만날 것이다.
일체 만법이 다 마음으로 쫓겨나고 멸하나니, 제발 마음을 관(觀)하라. 마음을 관하는 이는 죽고 사는데서 벗어날 것이오, 관하지 않는 이는 죽고 사는 생사에 영원히 빠질 것이다. 그러나 본마음만 보면 만사를 해결해 마치는 것이니, 만사와 만 가지 이치가 모두 마음이 움직이는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마음을 깨쳤었고 삼세의 보살도 마음을 배웠으며, 역대의 모든 조사님과 천하의 납승(衲僧)들도 이 마음의 근원을 깨닫고자 하였다. 팔만대장경도 모두 마음을 발현한 것이니, 즉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나아가 53선지식을 두루 참방하여 선지식들에게 배움을 청한 것도 마음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다.
오명(悟明)한 옛사람이 말씀하기를 “나는 대법(大法)에 왕이 되어 법에 온통 자재하며, 지옥을 변동시켜 천당을 만드는 것도 내 마음의 작용에 달렸다”고 하였다. 이렇듯 선악의 작용도 다 마음이니 마음을 먼 데서 찾지 말아야 한다. 마음은 한결같기 때문에 언제든지 망(妄)을 비워버리고 진(眞)에 돌아가 도안(道眼)만 밝으면 소분지계(小忿持戒) 따위가 어떻게 마음의 빛을 흐리게 할 것인가.
위산(噴山)선사가 말하기를 “다만 올바른 안목만을 귀히 여김이오, 행리처(行履處)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니 선(禪)을 공부하는 이는 먼저 올바른 인(因)을 심을 줄 알아야 한다. 오계(五戒)와 십선법(十善法)과 인과(因果)와 육도(六度) 등의 법을 믿음도 올바른 인이 아니니,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믿어 올바른 지견(知見)을 구하고 나아가 자기의 청정한 도안(道眼)을 결택(決擇)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아무튼 법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교시(敎示)를 어기지 말고 어디까지나 심법(心法)으로 몸을 닦으며, 심법으로 마음을 찾으며, 심법으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며, 심법으로 법륜(法輪)을 전하여 불국토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신문]
정리=여태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