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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장
1. 주의 날(1-11)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기사와 함께,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종말론적인 삶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 성도의 삶에 계속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믿고 기다린다고 하면서,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삶이 아니란 것입니다. 또한 이들에게 재림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마음을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에서 벌어질 일은 심판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벌어질 참된 현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밤에 속한 자들처럼 어둠에 취해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곧 세상의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 오시는가?’에 집중되기도 합니다. 성경이 재림의 시기와 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 가능하면 그 시기와 때를 알고 싶은 마음을 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와 때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기와 때를 알면,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그것은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하는데, 그때까지 제멋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이름을 올려놓고, 제 멋대로 살다가 재림의 때가 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으로 원위치 하겠다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세상을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바라보는 것이 됩니다. 곧 재림 전의 세상은 평안이 있고 안전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그때부터 평안과 안전이 사라지고, 심판의 환난이 시작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로 시기와 때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삶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 안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이지, 주 밖에서 내 멋대로 살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주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에 따른 결과가 아닙니다. 주 밖에서 살던 사람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주 안에 들어가서,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은 평소의 삶이, 재림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항상 세상을 보면서 세상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무엇이 재림을 믿는 성도의 삶인가를 물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기에, 지금 현재는 자신과 결별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성도에게, 세상은 평안한 곳도 아니고 안전한 곳도 아닙니다. 심판에 의해 멸망을 받을 곳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도, 이같은 종말론적인 삶, 재림 신앙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재림을, 자신의 생전에 경험할 수 있는 긴박한 일로 믿었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우리처럼 세상 것에 대해 강한 소유욕을 가질리는 없습니다.
재림이 이루어지면 세상의 모든 것은 심판을 받게 되고, 소유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든지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에 집착하고,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잊고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만 생각하기 때문에, 좀 더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구축하기 위해, 소유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고, 소유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내 것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을 나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와 함께하시는 분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소유를 믿는 것이고, 소유를 통해서 삶의 안정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기독교인의 행함을 근거로, 자신을 성도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만 빙빙 돌다가, 결국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끝날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렸던 열 처녀 가운데, 다섯 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나머지 다섯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같이 기다렸지만,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빨리 신랑을 맞이하고, 자기의 일을 하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혼인잔치에 들어간 다섯 처녀에게, 자신들을 위한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것만이 자기들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더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게는, 신랑이 언제 오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 오시든 맞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4-6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깨어 정신을 차려 사는 것이,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은 빛의 아들로 사는 것이고, 깨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밤에 속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허황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면 재림은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겠지만, 그들 역시 재림을 먼 훗날의 일로 밀쳐놓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을 세상에서의 자신의 일로 여긴다면, 그 또한 밤에 속한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7-8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 호심경이나 투구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전쟁장비입니다. 재림을 잊고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세상이 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더 강한 힘을 갖기 위한 길로만 나아갑니다.
하지만 재림을 믿는 성도는, 세상의 것이 결코 힘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돈이나 권력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힘은 될지 몰라도, 재림이 있고 심판이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삽니다.
그래서 힘을 가지기 위한, 자기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기 위한, 도구로 여길 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고, 장차 이루어질 것까지 아는 자의 삶이기 때문에 지혜라고 하고,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정신 차려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종말론적 의식입니다. 그리고 종말론적 의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왜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판의 때에,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음으로 주만 바라보면서, 구원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것이, 주 안에서 안전하고 평안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착각은 버리십시오. 9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고,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치 세상에 힘 되는 것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신 차려 깨어서 주의 날을 생각하며, 그 날에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주의 날을 잊지 않은 성도의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2. 성도의 삶과 성도다움(12-15)
성도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곧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간섭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그 일은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세상에 함께 계시는 것으로, 간주하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실에 선생님이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을 때의 학생들의 태도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생님이 계실 때는, 떠들고 놀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조용히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간섭하는 주체가 없고 눈치 보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눌려 있던 욕망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선생님이 계신 교실에 있는 학생처럼 삽니까? 아니면 선생님이 교실을 비우고 없는 상태의 학생처럼 자기 멋대로 삽니까?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만, 예수님이 떠나고 없는 세상으로는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떠나고 없는 세상으로 여긴다면, 비록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도, 세상에서의 삶은 선생님이 교실을 비운 것처럼, 자기 욕망대로 제 멋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도, 세상을 여전히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곳으로 여긴다면, 그 삶은 예수님이 없이 사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본문에 보면 사도는,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권하는 사람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또 14절에 보면, 게으른 자를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빛의 아들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사도가 말한, 빛의 아들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러한 삶을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을 따지기 전에, 그렇게 살고 싶은 열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이 같은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은, 이미 따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 우리가 계획하고 살고자 하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공통적인 것은 내 자신에게 득이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삶을 계획하고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하는 삶을 보십시오. 사도가 말한 대로 살면, 과연 여러분께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권하는 사람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는 것이, 여러분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14절과 15절에서 말씀하는 그 같은 삶을 모두 실천한다면. 기쁨과 행복이 여러분께 넘칠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산다고 해도, 그 같은 삶이 여러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가 말하는 삶에 대해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내게 보상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것을 감추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것을 남긴다고 해도, 그것은 종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없는데 열심히 장사를 한다고 해도, 주인에게 잘 보일 수도 없고, 또 많이 남긴다고 해도, 결국 모두 주인의 소유가 된다는 것 때문에, 주인이 준 것으로 장사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사해서 남긴 두 종은, 자신에게 돌아올 득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종의 위치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종의 위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뜻대로 사는 것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긴 것입니다. 이같은 사고방식의 성도만이, 본문의 삶에 깊은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어떤 득을 주느냐는 것은, 빛에 속한 빛의 아들다운 생각이 아닙니다. 성도는 종으로써, 오직 예수님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12-1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여러분께 주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것을 목사라고 한다면, 목사는 여러분께 어떤 존재입니까? 단지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성도는 말씀이 개입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께 목사가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로써,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말씀이 인도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 도움을 말씀으로 다스림 받고 권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을 목사가 하고 있다면, 성도에게 목사는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자신을 참된 복음의 말씀으로, 다스리고 권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목사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성도는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이 내려진 채, 예수 그리스도로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목사를 귀히 여기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로써, 진심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돈보다도 말씀이 필요한 세상임을, 알고 있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세상이 곧 어둠이고 밤이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실체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의 마지막도 안다는 것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의 길을 가게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말씀이 필요하고 소중할 뿐입니다. 그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게으르고 마음이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귀찮은 존재일 뿐,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을 권면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는 것도, 여러분께는 귀찮은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권면하고 권계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는, 힘 있는 사람을 사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타인의 힘을 이용해서, 인생의 득을 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이웃은, 자기 인생에 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게으르고 약하고 힘이 없는 자는, 권면하고 붙들어 주며, 오래 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에 속한 성도다움입니다.
15절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 역시도 성도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성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삶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행한 것은 악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갚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라면, 그에게서 나올 것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따라야 할 선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내어 놓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고 사랑이며, 오래 참으심입니다. 또한 게으르고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고 권하신 은총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남은 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주신 것을 내어 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것은 감추어 두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제멋대로 산다면,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며 살지만, 성도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뜻(A)(16-18)
사도는 박해를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데살로니가교회가 처한 형편과 상황을 무시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해와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형편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말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의 말에서 ‘항상, 쉬지 말고, 범사’라는 말을 삭제한다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적당히 형편에 따라,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항상, 쉬지 말고, 범사’라는 이 말이 걸림돌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없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라는 말은, 현재의 형편과 상황을 모두 초월하라는 뜻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는 형편에서도, 기뻐해야 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살다보면 수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기분 나쁜 일, 슬픈 일, 낙심이 되는 일, 분노하게 하는 일, 등등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들을 모두 초월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한 현대는 바쁘게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인데, 과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는 인간의 이러한 형편과 나약함을 몰라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사도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자신을 두고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사도로써, 인간의 죄가 무엇인가를 잘 알았고, 따라서 인간은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먼저 5:5절을 보면 사도는, 성도를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은 빛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빛의 아들로써, 어둠에 속한 자들과의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거룩입니다. 이처럼 구별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밤에 취해 밤에 자지 말고,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로써 세상에 취해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자기 인생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원하는 인생이 펼쳐지지 않으면, 슬퍼하고 낙심하고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을 물으시고 이뤄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속한 자와 낮에 속한 자가 신을 찾는 이유가 다릅니다. 밤에 속한 자는 자신의 뜻을 위해 신을 찾지만, 낮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에 세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의 구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내가 원하는, 행복과 축복으로 채워지도록 인도 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든 모든 일들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 집착하면서,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 신을 찾는다면, 본문의 사도의 말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원하는 인생을 위해 신을 찾지 말라는 말이, 귀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인생을 포기하거나 버리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뜻대로 된 인생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자리와 삶의 전부가, 여러분이 계획하고 원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인생을, 그대로 이루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을 다스리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수시로 방향이 틀어지면서 살아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뜻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인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성도의 인생에는 우연이 없고, 재수가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한 생각,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밤에 속한 자가 아니라, 낮에 속한 빛의 아들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둔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이뤄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복되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위해, 일하실 것인가에 대한 답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박해가 있고 환난이 있다고 해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믿음으로 인해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묵상해 보십시오. 힘든 일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재수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일까요? 만약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단지 ‘고생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선하신 뜻을 가지고, 우리를 간섭하시는 일인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가 여러분에게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중심에 자신을 세워둡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으면, 기쁨도 감사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려운 일이 없이 편히 살면, 기도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면 달라집니다. 비록 박해와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나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안다면,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구원이 내 뜻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 인생이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기를 소원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박해를 받고 있지만, 그 박해조차도 내 마음을 하나님께 두게 하시고, 세상에 대해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성도로 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박해와 어려움의 형편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지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만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려고 하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슬픈 일이 있는데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슬픔을 감추고 기뻐한 척 한다고 해서,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식이고 위선일 뿐입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퍼하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18절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곧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라고 하는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관심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뜻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박해와 환난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하고, 내가 겪는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고 낙심하는 것은 아닐까요?
박해와 환난에 처한 데살로니가교회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박해와 환난도,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되새긴다면, 박해와 환난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게 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구원은 우리와 무관한 하나님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될 자로 불려 나온 것이고,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물론 세상에 취해 있고,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시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소망하는 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때로는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그 간섭으로 인해서,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을 받은 사람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뜻(B)(19-22)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기쁨 대신에 근심과 걱정을, 감사 대신에 불만과 불평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도외시한 채, 단지 성도로서의 이상적인 삶을 언급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사도가 꿈꾼 성도의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도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혀있는 현실에서, 빌 4:6-7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권면을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하여, 다른 세계를 살았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살았던 다른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세계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이 세계에 있음을 믿었던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을,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에게는 매 맞고, 옥에 갇힌 것이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할 조건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이라고 여기는 조건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의 결과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이렇게 증거됩니다. 기뻐할 수 없는 형편에서 기뻐하게 되고, 감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 감사하게 되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성도의 특이한 믿음의 세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이 함께 하셔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하도록 일하신 덕분입니다.
19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일까요? 그것보다도 우리가 성령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성도에게 함께 하시고, 강력한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을, 우리의 뜻과 힘으로 소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도에게 임재하여 함께 하고 있는 성령을, 쫓아낸다거나 사라지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에 의해 쫓겨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조건을 초월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길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고, 병이 낫는 육신적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참된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곧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거나, 인간의 의지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참된 역사를 보지 않고, 육신에 유익이 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고통과 어려운 삶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있고, 그것이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순종하는 것은, 항상 그리고 범사에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봄으로써,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에 매어서 눈에 보이는 고통과 어려운 현실을 전부로 여기며, 근심 걱정과 함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때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할 수 없던 일들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그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는 육신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한 성도는 영과 육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 분별력으로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야 말로, 육에 해당되는 것이고, 나 같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 은총과 사랑으로 감사하는 것이 영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은, 성령이 오지 않고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한다면, 육신의 문제를 벗어나서는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육신의 문제를 벗어난다면, 남는 것은 영의 문제인데, 영혼의 문제로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병들면 낫기를 원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지만, 영혼이 병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영혼이 병들었다고 해도, 육신의 문제에 피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영의 문제는 소홀히 하고 육신에만 매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 역시 육신의 문제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주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합니다.
다만 내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혹 병이 들었다고 해도, 기도해서 낫는 체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육의 생각에 매어 사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육신의 일로 인해서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문제로 인한 기쁨을, 주의 사랑과 은총의 결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의 현장인 십자가에 있고, 육신의 병이 고침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고 말하는 것도, 육신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다고 합니다.
예언을 멸시한다면 그는 필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고 경외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예언을 멸시하는 것으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대하는 성도는,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 예수님의 오심, 하늘의 생명 등, 세상 일이 아닌 하늘의 일에 마음을 두게 되면, 세상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어떤 형편에 처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는 것이지, 육신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육신의 일과 연결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또한 육신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영과 육을 잘되게 하시는 분으로 말하면서, 구원과 세상에서의 복을 모두 누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심판도, 예수님의 오심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재림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입니다. 이 안목이 없다면 인간의 욕망의 시각으로,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하게 됩니다.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미혹되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더 좋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하와에게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는, 좋은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본 순간 하와에게 좋은 것은, 자신을 높여주고, 번성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가려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안에서 생각한다면, 마지막 심판 때, 우리를 건재내시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악은 하늘의 은총을 구하기보다는, 믿음이 없이 세상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언을 멸시한다면,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 예언을 멸시하지 않는 성도는, 땅의 것이 아닌 하늘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도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베풀어진 사랑과 은총에서 찾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5. 사도의 기원(23-28)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자기 인생과 자식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과연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지 예수 잘 믿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되느냐와는 상관없이, 오직 예수 안에서 잘된 인생, 예수 안에서 잘된 자식이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천국 간 나사로와 지옥 간 부자 중, 그 인생이 잘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나사로가 잘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거지로 비참하게 살았던, 세상에서의 인생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분명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잘된 인생길을 갔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누구도 거지로 산 인생을, 잘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잘 살아야지, 거지가 뭐냐?’는 조롱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란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세상의 시각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시각과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본문을 보면 사도는 서신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사도의 기도이고, 간절한 소망이며 기원입니다. 사도가 이러한 기원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성도에게는 최고의 복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안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 복이라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재물의 복을 주셔서,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게 하시고’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복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너희 교회를 부흥되게 하시고’라는 기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입만 열면 내 뱉는 기원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기원을 합니다. 거룩함과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전되는 것이, 사도의 기원이며 관심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원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말씀에 종속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보입니다. 또 수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말씀에 근거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해서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는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는, 끝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 바라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이고, 결국 원하는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를 받습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말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지고, 피가 제공하는 하늘의 복된 것보다는, 돈으로 이루어지고, 돈으로 사는 세상의 복된 인생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의 거룩함과, 주가 강림하실 때 흠없이 보전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도의 기원이 과연 우리의 마음에 간절함으로 다가옵니까? 사도의 기원은 분명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안되는 것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의 말에 대해서, ‘그게 세상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나’라고 반응한다면, 우리는 사도와는 다른 마음으로 다른 것을 바라보며,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와 형제의 관계를 우리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관계입니다.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느냐’가 교회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교회라는 관계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사도가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사도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승진하는 것이다’라고 하게 되면, 스스로 말씀 밖으로 멀리 도망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도는 성도를 세상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출세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심판이라는 끝이 있고, 주의 강림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이 백성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거룩과 흠없게 보전되는 것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에 의해 거룩된 자로 서게 되고, 주가 강림하셨을 때 흠없는 자로 보전되어, 주를 맞이하는 것이 사도에게는 최고의 복일뿐입니다. 사도와 같은 이 마음이, 오늘 우리를 장악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곧 평강이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평강이시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곧 평강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평강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평강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세상 문제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인해, 평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일까요?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악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악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 말처럼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도,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힘든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평강이 있는 성도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에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가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인간이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소위 삼분설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도는 인간을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기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헬라철학 사고입니다. 곧 헬라적 사고에서 영과 혼과 몸은 인간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도는 당시 헬라적 사고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간의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영과 혼과 몸을 언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존재가 파악될 뿐입니다. 만약 인간을 독립적 개체로 간주한다면, 아무리 분석해도 영과 육, 또는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는 영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오직 육을 위해서 산다면 그는 육일뿐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흠없이 보전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흠없이 보전된다는 것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성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긍휼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헛된 행실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헛된 행실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는, 깨끗하고 흠없는 자로 일컬음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흠없이 보전되기 원한다는 것은, 주가 강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지막 때 거룩한 자로, 흠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의 거룩과 주의 강림하실 때, 흠없는 자로 보전되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는 분명해 졌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이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께 세상에 속한 다른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항상 거룩한 성도로, 거룩한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흠없는 자로 서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인생의 중심이 되고, 전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