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저 분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공(李空)이라고 불러. 빈껍데기라는 뜻이지. 저분도 예수를 믿는데, 신약과 구약 성경만 읽는다고 해.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쓴 적이 없고, 풀 한 포기라도 살생은 절대 안한다더군. 원래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렇게 벌어놓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지. 자기 아내 순희를 누이로 부르면서 평생 범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다더군. 신사참배도 거부하고 산 속에 숨어 산다네." 이세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도무지 이 세상 사람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이현필은 화순 등광리에서 4년간(1928~1932) 이세종의 가르침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세종을 '천태산의 성자'라 불렀다. 많은 이들이 그의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얻으려 찾아왔다. 1932년엔 최흥종과 강순명이 찾아왔다. 최흥종은 이세종보다 한 살 아래로 당시 52세였다. 강순명은 최흥종의 사위로 34세였다. 이현필은 19세였다.
당시 나환자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최흥종은 광주나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듬해에 나환자 500여명을 이끌고 광주에서 서울 조선총독부까지 15일간 '나환자 구하기'행진(구라(救癩)행진)을 벌이게 된다. 강순명은 4년전인 1928년 '독신(獨身)전도단'을 만들었고, 1932년 고든 애비슨이 설립한 광주농업실수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세종의 천태산에 모인 그들은 창세기 1~3장의 에덴동산 주제의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이 자리에서 최흥종과 강순명은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의 출중함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이현필을 농업실수학교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도록 했고, 강순명의 독신전도단에서 일하도록 했다.
독신전도단은 1928년 7월에 설립된 단체다. 강순명은 이 당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해혼(解婚) 운동의 영향을 받아, 20여명으로 광주 독신(獨身)전도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광주내 기독교단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1934년 순천으로 본부를 옮긴다. 20대 초반이 된 이현필은 이 단체 속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순천으로 따라가지는 않았고, 광주의 재매(재뫼)교회(현재의 신안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3년간 교회 기독교 생활을 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면서 교회 일을 그만 두게된다.
이후 이현필은 서울로 갔다. YMCA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야간부 영어반 공부를 했다. 이 영어반에서 원경선(풀무원 설립자)을 만났다. 또 YMCA에서 현동완과 류영모를 만났다. 1936년에서 1938년까지 2년여간 20대 이현필은 40대의 류영모를 만나, 그 영적인 감화를 받았다.
이후 다시 광주로 내려가 결혼을 한다. 신부는 백영흠 목사의 처제 황홍윤이었다. 독신과 동정을 강조했던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을 벗어난 결행이었다. 1940년 아내가 임신했다. 그런데 자궁외 임신이었다. 아내의 목숨이 위험했으나, 선교사(존 프레스턴 주니어)의 도움으로 아내를 살렸다. 아이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7세 남편 이현필은, 24세 아내와 해혼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