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 2021. 9. 18
산행거리 : 16.4km
산행시간 : 8시 30분
예전 화왕산과 관룡, 구룡산을 넘으면서 바라 본 영취산과 병봉 등의 능선이 좋아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보던 중 이 번에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여름에 오르기에는 거리도 길고 너무 더워서 애를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덕사를 지나 영축산(영취산)과 변봉(병봉), 종암산, 그리고 함박산을 거쳐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이 되겠다.
영축산과 변봉은 얼마 전까지 영취산과 병봉으로 불렸는데 이번에 올라 보니 영축산과 변봉으로 정상석과 표지판이 바뀌어져 있었다.
보덕사까지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길가에는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이 줄지어 맞이해 주는 듯하다.
보덕사 가는 네거리에서 올려다 본 신선봉.
백일홍.
둥근잎유홍초.
메리골드.
아침 햇빛을 품에 가득 안은 코스모스도 가을 바람에 살랑살랑...
황매.
낮달맞이꽃.
보덕사.
보덕사를 잠깐 둘러보고 뒤에 있는 산신각 옆으로 열린 등로를 따라 올라간다.
초입부터 제법 가파른 등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곳곳에 나무계단도 있다.
조망이 열리는 곳에서 영산면 일대를 내려다 본다.
서리전문농공단지가 보이는 가운데 멀리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신선봉에 올랐다.
사방이 확 트이며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좌측 종암산에서 우측으로 가야할 능선이 함박산까지 늘어서 있다.
영축산과 뾰족한 변봉도 보이고,
영축산 좌측 뒤로는 석대산과 구현산, 그리고 그 뒤 멀리 화왕산과 우측으로 관룡산, 구룡산도 뚜렷하다.
영축산성의 흔적.
까실쑥부쟁이.
무성한 수풀에 가려 등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
646봉.
산박하.
마타리.
이어지는 암릉을 올라서면,
다시 멋진 조망처가 나타난다.
좌측 종암산과 우측 함박산, 그리고 가운데 구계저수지가 보인다.
589봉.
646봉.
벼랑 우측 밑에서 위로 4분의 1 지점에 암자터가 살짝 보인다.
영축산과 앞의 646봉.
소나무를 중간에 세우고 계단을 설치해 놓았네!
646봉은 올라가는 등로가 없는 줄 알고 우회하는데,
가다 보니 우측으로 희미한 길이 있다.
646봉으로 가는 등로인 것 같아 올라가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봉우리 위에서 돌아본 지나온 신선봉과 589봉.
영취산과,
이어지는 능선에 우뚝한 변봉.
미역취.
지나온 능선.
646봉 허리에 놓여 있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영축산 오름.
로프가 매여 있느나, 조심하면 잡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암릉 위로 펼쳐진 푸른 가을하늘과 옅게 떠있는 흰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이 암릉은 정상까지 이어진다.
영축산.
영취산은 원래 영축산이라 불렀는데 인도의 승려인 지공이 중국을 거쳐 고려말 보림사에서 법화경을 강독할 때 영축산의 산세를 보고 천축국의 영취산과 그 모습이 닮았다 하여 영취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 한 쪽에 영취산이라 표기된 옛날 정상석도 서 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영축산으로 정상석도 바뀌었다.
영축산(靈鷲山·681.5m)은 비록 높이에는 화왕산에 뒤질지라도 산세만큼은 화왕산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넘치는 바위산이다. 영축산은 화왕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영취산을 거쳐 종암산으로 가는 도중 서쪽으로 갈라진 능선에 자리 잡아 계성면과 영산면의 경계를 이룬다.
경남 양산의 명산으로 통도사를 품은 영축산과 이름이 같은데 한자로는 독수리 취 자라 영취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의 영축산에서 온 이름이라 이처럼 불린다.
화왕산에서 이어진 주 등산로에 있는 영취산(嶺鷲山)과는 한자가 다르다. 영축산 정상석 한쪽 면에는 한자가 표기돼 있고 반대쪽에는 한글로 영취산이라 새겨져 있다.
창녕군청 홈페이지에는 영축산으로 나오며, 산행 들머리의 사찰이나 이정표에도 모두 영축산으로 표기돼 있다.
정상 남쪽의 산성도 영축산성으로 불린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구봉사.
지나온 능선. 우측은 신선봉.
정상부의 암릉.
부근에서 휴식하고 있는 산객들에게서 막걸리 한 잔을 얻어먹었다.
그 시원함이란!
비만테스트 바위라는데...
뚱뚱한 사람은 좌측으로 돌아가면 된다.
좌측부터 화왕산, 그 뒤 멀리 비슬산, 관룡산, 구룡산, 열왕산, 우측 영취산.
씀바귀.
665봉.
변봉으로 오르는 암릉길.
한고비 올라서니 다시 암릉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는 암릉 위가 변봉 정상이다.
지나온 암릉구간.
변봉에는 정상석이 없고 이정목이 서 있었다.
현 지도에는 병풍 병(屛) 병봉이나, 조선지형도에는 辨峰(변봉)이다. 이정표에도 병봉에서 변봉으로 바뀌었다. 마치 고깔처럼 생겼다하여 고깔봉으로도 부른다.
여기서 한동안 쉬어 간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구계임도와 만난다.
구계임도.
바로 좌측에 630봉으로 오르는 급경사에 로프도 보인다.
가파르게 올라서면,
630봉.
부곡온천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착각하는 바람에 다시 올라와서 구계임도가 이어지는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대로 내려갔어도 되는데 말이다. 어차피 만나는 길인데...
다시 구계임도로 내려서서 보름고개까지 따라간다.
가야할 능선과 종암산.
보름고개에서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아까 그냥 내려섰으면 이 능선으로 바로 연결되는데...
푹신한 양탄자가 심술이 나는지 멧돼지란 놈이 걷어 버렸다.
다시 좌측 종암산 방향으로 간다.
이 위가 종암산 정상인데 좌측으로 우회하여 길을 내놓았다.
종암산 정상.
우측 바위위에 조그맣게 정상석이 보인다.
가야 할 함박산 방향을 바라보니 512봉(작약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종암산에서 한동안 고도를 낮추더니 405봉을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되고 땀을 흘리면서 올라가니 490봉, 그리고 철탑을 지나니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며 512봉을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듯하다.
512봉(작약산)오름길은 지겹도록 길게 이어져 지쳐가는 몸을 더욱 힘들게 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가니 힘들긴 하지만 어느새 작약산에 올라선다.
다음 봉우리가 함박산인데 오늘 올라야 할 마지막 봉우리이기도 하다.
작약산의 우리말 표기가 함박산이라는데, 그럼 다음 봉우리인 함박산은 또 어찌된 것인지 알송달송하다.
건너편으로는 지나온 신선봉과 665봉, 그리고 아래 구계저수지도 보인다.
이제 함박산만 오르면 오늘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으니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작약산에서 내려서서 함박산으로 오르는 길도 쉽지는 않으나 작약산 오름에 비하면 그야말로 양반이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약수사.
함박산 약수터.
본 약수터는 신라 경덕왕때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지역에 홀어머니와 효성이 지극한 나무꾼 아들이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오래도록 속병을 앓게 되어 아들은 어머니의 속병을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써봤으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고 몸이 점차 쇠약해져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어느 날 효자 아들은 땔감을 구하러 함박산에 와서 나무를 한 짐 해놓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손뼉을 치며 부르는 꿈을 꾸다 깨어 사방을 살펴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도 꿈이 이상해 꿈속에서 노인이 부르는 곳으로 가보니 바위틈 속에 함박꽃이 피어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흘러내려 목이 말라 그 물을 마셨더니 물맛이 좋고 속이 편안하여 점심을 싸왔던 꼬막단지에 물을 가득 담아와서 병든 어머니께 드렸더니 그 물을 마시고선 정신이 맑아지고 속이 편안하다고 하시자 효자인 아들은 매일같이 물을 떠다 드렸고, 그 물을 마신 후로 어머니의 속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 함박산 약수를 이용하게 되었으며 많은 환자가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중에까지 전해져 당시 불치병에 걸린 왕자가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병은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함박산 약수터 소식을 전해듣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이 지역에 머물면서 약수를 매일 마셨더니 왕자의 병이 완쾌 되었다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함박산 신령님께 기도를 드리고 밀양 표충사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함박산 약수는 마음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더욱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온다.
오랜 세월동안 약수터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으나 한국관광공사가 조사한 결과 전국 청정약수터 7선중 함박산 약수터가 첫 번째로 뽑혔으며 특히 영산 함박산 약수는 전국 약수터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수터로 유명하다.
마셔보니 역시 좋았다!
약수사 계단 밑에 예쁘게 피어 있는 꽃무릇 군락.
신선봉과 태자산(478.9m)
태자봉은 영축산 기슭에서 뻗어 나와 영산읍 쪽으로 쑤욱 내밀은 모양이 지사(地師)가 아니더라도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옛말에 '태자봉에 묘(墓)를 쓰면 비가 안 온다.'는 말이 있어서, 간혹 문제가 일어나고 난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산 사람들은 날씨가 좀 가물고 비가 안 와서 기다려지면, "또 어느 놈이 태자봉에 묘를 썼구만, 다른 곳에는 비가 다 왔는데 우리 영산만 가문단 말이야."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면 농민들은 태자봉을 샅샅이 뒤져 은장(隱葬)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수색은 번번이 헛됨이 없이 태자봉 어느 한 구석에라도 평장(平葬)의 해골 두 세구쯤을 파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여지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렇게 해서 태자봉을 영험 있는 명당으로 모시게 되었다.
태자봉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1995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때는 두 해 연달아 한발이 들었는데 영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웃 면 여러 동네에서 조직적인 방법으로 8월 16일을 기해 2만 군중이 참가했다. 태자봉에 지은 집을 헐고 은장을 모조리 뒤져 해골을 찾아내자 마자 남쪽 하늘에서 비가 묻어오는 것이다. 그러자 2만 군중은 환호를 올리고 춤을 추면서 일대 희우제전을 벌였다. 이 희우제는 사흘 동안이나 계속됐고, 찾아낸 은장(隱葬)의 해골들은 더러는 임자가 찾아가고 일부는 성내 동사(洞舍)에 몇 날 동안 달아매어져 백골곤욕(白骨困辱)을 면치 못하는 참상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후 10여 년 동안 법적 문제가 되어 많은 후유증을 남기기도 하였다
창녕 영산 석빙고.
석빙고는 봄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로,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 내 저장하였다. 석빙고를 만들 때는 땅을 판 다음 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앞을 높이고 뒤를 낮게 하여 경사를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천장은 기다란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돌을 맞추어 지붕을 얹고 구멍을 냈다.
석빙고 얼음은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경상도 지역에 있는데 전부 조선시대에 만든 것들이다.
보물 제1739호인 창녕 영산 석빙고는 영산면 동쪽 함박산 자락에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원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내려와서 돌아 본 함박산.
산행거리 16.4km, 8시간 30분 걸렸다.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오르내림이 심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진촬영에 많은 시간을 소요한 탓도 있지만 말이다.
거리에 비해 힘은 꽤 들었지만 암릉들과 멋진 조망, 그리고 때때로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 바람은 산행을 즐기기엔 멋진 하루를 선사해 주었다.
게다가 호젓하게 진행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고!
씻을 곳이 없다는 점이 한 가닥 아쉬움으로 남지만, 멋진 산행을 마친 것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한다.
첫댓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만한 코스는 아닌 듯 한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