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의 시인
박제천(朴提千)
글 김광한
대체로 시인들의 나이든 얼굴은 그가 쓴 수많은 시 가운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과 흡사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시인이 바로 박제천이다.필자와는 젊은 시절에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라서 지금 보면 얼른 알아볼 수가 없겟지만 그가 장자에 대한 장시를 오래 동안 썼다는데서 오는 이미지가 아무래도 장자와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원전 4세기 경에 태어난 장자의 얼굴을 내가 보았을리 없지만 그의 도가(道家)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입각해서 추리해본 얼굴은 마치 외계에서 온듯한 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장자의 전 생애적 삶이 그랫듯이 박시인의 얼굴 역시 세상의 근심 걱정을 초월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한길로 휘적휘적 지나가는 나그네의 그런 자유스런 얼굴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필자가 생각하는 장자와 비슷하게 닮은 얼굴이란
눈은 허공을 보고
생각은 다른데 있으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 허허 웃으면서
자기 길을 가는 도사와 같은 얼굴
그러나 처음에는 비난하던 사람들이
한참 생각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진리로 가득찬
우주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래서 외계에서 온 방관자같은 얼굴이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박시인에 대한 그의 시의 감상글을 쓰게 됐다는 인연이 그저 가상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박시인을 평가하고 소개한 글에서 따다가 짜집기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같다.
그는 젊은 시절 장자(莊子)와 한비자(韓非子)에 많은 시간을 뺏긴적이 있고 중국의 정신사에서 상반이 되는 두 인물 가운데 장자를 택해 그에 대한 장시(長詩)를 쓴 것은 그의 인생관을 형성하는데까지의 치열한 시작업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비록 장자와 연관되어있지 않은 현대시를 발표했어도 그 시의 흐름의 원조는 장자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의 시를 읽어본 많은 독자들의 평이다.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그의 장자시는 아래와 같이 요약이 된다.
…장자시는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현대시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쉬르에 가까운 표현기법을 주로 하여 매편마다 독립된 한 편으로서의 통일과 조화에 흐트러짐이 없다.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들이 신선하고, 쌓아 올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봐리에떼도 다양하다. 상상의 세계로 터무니없이 비약하지 않고, 필연적인 확대와 비약을 하고 있다. 감각과 상상과 언어구사, 이 세 가지가 모두 든든한 바탕 위에 자리하고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잃지 않고 하나의 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박제천의 시는 구문이 정확하고 메타포에 의한 이미지들이 刻明하여 그 전달성이 강하다. 불투명한 이미지, 그것을 은폐하려는 구문의 不具性, 이런 것으로 현대시의 난해성에 편승하려는 사이비 시와 대조해보면 박제천의 시가 지니고 있는 安定性과 堅固性이 이해될 것이다.
또한 『장자시』에는 거대한 동양사상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그의 여러 시집이 보여주듯 우리 민족사와 민족정신을 관통하는 동양사상이 그의 시 속에서는 자유로운 정신과 상상력으로 바뀌어 현란하기 그지없는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시인의 술회에 의하면 장자시 연작의 초고는 군 입대 시절에 마련되었다 하니 호적의 출생연도와 대조하면 스물 한두 살 무렵의 작품인 셈이다. 불과 20대 초엽의 젊은 나이에 그토록 깊고 유장한 정신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숙명과도 같았던 문학과의 맞닥뜨림을 박제천 시인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그가 처음 문학과의 조우를 한 것은 전쟁이 휴전을 맞이한 그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된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어야 할 것같다.그는 자신의 문학 입문에 대한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가금식 지우들에게 털어놨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50년대에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전쟁 뒤의 황폐함으로 가족들은 하나같이 먹고 산다는 문제에 매달렸고, 아니면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철저하게 혼자만의 자유를 즐겼다. 버려짐에 길들여지고나면 버려짐에서 오는 슬픔이나 쓸쓸함, 외로움 따위의 감정은 오히려 사치스럽다. 나는 거리의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청계천 5가에서 동대문에 이르른 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헌 책방들에 눈길이 끌렸다. 나는 그 책들을 뒤적이면서, 거기 찍혀 있는 이름모를 사람들의 장서인이나 헌정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책들의 내용은 나에게 벅찬 것이었다. 한자가 너무 많거나, 몽땅 한자로만 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이 일본어 책이었다.
나는 고급한 책들을 뒤적이다 싫증이 나면 만화를 취급하는 대본집으로 옮겨가 여늬 아이들처럼 만화를 읽었다. 그러다 만화책 사이에서 처음으로 좋은 책을 만났다. 그것은 이광수의 소설책으로 이순신 장군에 관한 것이었다. 꽤 두툼한 책이었지만 책방이 문닫는 시간까지 다 읽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이 내 앞에 나타난 또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 나는 책의 세계라는 길고 긴 여행길에 접어들었다. 남독형 독서에 빠져 대본집의 꽂혀 있던 1,2백권의 책을 독파하면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을 사 모으는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어느덧 책을 분별하는 시력이 길러지게 되어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무렵 나는 내 생애에 있어 잊을 수 없는 두권의 책과 만났다. 그것은 아마 15,6세 때로 『장자』와 『한비자』였다. 한자와 일본어 번역판으로 된 그 책들은 한문 공부를 따로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장님 파밭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일본어 번역판에 의지해 한두 줄씩 읽어내려갔다. 나는 마치 불가해한 비밀결사의 주인공처럼 남몰래 그것을 읽고 또 읽어나갔다. 그러나 이삼 년이 지난 다음 우리말 번역책을 대하고 원뜻과는 달리 오독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한동안 뻔뻔스럽게도 내 나름의 책읽기가 더 정확했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내 자신의 상상력으로 뛰어넘었는데, 그러한 내 독법을 ‘상상력 읽기’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박제천의 자서>
그는 그 시대 문학도가 그랬듯이 수많은 책들을 섭렵했다. 문학책을 비롯한 하다못해 만화까지 탐독을 햇다. 번역이 미흡한 세계문학전집을 자증스럽게 읽다가 문득 동양 사상, 노장과 주역, 주자로 상징이 되는 동양사상과의 연결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중국의 기원전 2세기, 진시황으로 대변되는 통일 중국에서 태어난 한비(韓非)이다. 한비자는 법가(法家)학자로 제후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쓴 한바자로 유명한 인물이다.한비는 나라가 융성하려면 백성의 고통은 희생되어야한다는 다소 권위주의적인 학설을 내세웠고 그의 학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린 진시황이 그를 초대했으나 그를 시기한 이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제 꼬에 제가 넘어간 인물이기도 하다.
한바자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주된 것은 아래와 같다.
国无常强,无常弱
(나라는 항상 강하다는 법이 없고 항상 약하다는 법도 없다)
能去私曲就公法者,民安而国治;能去私行行公法者,则兵强而敌弱
(사리사욕을 버리고 법도대로 한다면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며
개인적인 행위를 버리고 법도대로 한다면 자기의 군사는 강해지고 적은 약해진다.)
爱臣太亲,必危其身;人臣太贵,必易主位;主妾无等,必危嫡子;兄弟不服,必危社稷
신하를 너무 가까이하면 임금의 몸이 위태롭게 되고
신하가 너무 권위를 가지면 임금의 자리가 바뀌게 되고
처첩의 등급이 사라지면 적자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형제가 서로 다투게 되면 사직이 위태로워 진다.
박제천은 한비자와 장자를 비교해보니 아무래도 장자의 자연주의적이고 무위한 사상이 와닿아서 장자에 대한 시와 삶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장자는 역사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사상을 따랐으며 가장 인간작이고 무엇에도 거칠게 없다는 그의 생각과 맞아 떨어지고 그의 시를 쓴다면 오래동안 세인의 뇌리에 박혀있을 것이란 것이다.
한바지가 군주를 위한 내용이라면 장자는 한 인간을 위한 삶의 달성이란 점에서 크게 다른 것이다.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면서 한낮에 꾼꿈에서 나비가 되어날아가다가 문득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내가 아닌가 하는 호접몽 등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행적을 했으나 그 행적이 훗날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햇던 것이다. 박제천은 장자에 대해 현대적인 시법을 동원해서 이를 지어냈던 것이다. 그것도 장자보다 더 먾이 쓴 것이다.
<莊子詩>
* 그 일곱
물고기의淸新한몸뚱아리를오려내는가위
비늘을터는에스쁘리
금을그어滿月을도려내는콤파스
망사로거는달빛
비타민甁에서숨쉬는日光을촬영하네
바다에서떠오르는붉은해
舊式의내사진기안에서춤추는피사체
壁에는中國의關雲長靑龍刀
번뜩이는칼날끝에바다가몸져앓고있네.
* 그 여덟
꿈의委囑에매여벌거벗은겨울의아이들은비둘기
비둘기의나래에묻혀하늘은色彩를뒤집어쓰네
겨울의아이들은油印된꿈의말저바다의하나섬이네
龍의구름을지즐타고겨울의아이들은눈멀리
中央亞細亞의바람실은저바다의깨어있는섬이네
기러기길을쓸어가는물결이네
별들이하나씩떨어져불붙을때저바다의살아있는섬
겨울의아이들은어둠의주름주름에서스스로의發見으로
번뜩이는燈아래내가풀어놓은꿈의말
바닷물을밀어내는저희彈力으로부딪치고부딪치다가
泡沫로부딪쳐부딪치고있네.
* 그 아홉
全身의精氣로싸우네
손바람에무너지는心臟무너지는房무너지는生涯
한盞의茶를마시고빈盞에쓸어넣는考案의꿈
幽閉에지치지않고칼끝으로壁을저미며
靈感의칼끝으로腦를깨우며
뱃속의精氣만으로中國術士와決鬪를하네
아얏!얏!氣合도늠름하게무너진房을거듭세우네.
그런가 하면 1천여편의 현대시를 써서 그 생애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그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대저 시란 잘 먹고 잘 살고 아무런 걱정이 없을 때 나오는 물건(?)이 아닌 이상 살아가면서 부딪친 많은 시련과 화나는 일들이 평생동안 그의 주위를 맴돌았을 것이란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막걸리 한잔 놓고 허허 웃으면서 지낸 그 많은 세월,
이제 박제천 시인의 얼굴도 나이의 숫자만큼 주름이 잡혔고
허공을 향한 그의 공허한 눈망울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꾸짖음으로 다가오는 것같다.
끝으로 그의 면모를 잘 알려주는 시 두편을 올려본다.
*혼자 두는 바둑
박제천
물 속에 바둑판을 벌여놓았다
백년 물길에 모가 깎이고 선이 닳은
흰 차돌 검은 차돌을 바둑알로 썼다
혼자 두는 바둑
오궁도화에 젊은 날의 꿈을 몰아넣고
이리저리 끌고 온 고단한 대마를
다시 어디로 데려갈까
달빛이 찌를 건드려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바둑판에서 떨고 있는 나머지 삶을
푸른 모기장으로 가려놓은 채
한밤내
단내나는 살을 모기들에게 내준 채
물 속 깊이 진땀을 흘리는
저 모래밭 너머
사막의 시간을 터덕터덕 걷고 있었다
바둑판의 어둠 속에서
붉은 차돌 하나 해처럼 떠오를 때까지.
*비천(飛天)
비천/박제천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이 슬픔
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이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
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램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
었다 구름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
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
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내 몸 속의 피와
눈물을 말렸고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 산과 강의
구석구석에 묻어 두었고 불의 넋 물의 흐름으로만 남아
땅속에 묻힌 하늘의 소리 하늘로 올라간 땅 속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떠돌음이여 그러나 나를 하늘도 바다고 어둠도 그 무
엇도 될 수 없게 하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묶어두는 이 기묘한 넋의 힘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게
하는 이 소리의 울림이여.
1945년 출생, 동국대 졸업
출생 : 1945년 3월 23일
직업 : 시인
학력 : 동국대학교
수상 : 1987년 월탄문학상 수상
1983년 녹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