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 누리는 자유. 愛するために得た自由。( 2024년 12월 1일 주일예배)
https://youtu.be/4BGNFQlwlLk
본문 갈 5:13~15
갈 5: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3.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自由を得るために召し出されたのです。ただ、この自由を、肉に罪を犯させる機会とせずに、愛によって互いに仕えなさい。14.律法全体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一句によって全うされるからです。15. だが、互いにかみ合い、共食いしているのなら、互いに滅ぼされ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
지난 주일에는 율법과 상식의 가치관에 휘둘려 자신의 존재의미와 그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는 고생과 수고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신 복음의 능력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로 천국과 영생의 값어치를 품은 존재임을 잊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세계관과 상식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값을 헤아리지 않는 권세를 누리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자유와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지난 주일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전에는 우리에게 주신 자유에 관한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그 때 성경적인 자유는 자기 육신의 욕망과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하는 자유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오히려 죄를 거부할 자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의 자유가 죄를 짓지 않을 자유일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을 “선을 행할 자유”라고 바꿔서 표현하고 싶은데요. 그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것도 바로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지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란 진리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즉 복음을 믿으며 선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역할 기회를 주시려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권능과 축복을 부으시기 때문이지요. 그 순종으로 받을 축복을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내가 원하는 것과 내 기분에 내키는 것, 그리고 내 감정이나 본능에 충실한 자유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분과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자유는 우리는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 욕구충족의 자유가 맺는 열매는 다음 주일에 나눌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누릴 자유를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할 권리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세속의 상식이나 시대의 가치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자유를 오용, 남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오직 육신의 감정적인 영역으로 축소하는 것은 이 세속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가진 착각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의 이기적이고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유라고 주장하며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넘치는 사랑에 관한 노래와 문학들, 그리고 이야기들은 대체로 그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실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충만하게 하고, 풍요하게 하는 것을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속된 감정의 사랑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예전에(노아 시대에...) 종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약속인 복음은 어불성설이지요. 도무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서로를 섬긴다는 것은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인데요. 그렇다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억지로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섬기는 사랑은 감정과 기분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어느 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최고의 율법에 관해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그리고 이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복음이지요. 그러니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을 믿는 것이고, 자신도 마찬가지 그 사랑으로 순종하고 응답하는 것이 믿는 자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억지로, 혹은 강압과 두려움, 그리고 율법과 같은 법률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는 자세와 태도로 그 선하고 축복된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라고 하시거나,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은 단지 상대에 대한 감정과 기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완성하시기까지 순종하신 사랑은 우리의 존재가치와 존엄(하나님의 형상, 거룩한 존재)을 회복하고, 지켜 주시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감정과 기분까지도 다해 섬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먼저 나의 존재가치와 존엄, 다시 말해 자기다움인 사람다움과 아름다움, 행복과 사랑의 축복을 채우신 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반응의 외적인 형식이 곧 예배와 신앙생활이지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또 다른 모습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으로 나의 가치를 회복하고, 지켜 주신 것처럼 나도 이웃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그 영적인 값어치를 회복하고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 섬기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이지요. 그러니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라는 말씀은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존엄하고 자존감이 있는 이웃과 형제, 자매로 회복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하고 행동으로도 섬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의 기분과 감정을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는 나의 존재가치를 회복시켜 주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영생의 가치가 있는 것을 믿고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과 형제, 자매와 혹은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인연과 만남들이 그런 가치와 존엄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렇게 섬기라는 것이지요. 혹 아직 그런 가치와 존엄성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그 진리를 전하는 것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서로의 가치를 회복하고, 인정하고, 확인하고, 드러내고 지켜 주기 위한 태도와 자세, 그리고 행동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친절한 모습과 서로의 기분과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사랑한다고 할 때는... 상대를 감정적으로, 혹은 기분에 맞춰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감정과 기분을 소비하는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의 행위나 방종의 자세를 버리고, 오직 자기의 사람됨과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서로의 사람됨과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섬기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도 부르는 절기의 첫 주일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기다리는 네 번의 주일로 구성된 기간입니다. 교회력에서는 대림절을 새로운 한 해를 출발하는 절기로 삼고 있습니다. 세속의 대부분 사람이 연말연시를 맞이하며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고민하고 열중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사랑을 위해 아기로 태어나십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버리시고, 나약하고 누추한 인간의 몸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고, 또한 그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 반응하는 것은 구원받은 피조물로서의 의무이지만, 자유이기도 합니다. 자원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동행함으로 이 사랑을 믿고, 자원하여 섬기며 사랑하는 자유의 축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