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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 국상 복제에 변방은 상사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에게 국상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에서 남도 병사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에서 유방(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에 정원루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하였다. 이해가 만력 기사년 봄이다. 수십 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으로 있다가, 부교리와 부응교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이 한림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
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 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나라의 시강 범조우의 자이다. 정이천(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
고 칭찬하였고, 소동파(소식)는
“그는 강사의 삼매를 얻었다.”
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로 전한에 임명하였으니, 관원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나라 참정 채제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 즉위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 좌랑 한지원, 전적 박민헌, 수찬 윤결,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나라 승상 노공 문언박은 자기 고향인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 정향, 조의대부 사마단과 사봉 낭중 석여언과 더불어 동갑회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하였다. 노공의 향년은 92세였고, 정향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계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ㆍ정인지ㆍ최항ㆍ김안로)ㆍ정사룡ㆍ정유길ㆍ박순ㆍ노수신ㆍ이이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과 이행,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간에 도를 전하는 것을 의발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를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와 도승지 이희검은 선온(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 이준은 교서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 좌참찬 원혼, 여성군 송인, 판윤 강섬, 형조 참판 박대립, 우윤 김계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홍섬)의 대부인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 홍언필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였다. 노의정(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 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외종제)로, 기문과 배율시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도 수집하여 시첩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 홍상공(홍섬)의 궤장연 때에 지은 소재 노상공(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 받고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은 옛날에 대청과 남루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 임당ㆍ정유길과 낙촌 박충원, 국간 윤현, 동원 김귀영,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이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들이 또 새 집을 남루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을 베푸니 나와 지사 임열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ㆍ이항복, 그리고 봉교 이호민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양신ㆍ상심ㆍ미경ㆍ낙사)와 이난(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이 서로 수창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과 두 이공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