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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北朝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호칭) 북조 연대 기원전 111년에서 서기 939년까지
북조는 고대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호칭이다.봉건시대에 남베트남은 '자신'으로 간주되었다."원푸잉( 嘉福英) 정권이 가경(嘉慶) 황제에게 국호를 요청할 때도 맨 먼저 '남베트남(南越)'을 요구했다.그러나 조타, 결국 북'사람',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는 더욱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컷, 너구리의 아들, 경양의 손, 정도(定都)를 문랑이라 하며, 18대가 모두 수왕이라 한다'고 한다.
중문명 북조 연대 기원전 111년에서 서기 939년까지
2 남북조의 마음가짐
2010년 베트남, 하노이 천도 축하 드라마 '이공온-'-승룡성에 이르는 길.결국 이 드라마는 막판에 베트남 당국에 의해 방송 금지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 너무 과하다'는 것이었다.화(化)다. 리궁윈(李公蕴베트남 리나라를 세운 자)의 시대 베트남 통치자들은 아마도 화(華)화(華)화(化)가 미움받을 뿐 조급하게 '중국'과 선을 긋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베트남의 주체민족은 자칭 '경족(Kinh)', 즉 경기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사람, 그러나 베트남 북부의 소수민족들은 전통적으로 경족을 '교(交)인'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달력에서 유래하였다.역사 속의 교지(阯).최초의 교지는 남령 이남을 가리킨다.진말 난리 중에 하북 정인 조타가 영남을 할거하면서 한 세기에 가까운 남베트남이 계속됐다.
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에 대한 심리상태가 매우 모순적이어서, 봉건시대에 남베트남을 베트남으로 간주하였다.자신의 정권, 심지어 응우옌푸잉이 가칭 황제에게 국호를 구할 때도 맨 먼저 '남베트남'을 요구했다.그러나 조타, 결국 북'사람',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는 더욱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컷, 너구리의 아들, 경양의 손, 정도(定都)를 문랑이라 하며, 18대가 모두 수왕이라 한다'고 한다.현대 베트남의 역사 교과서에서 수컷은 베트남의 시조가 됐고, 조타와 남베트남은 음흉한 북방 침략자가 됐다.
남베트남 문제행새금인
남베트남 문제행새금인
이러한 변화는, 조선반도에서 단군을 존경하고 기자를 버린 것과 같이, 자연히 민족주로부터 더 많이 나왔다.진실이 아닌 역사도 의고량(義考量)이다.기원전 111년, 한군은 3번 기병하여, 남베트남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에 설치하였다.7군, 그 중에서도 교지(치재룡편금하내동북), 구진(치재서포금청화), 일남(치재서권금광치) 3군은 오늘날 베트남에 있다.
중원정권 첫 공식행정구명 된 베트남 역사도 진입군현 시기(기원전 111년~기원전 939년베트남은 '북속시대'라고 한다).중원 문화는 이 시기에 있다기원은 베트남, 베트남 봉건시대의 정사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서 "우리나라 통시서(通詩書), 시례악(習禮樂)은 문헌의 나라, 자사의 왕시(自士王時)"라고 솔직하게 고백했는데, 그 중 '사왕(士王)'은 한말 3국 시대의 교주태수(交州太守), 본적산동(本籍山東)의 사섭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한문화가 뿌리내린 것과 달리 중원정권은 교지3군에 대한 통치를 하고 있다.끝까지 공고히 하지 못하였는데, 중원 왕조가 그곳에 파견한 관리들은 죄 많은 폄하관료들이어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사섭과 같이 실답다.봉모린각(鳳毛麟角)이었다. 그래서 교지지구(交 。地區)의 호족(富族)의 반란(反亂)이 잇따랐고,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위안핑(馬援平)의 '이정봉기'와 양조대장 천패선(陳霸先, 훗날 진나라 창건자)이 진압한 이분봉기(李 。 。)가 그 중 큰 규모였다.당대에 이르러 교지를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치고, 관할은 군현(軍縣)이었지만 '도호부(都護府)'라는 명칭은 서로 다른 것을 암시했다.
복파장군마원
복파장군마원
9세기 중반, 남조(지금의 윈난에서) 두 차례 출병하여 교주를 점령하였다.사람이 재미없다고 말했다.남조(南條) 방어를 위해 차출된 주둔군의 분란에 의한 방훈봉기는 마침내 전복된 것으로 판명되었다당(唐)제국은 불씨를 키웠고, 베트남 본토의 의식은 대당제국에 대한 실망에서 싹텄다.
당 선종 때 이미 누군가가 '자안남사시'를 지었다.3, 4년 계속되다 보니 교지욕도 생겼다"고 말했다.당말에는 중주가 혼란하여, 아난에 대한 통제가 이미 길어지고, 지방의 호족들을 거느릴 수 없게 되었다.이 틈을 타 오권은 939년 백도강 전투에서 남한군을 격파했다.
비록 오권이 죽은 후 아난은 다시 사분오열 상태에 빠졌지만, 정부령은 마침내 968년에 전진을 할 수 있었다.십이사군(十二使君)을 평정하고, 정조(丁朝, 968-980)를 세웠으며, 국호(國號)인 '대구월국(大越越國)'(후개(後改)' 대월(大越)국'과 '구'는 또한 '大'해(解)'로 되어 있는데, 중국어와 본족어가 같은 의미로 겹친다.대한민국의 한(韓)이자 대(大)의 의미는 이와 유사하다)는 말은 베트남 자주정권의 시작이었다.이후 송나라가 안남을 열번으로 인정하고 정부를 '교지군왕'으로 책봉하였고, 1174년에는 남송조정이 정식으로 '안남왕'을 책봉하여 명목상의 군현의 지위마저 포기하면서 변요는 이웃으로 변하였다.나라.
남북조 시대의 심리상
변번으로 자립한 오코시 국은 중원 왕조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전방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중국의 문화, 경제, 정치 제도를 이식하였다.이조(1010-1225)의 관제 분문무양반, 각각 9품, 지방에는 지부, 판부, 지주가 있고, 중앙에는 태사, 태부, 태위, 태보의 중직이 있다.이조 초창기부터 문묘를 건립하여 공자와 주공, 당송을 스승으로 모시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고, 문장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으며, 한음 또한 월어로 스며들어 당대 중엽 이후의 중국어 음을 반영하는 한월음을 형성하여, 모든 한자에 대응되는 한월음 염독법을 갖추어 한월음으로 불경을 읽는 전통이 있었다.당대의 베트남 승려들 사이에서 유지되었다.
중원과 다름없는 하노이 문묘
중원과 다름없는 하노이 문묘
'대월'의 통치자가 보기에, 자신은 중국('북조')과 '화하(華夏)'에 속한다."크고 작은 나라, 종속 관계는 없다.《대월사기전서》는 개문의로 "대월오령의 남쪽에 있노니,하늘은 남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 시조는 신농씨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천계진주라그래서 북조 각제와 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광서와 도성 옹주(현 남녕)에 군대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송군과 싸운 이조대장 이상걸(1018-1105)은 베트남에서 유명한 시로 '남국산 허난제(河南帝)'를 지었다.'거'는 전후 월남(越南) 당시 송나라 포로들을 귀환시킬 때 20세 이상 포로들의 몸에 '남조(南朝남조) 던지기'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이때 베트남은 이미 자신의 공식 국호인 '대월(大越)'이 있었으나, 이상걸의 시구나 포로의 자자(字字)를 '대월(大越)'이라 칭하지 않고, 중국 고대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와 유사하게 양국 관계를 보는 것은, 실질적으로 쌍방의 평등과 병립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같은 화하문(華夏文)에 속한다.분명한 의미.
13세기에 대월국은 전후로 조대가 바뀌면서 몽원과 침략을 겪었다.1225년 진수도 찬이(陳守度)가 진나라(陳朝, 1225~1400)를 세웠다.진나라가 건국된 후 곧 몽고 철기 세 대를 조우차침(1258년, 1285년, 1288년)대월국의 민족의식은 전쟁의 참화를 딛고 항전을 주도한 흥도대왕 진국준(陳國俊)이 "선단신수(先 。臣首) 다음에 항복한다"며 격장병문( 。將兵文)에서 "몽가르는 불구대천의 적"이라고 호통을 쳤고, 일반 병사들도 '고구 죽이기'를 팔에 찌르며 결사불사를 다짐하고 있다.주목할 점은 바로 《격장병문》에 있다는 것이다.베트남이 중국을 지칭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왔다("중국의 장수를 섬기는데 분함이 없다.”)。
1400년 외척 호기가 찬조( 篡 。)하여 자립하여 호조(胡朝)를 세우고 국호를 '대우(大虞)'로 바꾸었다.찬진 사체는 명나라에 전해졌고, 명성조는 흥멸계절(興亡)을 결정하였다."갑자기 호정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영락 5년, 명군은 무사히 호지호를 붙잡아 아난의 땅을 교지포정사(省)로 중건했다.
그러나 정나라 이래로, 안남이 자립한 지 400여 년이 되었으며, 게다가 월나라 사적까지 명나라에까지 언급하였다.관료들의 '중과후렴(重科厚 敛 敛)'에 안남인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먼저 진나라와 종실에서 잇따라 출병하였다. (후진나라, 1407-1413년, 릴리는 난산에서 봉기를 들고(1418년), 의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정적(북을 지칭)이 권세를 부리는 날, 그리고 수년 후 동관(현재의 강내) 등 몇 개의 고립된 거점에 국한되어 있었다.
명나라 선종이 즉위하자, 한편으로는 이미 안남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파견하여 안남을 구원하였다.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에서 떳떳하게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의도다.결과도 뜻대로 안 돼 "두 갈래 구병, 발꿈치도 안 가린다.그리고 모두 패했고, 각 도시 궁구(궁구)들도 서로 싸우고 항복했다"며 결국 아난(1428년)을 포기하고 리리 중건을 승인했다.려리의 책사인 응우옌자오 해수는 명편 '평오대고(平吳大诰)'를 써서 그 공로를 밝혔다.이 천오백자의 웅문의 첫 문장은 바로 "나만 대월지국, 사실은 문헌의 나라이다.산천의 봉역은 다르지만 남북의 풍속도 다르다.조·정·이·진지로부터우리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한·당·송·원과 각제 쪽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베트남 통치자를 남북으로 조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음가짐이 남김없이 그려졌다.
명나라 관복을 입은 응우옌티에 상
명나라 관복을 입은 응우옌티에 상
후여조(後麗朝)는 여성종(麗聖宗) 시대(1460~1497년)에 극성하였으나, 1로 접어들었다.6세기에 성쇠해 1528년 이후엔 두 차례 남북조가 탄생했다.먼저 북방을 점령하지 마라1592년 모조가 월북(越北) 고평(高平) 일우(一右)로 쫓겨난 뒤 '중흥(中興)'으로 불렸던 후리(後麗)조가 다시 남북으로 나뉘고, 북방 정송(鄭松)이 '하늘을 겨누어 제후를 명령하다'는 말과 맞먹는 대월(大越)국 원주(溫主)라고 하면서 중일 사적(史籍)을 광남국(廣南國)이라고 했다.1627~1672년 7번 싸워 3배나 많은 인구를 가진 정주(鄭主)는 완주를 없애지 못했다.마지막에는 닝장(永江, 북위 17도 선에 매우 가까운 곳)을 경계로 난웬(南阮)과 북정(北鄭)이 맞섰다.이백여 년의 국면이 계속되다.
서기 1802년, 응우옌주(阮主)의 후예 응우옌푸잉(阮福英) 평정서산봉기)2) 전국을 통일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조(阮朝)를 세운 오늘의 '베트남'은 베이징에서 구해 왔다.정식 국호. 그러나 완나라 황제는 국내에서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이 '대남(大南)'이었고, '대남(大南)'은 '북조(北朝)'와 대등한 자세로 '대남천자의 새'를 만들었다.
극성기의 응우옌 왕조 강역
극성기의 응우옌 왕조 강역
베트남의 역대 왕조와 마찬가지로, 이 정권은 명목상으로는 종번 체계를 받아들여서 청정에 칭하였다.신, 그러나 국내에서는 황제라 불릴 정도로 분에 넘치고 있다.
당시 베트남의 명유 판후이 주석은 북쪽의 청나라가 명나라 판까지 계승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정도였다그림, 그러나 그 의관문명을 답습하지는 않았다.철저히 부정되었다.
응우옌 왕조 관복
응우옌 왕조 관복
세월이 흘러 '중화'라는 명분에 그토록 집착했던 베트남이, 오늘 텔레비전 한 편 연거푸드라마도 급기야 중국과 선을 긋기에 급급해 극에서 극으로 치닫고 있다[1].
北朝 (越南对中国的称呼)
北朝是古代越南对中国的称呼。在封建时代,南越被看做越南“自己”的政权,就连阮福映向嘉庆皇帝求取国号时最初要的也是“南越”。但赵佗终究是“北人”,于是越南的历史被追溯到了更为久远的时代,“雄王,貉龙之子,泾阳之孙,定都曰文郎,相传十八世皆称雄王”。
中文名北朝 年 代公元前111年至公元939年
目录
1 边徼变成邻国
2 南北朝的心态
边徼变成邻国
2010年的时候,越南庆祝迁都河内拍摄了一部电视剧《李公蕴——到升龙城之路》。结果这部电视剧在最后时刻被越南当局禁播,理由是太过“中国化”。这实在是有些令人啼笑皆非的借口,因为在李公蕴(越南李朝的建立者)的那个时代,越南统治者大概只会是“华”化犹嫌不足,而不会急急与“中国”划清界限的。
现代越南的主体民族自称“京族(Kinh)”,意即住在京畿里的人,但越南北部少数民族传统上都称呼京族为“交(Keo)人”,这个名称来自历史上的“交趾(阯)”。最初的“交趾”指的是南岭以南。在秦末动乱中,河北正定人赵佗割据岭南,建立了持续将近一个世纪的南越国。
越南人对“南越”的心态非常矛盾,在封建时代,南越被看做越南“自己”的政权,就连阮福映向嘉庆皇帝求取国号时最初要的也是“南越”。但赵佗终究是“北人”,于是越南的历史被追溯到了更为久远的时代,“雄王,貉龙之子,泾阳之孙,定都曰文郎,相传十八世皆称雄王”。到了现代越南的历史教科书里,雄王已经成为越南的历史始祖,而赵佗和他的南越国,则成了阴险的北方侵略者。
南越文帝行玺金印
南越文帝行玺金印
这样的变化,一如朝鲜半岛上尊檀君而弃箕子,自然更多出于民族主义考量而非真实的历史。公元前111年,汉军三路起兵,灭亡南越,在其故地设置7郡,其中的交趾(治在龙编,今河内东北)、九真(治在胥浦,今清化)、日南(治在西卷,今广治)三郡在今天的越南境内。
“交趾”首次成为中原政权正式行政区名标志着越南的历史也进入“郡县时期”(公元前111年至公元939年,越南称“北属时期”)。中原文化在这一时期源源输入越南,越南封建时代的正史《大越史记全书》坦率地承认,“我国通诗书,习礼乐,为文献之邦,自士王始”,其中的“士王”即是汉末三国时期的交州太守、祖籍山东的士燮。
但与汉文化在越南牢固扎根的局面不同,中原政权对交趾三郡的统治始终未能巩固。中原王朝派遣到那里的官吏,多是带罪的贬官,良莠不齐。如士燮之属,实在是凤毛麟角。于是,交趾地区豪族叛乱接二连三地发生,由东汉名将马援平定的“二征起义”和梁朝大将陈霸先(日后陈朝建立者)镇压的李贲起义就是其中规模较大的两次。到了唐代,交趾被改置“安南都护府”,虽然所辖仍是郡县,但“都护府”的名称暗示已异于内地。
伏波将军马援
伏波将军马援
9世纪中期,南诏(在今云南)两次出兵侵占交州,“交趾湮没十年……人不聊生”。为防御南诏而调去的驻军哗变引发的庞勋起义最后被证明是倾覆大唐帝国的导火索,而越南本土意识也从对大唐帝国的失望中萌发。
唐宣宗时,已有人做《刺安南事诗》:“南方不择吏,致我交趾覆;联绵三四年,致我交趾辱。”唐末中州板荡,对安南的控制已是鞭长莫及,地方豪族趁机兴起,939年,吴权在白藤江之战击败了南汉军队。
虽然吴权死后安南又陷于四分五裂,但丁部领终于能够在968年翦平“十二使君”,建立丁朝(968─980年),国号“大瞿越国”(后改“大越国”,“瞿”亦作“大”解,系汉语与本族语同义叠置。大韩民国的“韩”亦“大”之义与之类似),是为越南自主政权的开始。随后,宋朝承认安南为“列藩”,册封丁部领为“交趾郡王”,至1174年,南宋朝廷正式册封“安南国王”,连名义上的郡县地位也放弃了,边徼遂变成了邻国。
南北朝的心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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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边藩自立的大越国尽管远离中原王朝统治的中心,却全方位模仿和移植了中国文化、经济、政治制度。李朝(1010-1225年)的官制分文武两班,各九品,地方有知府、判府、知州,中央还有太师、太傅、太尉、太保的重职。李朝建立之初就修文庙以供奉孔子和周公,师法唐宋的科举制度;文章皆用汉字,汉音亦渗入越语而形成反映唐代中叶以后汉语音的汉越音,以至于每个汉字都有对应的汉越音念法,用汉越音诵读佛经的传统一直保持在当代越南僧侣之中。
与中原别无二致的河内文庙
与中原别无二致的河内文庙
在“大越”的统治者看来,自己与中国(“北朝”)是同属于“华夏”的大小国,并没有从属关系。《大越史记全书》开宗明义,“大越居五岭之南,乃天限南北也。其始祖出于神农氏之后,乃天启真主也。所以能与北朝各帝一方焉”。
曾率兵入侵广西、屠城邕州(今南宁)并与宋军交战的李朝大将李常杰(1018-1105年)曾作过在越南非常有名的一首诗,内有“南国山河南帝居”之句,战后越方在归还宋朝的俘虏时,在20岁以上的俘虏身上都刺有“投南朝”字样。此时的越南已有自己的正式国号“大越”,但无论是李常杰的诗句还是俘虏的刺字都不用“大越”自称,而以类似中国古代的南朝、北朝看待两国关系,实质也隐含着双方平等并立,但同属于华夏文明的意味。
十三世纪,大越国先后经历了改朝换代与蒙元入侵。1225年,陈守度篡李建立陈朝(1225-1400年)。陈朝建立后很快遭到了蒙古铁骑的三次入侵(1258年、1285年、1288年)。大越国的民族意识在残酷的战争中空前高涨,主持抗战的兴道大王陈国峻凛然表示“先断臣首然后降”,在《檄将士文》里直斥“蒙鞑乃不共戴天之敌”,普通士兵也在手臂刺上“杀鞑”二字,誓死不降。值得注意的是,正是在《檄将士文》中,第一次出现了越南自称中国的记载(“为中国之将侍立夷宿而无忿心”)。
1400年,外戚胡季犛篡陈自立,建立胡朝,改国号为“大虞”。篡陈事体传到明朝,明成祖决定“兴灭继绝”。“顷因胡政之烦苛,致使人心之怨叛”,永乐五年,明军顺利俘获胡季犛,将安南之地重置为交趾布政使司(省)。
但自从丁朝以来,安南自立已有四百余年,加之中越史籍都提到明朝官员“重科厚敛”,令安南人的反抗不断。先是陈朝宗室相继起兵(后陈朝,1407-1413年),接着黎利在兰山举起义旗(1418年),“当义兵初起之时,正贼(指明朝)势方张之日”;而数年之后,明朝的统治已经局限在东关(今河内)等几个孤立据点之内。
明宣宗即位后,一方面已有放弃安南之意,另一方面也派兵援救安南,意图在取得军事胜利的条件下体面撤军。结果也无法如愿,“两路救兵,既不旋踵而俱败;各城穷寇(指明军),亦相解甲以出降”,终于被迫放弃安南(1428年),承认黎利重建“大越”。黎利的谋士阮廌遂写作名篇《平吴大诰》,以彰其功。这篇一千五百字的雄文开篇就是“惟我大越之国,实为文献之邦。山川之封域既殊,南北之风俗亦异。自赵、丁、李、陈之肇造我国,与汉、唐、宋、元而各帝一方”,可以说是把越南统治者南北朝的心态刻画得淋漓尽致了。
身着明式官服的阮廌像
身着明式官服的阮廌像
后黎朝在黎圣宗时代(1460-1497年)臻于极盛,但进入16世纪就由盛转衰,1528年以后更是出现了两次“南北朝”。先是莫朝占据北方,后黎朝在南方复辟;1592年莫朝被赶到越北高平一隅之后,号称“中兴”的后黎朝再次南北一分为二,北方郑松“挟天子以令诸侯”,南方阮潢与之相埒,自称大越国阮主,中日史籍则称之为广南国。1627-1672年,郑阮大战7次,结果人口多于南方三倍的郑主未能消灭阮主。最后双方约和,以灵江(十分接近北纬17度线)为界,南阮、北郑对峙的局面持续了二百多年。
公元1802年,阮主后裔阮福映平定西山起义(1771-1802年),统一全国,建立越南末代王朝——阮朝,今日的“越南”正是其从北京求来的正式国号。但阮朝皇帝在国内更中意的其实是“大南”,还制作了“大南天子之玺”,用“大南”与“北朝”平起平坐的姿态尽显无遗。
极盛时期的阮朝疆域
极盛时期的阮朝疆域
和越南历代王朝一样,这个政权虽在名义上接受宗藩体系,向清廷称臣,但在国内毫不犹豫地僭越为“皇帝”。
当时越南名儒潘辉注甚至直言不讳,北方的清朝虽然继承了明朝的版图,但并未承袭其衣冠文明,“胡俗之移人,一至浩叹如此”,清朝的“中华”资格被彻底否定了。
阮朝官服
阮朝官服
时过境迁,曾经那么执着于“中华”名分的越南,今天却连一部电视剧也急急要与中国划清界限,实在是从一个极端走到另一个极端了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