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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봄은 가는 겨을보다 항상 새로운 것에
사라지는 자연의 섭리에 얻는 즐거움을 기지고 함안의 방어산 종주 길을 다녀왔다.
인연은 늘 다가오고 사라지는 것은 즐거움이다.
우리는 지금 우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넓은 우주의 일원으로 우주의 질서속에서
살아가는 물질 덩어리 이다. 흔히 미세한 존재라 하지만 작은 소우주 이기도 하다. 알고 있지만 알수 없는 심신를 가지고 헤메는 작은 유성같은 존재이다. 모든 것은 탄생의 신화를 가진다. 우리는 부모라는 물질에서
원하든 원하지않든 태어났다가 소멸된다.
우주의 어느 원자가 부모의 몸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물질이 되고 부모가 되어 만들어지는 나 라는 물질 덩어리가 살아가고 있다. 지구에서 같은 존재는 없다. 나는 또다른 자식을 만들고 그 자식은 또 다른 자식을 만든다. 지구는 태양계가 만들고 태양계는 은하계가 만들고 은하계는 성운이 만들고
성운들은 끝없이 태어나는 우주의 한조각이다. 지금도 우주는 태어나고 소멸한다. 보이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말라는 부처의 십불 十不이라한다. 그러면서 끝없이 사유하고 사유하라고 한다. 깨달어면 그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는 것일 뿐이라한다. 지구에서 소멸은 늘 곁에서 보고 있지만 인간들은 자신은 소멸과 무관하다는
착각 뿐이다. 자신이 편한대로 사는 아둔함이다.
적멸은 불가에서 나오는 말이다. 번뇌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경지를 말한다. 흔히 대웅전 앞에 적멸보궁이라는 글귀를 자주 접한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곳으로 석가모니가 적멸의 낙을 누리며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 산꾼의 성지인 설악산 봉정암 이나 오대산 적멸보궁을 언제나 가보고 싶은 곳이다. 적멸위락 寂滅爲樂이라는 말은 생사의 변화가 없는 적멸한 경지를, 생사의 변천이 있는 미혹한 세계에 대해 즐거움으로 삼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 없다. 참으로 심오한 경지이다. 유마경 에서 "몸은 공적 空寂하다 고 설하여도 영원히 적멸하다고 설하지 않는다." 몸은 일백살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지만 열반은 적멸이다. 깨우친자는 대자대비하는 부처의 경지에서 환생한다. 불교는 윤회의종교이다. 그러므로 대승보살은 필경 적멸을 말하지 않고 영원히 적멸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설법을 하였다. 유마거사는 대승의 진리를 설하신 분이다. 무상, 고, 공, 무아라는 깊은 경지를 가르치는 불경이다. 적멸이란 인간의 소멸을 가르치는 심오한 뜻이다. 사라지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있다는 진리이다.
나타난다는 것은 사라진다. 유는 무이다.
무는 유이다. 무엇이든지 나타니지 않는 것은 없다. 나타나면 언젠가는 사라진다. 극하면 부시진다. 사라진다는 말은 다시 태아난다는 것이다. 욕심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 커진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은 사라지는 것을 볼수 밖에 없다. 늘 보고 듣고 하지만 아직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무관한 일인 것이다. 어리석은 것은 결국은 언젠가는 내가 해야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소멸은 나타나면 사라진다.
소멸은자연이다. 없어지는 것은 자연인가?
숲으로 가면 크나큰 것일수록 존재하지 못하고 자연의 손길에 부셔져 있고 그사이로
언제부터 인지 자그마한 새순이 그자리 옆으로 나타난다. 자연은 순환한다고 한다.
작은 것은 작은대로 그 정도 크면 사라지고
어떤 것은 아직도 팽창하고 있을 뿐이다. 지구의 나이가 300 억년전에 태아나고 300억년 후는 사라진다고 한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불랙홀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인간도 태아나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존재하고 있다. 언젠가는 인류도 사라진다고 한다. 소멸은 탄생인가? 생각도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이 언제였든지 한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않을 뿐이다. 윤회도 소멸의 한부분이다.
세상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작은 것은 작은대로 큰것은 큰대로 다 다르다. 우주에서 보면 나는
무엇일까? 생각하는 내 마음은 우주보다 더 클뿐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잊혀질뿐인가?
그 시절은 그런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있을수도 없다. 학창시절 어느 동네이고 애들소리에 골목이나 어느곳이나 요란하게 뛰어놀고 다니는 것은 당연했다.
아침부터 저녘까지 논다고 바빴어니 집에서 부르는 소리나 찻는 소리에 저녘이나 되어서 집으로 갔어니 그땐 온 동네가 사람들로 가득하고 집이나 방이나 어느 곳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집집마다 셋방사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방마다 수많은 식구들이
같이 먹고 자는 시절이었다. 내가 사는 집이나 옆집이나 가득한 사람들을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누구의 집에서 누구인지 다 알고 살았다. 누구의 집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다음날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먹고사는 것까지 다 알정도 였어니 참으로 서로가 소통하지 않아도 다아는 시절이 었다.
지금은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아는 사람들은 근처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아도 저 사람이 어느 집에 사는 것을 아는 것도 비밀이다, 누구집에 밤새 무슨일이 있는지 누가 살아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삶이다. 이웃의 비밀은 각자의 게인사 이니 알아도 안되는 것이다. 이웃이 사촌이라는 소리는 무슨 전설속의 소재 가 된것 같다. 세상은 점점 소멸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서로가 필요는 사라지고 홀로 이루는 것만이 존재하는 시대가 오는 것 같다. 동네나 도로나 휴일이면 어느곳이나 가득하다. 마트나 백화점이나 인파는 가득해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이들로 가득하다. 산을 다니는 신꾼들도 자주가는 신악회나 산에도 아무런 인연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현대는 소멀의 시대로 가는 중이댜.
치유란 무엇일까? 고통이나 불편을 느끼거나 병이 생겼을때 내면에서 편안함을 잃어버리면 원하는 것이 치유이다. 모든 병은 자신의 본질적인 파동을 거스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파동이란 지구의 만물이 보내는 고유의 파장을 말한다. 인간은 고유의 파동이 있다.
태아나면서 커가면서 얻는 것이 파동이다. 흔히 힘이 어떻고 근육이 어떻고 하는데 파동이 주는 것을 느끼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파동은 잃어가는 것이다. 자신을 거스를 때 마찰이 생기고, 그 마찰이 병이 되고, 쌓이면 암이라는 변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을 살고 있지 않을때, 파동은 낮아진다고 한다. 만약에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는 이상적인 자아는 지금보다 높은 파동을 지닐수 있다. 현재의 파동과 이상적 이미지 파동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가 클수록 마찰은 커진다. 치유란 그 두 파동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다. 지금의 자아와 진정한 자아 사이의 파동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치유이다. 모든 병은 본래의 파동에서 벗어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파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치유의 삶이라 할수 있다. 명상이라든지 몸이나 마음이 편한 대로 가는 것이 치유의 삶이다. 명상이나 단식이나 모두가 각자의 방식은 다르다. 정하는 것은 집착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이고 파동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설레임은 본질을 느끼고 파동을 아는 첫번째 관문이다. 설레이는 일을
가지는 긍정적인 행동이 파동을 느끼는 일이다. 산에서 설레이지 않는가? 산에서 산이 되는 설레임은 산에서 주는 모든 자연이 주는 파장을 느껴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가진 관념은 소멸하고 우주의 파동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설레임이라는 파동을 가지고,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와 계몽주의 시대로 부터 현대성( 물론 근대성)은 줄곧 사회 분열을 유발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근대성은
개인의 자유와 진보라는 이상을 찬양하면서 전통사회의 경직된 계급체계와 종교의 얽메인 관습들을 이겨냈다. 그러나,오늘날 현대성은 비교적 변화속도가 느리고 기계들의 움직임만이 기술전부였던 앞시대와는 크게 다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빠르고 디지털 기술에 의해 굴러가는 현실의 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후기 현대성,액체현대 " 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기계장치보다 디지털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생활속의 유동성이 큰폭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과거와 다르게 유동성 상태에 놓임으로써 일, 사랑, 개인주의, 공동체등 사회를 구축하는 모든 핵심요소가 안전성을 잃고 작은단위로 뿔뿔이 쪼개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액체시대의 디지털 기술은 정체성에 대한 책임의 크기와 범위를 더욱 확장해, 우리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대감을 형성할 것 인지에 있어 무한히 자유롭다는 관점이다. 선택은 자유를 주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이 되었다. 즐거움을 주지만 이는 곧 함정이다. 우리는 온라인상에 형성한 관계망은 진짜 공동체가 아니고, 그 이유는 본래 공동체는 우리가 소속되는 대상인 반면 온라인상의 괸계망은 우리가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온리인 괸계망에서는 나스스로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다. 내가 교류하는 중요한 사람들을 통제하는 권한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분은 약간 좋아질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외로움이나 버려지는 느낌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결과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합하고 자신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이 내는 목소리의 메아리만을 듣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어지는 상象만을 바라보며 외부의 접촉을 차단한 자기만의 세상에 틀어박히기 위해 소설미디어를 사용한다." 바우만의 액체현대의 단상을 비교하는 말이다. 현대성은 우리가 기준에 맺고 있던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를 재정의 하도록 가차없이 몰아붙이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점점 더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가한다. 불인과 외로움은 커지고, 창의성은 소멸된다.
이는 인간성의 본질과 가치를 현대성에 이끌려 다니면 유혹의 손길에 갇히면 사라진다.
인간의 뇌는 선사시대의 생존문제를 해결하는 유전자로 이루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뇌는
빠르게 변화하는 더없는 복잡하고 끝없는 도전에 부닥치는 21세기 현대사회의 문제 해결에는 최적화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일상 속 수많은 사건이나 상호작용을 위협으로 인식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쉽게 산만해지고 어쩔 줄 모르면 일정지연, 책임회피, 두려움등 다양한 유형의 건강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패턴에 빠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일정한 시간 동안 만 집중할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뇌는 몸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5분 동안 한가지 일에 집중한 후에 5분간 뇌에 휴식을주어야 한다. 이 5분간이 상당히 효과적이다. 운동도 사실은 몇시간이고 할때 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휴식후 쉬는 동안 몸은 회복되면서 좋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뇌와 몸은 절대로 업그레이드 된적도 앞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세상이 빠르고 끊임없이 변하는 속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항상 필요한 것은 나자신이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알고 챙기는 버릇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 여유라는 것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속도의 조절하는 능력이나 멍하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복보다 안전을 지키도록 설계되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살아남도록 하는 뇌의 구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지금 이순간을 즐기며 살도록 설계 되지 않고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위험요인을 포착하는데 집중하도록 되어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패턴인식, 기억회생, 과거경험등을통해 반사적으로 그 즉시 어떤 가설이나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졌다. 25분 집중하면 5분동안 휴식이라는 멍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뒤돌아 보는 것만이 지금을 알수가 있다.
쉬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다. 인생은 끝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느끼는 것이다.
인생은 오직 순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이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의미있게 된다.
좋아하는 것이 각각이 다 다르지만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도 있을수 있다. 그중에 한가지가 술이다. 술이나 담배는 선천적이다. 모두가 반드시 병행할수는 없다. 술을 못마시면 못마신다고 하는 문화가 지금 대세이다. 즐기는 것은 각자가 하는 일이지 꼭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난 문인이나 예술인이나 평범한 사람들도 술을 선천적으로 못하는 분들이 많다. 술을 마시면 가장 좋은 것은 얼큰해지는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면 기분이 가장 좋아진다. 얼큰히 술에 취해서 누구나 의기양양해지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것같아서 종종 직원들이나 같은 사고를 가진 무리들은 자주 즐기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현실 과 공상을 오고가고 창조력 사고력이 뛰어나는 소리가 많아진다. 그것이 술로 인한 해방이라 느낀다.
이런 분위기는 예술이나 감정이 풍부할수록
더욱 해방감을 느낀다. 좋은 자리나 좋은 친구나 좋은 대화는 모든 것을 이룰수 있는 듯한 동료의식을 가지고 진실되어야 한다.
그러나, 술을 먹지 못한다고 어울릴수 없는 사고는 스스로 본인이 이겨내야 한다. 물론 서로 다른 사고를 같아 질수는 없다. 그것을 다르다 하는 생각이나 혐오나 대립으로 간다면 서로가 문제를 양상시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꼭 같은방향으로 가는 짓은 식민지 사고이다. 다르다는 것은 즐기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아적 관념이다. 남이 즐기는 것을 서로에게나 다른이에게 피해를 주는 짓은 죄악이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각할 수 없다.
존재는 지각되거나, 지각하는 것이다. 영국 경험 철학자 죠지 버클리 의 말과 같은 뜻이다. 쉬운데 어려운 말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모르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 無我는 완전히 평안한 상태를 나타낸다. 모든 만물은 인간의 사념
私念을 남긴다는 말이다. 인간은 돈을 만들어 내어서 돈에 괴로움을 알고, 다이아몬드를 알고 결혼식때 필요한 것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보통 결핍이라는 것은 의식할때 고통이 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이나 장애자는 그들의 현실에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면 아무런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난 가수나 연예인이나 부자들이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필요나 고통이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독수리가 시력이 좋고 높이 나는 것이나 키우는 강아지가 후각이나 감지하는 능력이 초능력이 되어 있어도 우리는 아무련 의식이나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우린 한정된 시간속에 사는 나그네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나만의 행복한 시간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누구도 어찌할수가 없다.
모두에게 똑같은 순간들만 존재한다. 붓다는 고집멸도 苦集蔑道를 말한다. 지각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나에게 쓸모없는 것들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은 대단히 허술하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지각하지 않어면 더 이상 그것이 지각하지 않는다.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고, 가장 큰 것은 밖이 없다. 至小無內, 至大無外 ." 전국시대 명가 名家철학적 혜시의 말이다. 크다 작다하는 것은 인간경험의 기준일 뿐이고 관념 언어의 장난이다.
인간은 날마다 창조한다. 우리는 날마다 세포분열이라는 틀에서 세포는 소멸하고 그 세포가 다시 세포를 만들고 사라진다. 그 창조안에 인간의 상승 생성이 영향을 준다.
진화는 어디까지가 과거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지 지금도 진행중이다. 종은 하나의 단일적이며 연합된 창조체이다. '생의 약동' 은 베르그송의 철학이다. 우주는 대부분 무생 無生 이다.삶이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만으로 아름답다. 언젠가 진화하는 것의 일부가 되어 있어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 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론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된다. 자기원인은 자기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동시에 자연 속에서 자기 발생적 인 것이라 한다. 인간은 자연보다 큰 것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자연보다 큰것은 없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 무언가 생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무언가 지속 되고 있다. 인간은 병들고 죽어가는 것도 또 다른 것으로 변하는 중이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산에 존재하는 바위나 노송도 변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한정된 것만 나타낸다. 죽음도 하나의 운동 상태이다.
삶과 죽음이나 유有와 무無라는 것도 모두 유 有이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계속 변하는 것들이다. 소멸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는 것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이나 감정과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라는 것이다. 진리가 하나의 질서로 보면 혼돈을 나타내는 것은 인과도 없고 뚜렷한 형태도 없고 무엇이든 가능하기도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혼돈은 구멍도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혼돈에 인간처럼 일곱개의 구멍을 내어주니 혼란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글은 촣아하는 자주 읽는 부분이다. 혼돈이고 진리고 모두가 인간이 만든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은 가능한 한 최대의 선을 산출하는 존재이고, 그렇게 하기위해 필요한 모든 지식과 능력을 갗추고 있어서 신에게 결함, 과오,죄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 죄를 허용하는 것은 지혜이고 덕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체의 관점, 즉 신의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최선으로 흘러간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혼돈의 세상에 살고 있기에 진리를 만드는 것이다.진리가 옳은데 어찌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세계는 혼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종교는 진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믿음으로 신앙을 만든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 인간들의 지배라는 것이다. 질서라는 것을 진리가 만드는 틀에 매여 사는 현대인은 과거의 조상들의 길을 따라가는 아이들인지 모른다. 진리가 만든 질서는 지금 혼돈의 앞에서 불확실의 세계에 도박을 하는 선지자들은 환호한다. 주식이나 블확실의 세계에서 로또나 미지의 발멍품을 선점하는 혼돈이 자신들을 지배자로 만든다고 광란하는 시대에 살고있다.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먼저 진리라는 것을 아는자가 상류층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는 곧 오류이고 이는 이른바 유용한 오류이다. 진리는 소멸되는 것이다.
진리를 찻는자는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마시는 시대에 산다.
어릴때는 어른이 참으로 좋고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많은줄 알고 하루 빨리 커지고 싶고
누가 나이를 물어면 한두살 올려서 말한다.
덩치가 커서 이따금 어른 흉내를 내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면 어른이 빨리 되는 착각에 살았다. 젊은 날은 시간도 세월도 얻는 것들도 더디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 뿐이다. 어른이 되면 바같세상은 마음껏 자유로 가득찬 곳이라는 생각푼이었다.
그러나. 지금 누가 "자유로우십니까?" 하고 질문을 하면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며, 행복한 삶의 기본이라고 할수있다.
어른의 자유란 현실의 무게를 직시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세우고, 책임감 을 바탕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하는 용기이다. 그러나 내 인생이 어느새 타인의 것이 되고, 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으로 착각하여 살아가는, 의미없는 따라 다니는 삶에 맞추어 사는것이 아닌가? 인간은 타인의 시선으로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 기본이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어른이 되면 자유로워 지는줄 알았지만 점점 타인의 시선이나 수치에 맞추어 지는 것이 가장 성공한 길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자유로워 지는 것은 지신의 항로를 가는 개척자의 길이 되는 자유가 참으로 어렵고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느낄때는 점점 자유와 멀어진다. 더 많은 사회의 규범이나 책임을 가져야만 하는 사회에 살아가야 한다. 자유로워 질려면 자신만의 길과 사고를 가져야 한다. 마치 혼자 가는 산길을 즐기는 붕류가 산꾼이 되어야한다. 무슨 철학자 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ㅡ 물론 그 정도가 되면 벌써 자유롭게지만ㅡ 자신만의 사고를 실천 할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홀로서기가 무슨 대단한 걸음같은 천진난만 한 어린아이의 걸음마가 아닌 힘치게 내딛는 자신의 발걸음이 자유로워 지기를 바라는 것이 제일의 사명이다. 진정한 자유를 이제 가져보고 싶디. 아직 남은 시간만이라도 즐기고 싶다. 해가 지기전 까지 석양을 보지도 못하는 시절이 와있는 줄 알지만
자유를 가져보는 것이 우선이다. "개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한, 자기 삶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에 나오는 말처럼 살아야 한다.
니체의 "자유로운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진다." 는 무서운 과제도 있다.
소멸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이 소멸되는 것인지
밝아오는 것인가? 탄생은 소멸로 가는 순간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소멸로 가니 지금은 사라지는 것 뿐이네ᆢ
우리는 소멸로 가는 존재 인 가련한 방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