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정기적으로 칼럼을 올리는 '사단법인 인문예술연구소'에 <길희성 박사님을 보내드리며>라는 제목으로 박사님 별세 당시의 감회를 담은 글을 올렸습니다. 부족한 글입니다만 박사님의 삶과 마지막을 기억하는 모든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게시판 > 수 > 길희성 박사님을 보내드리며 (ssp21.or.kr)
종교학자 길희성 박사님(1943~2023)에 대해 학식 있는 이들이라면 대한민국 종교학의 태두라고 불렀을 것이며, 학식과 더불어 나름대로 종교를 가진 이라면 그분이 평생 견지해 온 신념과 가르침들을 기억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내게 길희성 박사님이란 신학교 시절 중세의 신비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사숙하는 동안 책으로나 직접 베풀어 주신 가르침으로나 길잡이가 되어 주신 은사였고,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2012년 나를 다시 학문의 길로 인도해 주신 분이셨다. 박사님의 조언을 따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 들어왔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학문의 여정을 걸어왔다. 박사님은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조기 은퇴하신 뒤 강화도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尋道學舍)’를 세우셨다. 심도학사에서는 주말마다 배움의 자리가 열렸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찾아갈 때마다 박사님께서는 환한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그분 평생에 걸쳐 쌓아온 학문의 세계 속 깨달음을 들려주셨다.
박사님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와 더불어 말년에는 그 이상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영적 휴머니즘’을 추구하셨다. 이는 오늘날의 제도 종교들이 문자주의의 덫에 빠져서는 종교적 상징과 신화 속에 담긴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대신 문자주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적대하며 세상을 평화 대신 분열과 파쟁으로 이끌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종교들이 문자주의에 사로잡힌 이유는 모든 종교의 근저에 존재하는 영성을 상실한 데 있으며, 영성을 상실한 종교에 환멸을 느낀 현대인들은 이성과 과학을 표방하며 급격히 세속주의로 치닫지만 이로 말미암아 찾아온 세계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세계라고 진단하셨다. 문자주의와 세속주의 앞에서 박사님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가슴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며 이성과 영성의 화해를 외치셨으며, 그 끝에서 만나는 경지란 ‘길은 달라도 같은 산에 오르는’ 경지였으며, 이 경지란 곧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심층적인 영성이며 이 심층의 영성을 발견하고 그와 하나가 될 때(神人合一의 경지!) 비로소 인간은 참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셨다.
위와 같은 박사님의 마지막 깨달음을 담은 책이 『영적 휴머니즘』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탈고하신 뒤로 박사님은 마치 평생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갑자기 무너지셨다. 박사님은 2022년 8월에 처음 쓰러지신 뒤 병고에 시달리시며 두 번이나 고비를 맞으셨고, 간병하시던 사모님도 뇌출혈이 와 쓰러지셨다가 겨우 회복하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만 믿고는 다른 소식이 없으니 괜찮으신 줄 알고 살았으니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무딘 사람인데도 사실 박사님 생각을 하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때가 몇 번이고 있었다. 박사님은 코로나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그간 써 오신 글들을 정리해 전집으로 만들고 계셨는데, 책머리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정리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씀을 남기셨다. 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있으시다는 소식은 없어서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과 귀가 있으면서 듣지도, 알지도 못했는데 청맹과니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작년 9월 8일 박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를 만큼 가슴이 내려앉았다. 박사님의 뜻에 따라 빈소는 차리지 않으며, 조문은 생전에 지내시던 심도학사에서 9월 10일 3시부터 6시까지만 받은 다음 6시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박사님을 보낼 예정이라는 알림을 읽었다. 박사님이 평생 믿어오신 하나님이 이분의 영혼을 이미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셨을 줄 믿고 바라며 기도하면서도 소식을 거듭 새길수록 애통한 마음이 더했다. 서재 책장에 꽂혀 있는 『영적 휴머니즘』을 탈고하시기까지 너무 무리하셔서 건강을 해치셨다는 <한겨레>의 기사를 읽으며 더욱 가슴을 쳤다.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고 어리석게 살다가 이렇게 보내드리고 나서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박사님을 보내는 날에는 예배를 마친 뒤 곧바로 아버지를 모시고 심도학사에 차려진 박사님 빈소로 달려갔다. 박사님은 생전에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세무사 사무실의 고객이셨고 그 인연으로 나 역시 박사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그토록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박사님이 참 아름답게 살다 가셨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마지막 길이었다. 하루밖에 열리지 않은 빈소에도 문상객들이 줄이어 찾아왔다. 박사님이 생전에 좋아하셔서 떠나시기 전 마지막에 골라 두셨다는 음악들과 함께 선생님들 여럿의 눈물 어린 추도사가 이어졌다. 추도사 속 박사님의 생애 마지막 모습을 들으며 또다시 가슴을 쳤다. 의사가 임종을 준비하라고 한 다음 날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짝 웃는 얼굴로 “My Best Friend!"를 외치며 제자들을 맞이하셨고, 마침 그런 날에 찾아온 친구들이 있으면 철학과 신학에 대하여 열을 올려 대화하셨다고 한다. 붓다의 무아에 대하여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으셨는지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그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별세를 앞두셨던 분이 못다 한 공부를 마음에 걸려 하실 줄이야! 최후의 부르심을 받기 전 박사님께서는 두 손을 들어 뜻 모를 외침을 외치셨는데, 그 가운데 분명히 들려온 말씀은 "감사합니다…"였다. 박사님이 깊이 사색하셨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말씀이었다.
인도자의 마지막 기도를 끝으로 추도예배를 마친 다음 심도학사 사택 옆 나무 아래에 박사님의 화장한 유해를 모셨다. 힘 있게 가르침을 전하시던 목소리도, 총기와 호기심으로 늘 번쩍이던 눈매도 모두 사라지고 한 줌 재로 변해 상자에 담기신 채 흙으로 들어가셨다. 박사님이 생애 마지막을 고통 가운데 보내고 계신 줄도 몰랐던 게, 한 번이라도 찾아뵙기는커녕 전화 한번 드릴 생각도 안한 게 사무치게 마음이 아파 자꾸 눈물이 흘렀다. 박사님이 떠나신 지 나흘째 되는 날에도 박사님에 대한 기억과 생각들은 마음에서 가시지 않았다. 하루 내내 다음날 강의를 준비하면서 박사님이 빈소에서 문상객들에게 들려주기를 부탁하셨던 <내 맘의 강물>을 계속 듣고 있었다. 테너보다는 바리톤이 불러야 더 깊이가 생기는 가곡이었다. 박사님이 왜 바리톤이 부르는 버전을 즐겨 들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박사님이 피아노를 치며 부르셨다는 <내 맘의 강물>이 아직도 귀에 아른거린다.
박사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읽으면서, 박사님께서 생전에 저절로 풍기셨던 아우라가 나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구약성서 속 예언자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에게 선생님의 능력이 제게 백배나 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처럼. 박사님께서 생전에 보여주시던 그 아우라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던 오직 박사님만의 아우라였고, 이는 학문적인 탁월함이나 유능함과는 전혀 다른 그 이상의 아우라였다. 박사님의 아우라는 아마도 추도예배에서 나온 말씀처럼 그분의 생애와 신앙과 학문과 인격이 완전히 일치되었기에 나오는 아우라였을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근저에서의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했다. 바로 그 일치를 박사님 역시 은연중에 이루고 계셨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가 어느새 ‘큰 바위 얼굴’이 되었던 것처럼, 박사님 역시 그분이 ‘큰 바위 얼굴’로 삼으셨을 여러 종교 속 수많은 성인의 모습처럼 지극한 일치를 이루고 사셨던 게다! 그리고 이제 길희성 박사님 역시 내게 오래도록 ‘큰 바위 얼굴’로 남아 계실 것이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에서 만난다고 말씀하셨던 박사님, 그 산 정상에서는 박사님이 존경하고 사랑하셨던 분들을 다 만나셨는지요? 저도 그분들과 함께 박사님을 다시 뵙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박사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