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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지입니다 / 이정숙
번듯한 구첩반상은 말할 것도 없고, 쥐코밥상 위에도 그릇들이 차려졌습니다. 대접, 사발 그리고 종지. 다들 형제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그릇이라고 하지요. 배가 고픈지 수저가 반찬과 국과 밥그릇으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네요. 그러다가 뭔가 아쉬운지 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립니다. 나는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을 담는 종지, 밥 먹는 이들이 종요롭게 나를 보지도 않지만 내가 없으면 밥상은 완성되지 않나 봅니다.
우주는 큰 것과 작은 것이 함께 구성하잖아요. 하지만 이는 크기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크기에 따라 제각각 다른 기능이 있지요. 그래야 우주가 돌아갑니다. 밥상도 그렇습니다. 무연히 보면 별다른 것도 없어 보이지만 눈을 열어 자세히 보면 밥상도 세상원리, 우주원리가 들어 있답니다. 글쓰기에서 흔히 말하는 精察을 밥상을 대상으로 해보았습니다.
아들만 아는 집에서 태어난 종지는 접시나 사발 같은 큰 그릇에 묻히어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작다란 몸피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천상 그릇의 난쟁이였던 셈이었지요. 당신의 태를 통해 낳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여덟 자식 중 하나에 불과할 뿐 나의 존재는 필요치 않았어요. 하늘이 부여한 자연적, 필연적 사랑의 생명수가 부모로부터 흐르지 않았거든요. 그나마 밑으로 아들 셋을 터 팔았다고 딸이라서 감히 넘겨다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진짓상에 가뭄에 콩 나듯이 올려지긴 했었지만, 그런데 그것마저도 어느 때부턴가 소원해져 버렸지요. 간혹 정체성이 없는 액세서리 노릇을 할 때도 있었으나 후미진 골방의 찬장에 내쳐져 많은 것을 체념하고 접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가진 부정적인 부모 밑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손을 내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서 멀어져 간 본질적인 공허함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지요. 속으로 엉두덜거리며 자학의 공간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세상과의 고립이었습니다. 차라리 반항하고 줄행랑치는 힘을 발휘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지나가네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지만 같은 그릇이라도 크기에 따라 담기는 내용도 다르고 그에 따라 취급도 달라집니다. 생김새나 크기가 고만고만해도 무엇을 몸에 지녔는가에 따라 사람의 시선은 다르지요. 같은 형제인 대접이나 사발은 따뜻한 품 안에서 마냥 사랑을 받는데 나는 천덕꾸러기로 동그마니 나앉아 그들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떤 몸짓도 못 하고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바리데기였지요. 숙명을 받아들여 더 열심히 살았으면 좋았을 걸 편협한 생각에 스스로 숨어버렸습니다.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종지는 외롭고, 답답하고, 서러웠습니다. 세상 그릇들은 모양새 좋게 제 몫을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밖에 살지 못할까? 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니 뭘 해서는 안 되는 슬픈 운명이라 생각하며 의기소침했지요.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몸의 왜소함이 정신도 그리되더군요. 몸뚱어리만을 탓하며 그저 맹하게 세월을 살라 먹어버렸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다지 욕망하지 않았으니 불행하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지상에 닮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사물도……. 염불도 몫몫이요 소뿔도 제각각이라고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다름이 있어 동서의 세계는 그토록 조화를 강조했나 싶습니다. 하지만 좋게 말해서 조화이지, 어울림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높이와 크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 믿고 그렇지 않은 상대를 얕잡아 보기 일쑤지요. 이규보의 한문수필 가운데 <슬견설>이 있습니다. 이와 개가 소재입니다. 이나 개, 모두 생명인데 작은 것을 죽이는 일은 거리낌이 없고, 큰 것은 꺼립니다. 외면에 따라 생명이 크고 작은 게 아닌데 말입니다. 대접도, 사발도, 양푼도 심지어는 바가지와 옴박지까지도 모두 나와 한 형제건만 나는 그들에 비해 왜소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잘 오지 않아요. 오히려 밥상에 내가 올려져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한쪽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러니 밥상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개는 크니까 생명이 소중하고, 작은이는 생명도 작다고 여긴다면, 나는 세상에서 참 서러운 존재밖에 될 수가 없겠지요. 이 수필이 교훈성을 띤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슬견설>의 경우처럼 겉의 크고 작음이 내부의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찍이 노자가 말했잖아요. 작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니고 크다고. 서양도 비슷하게 말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슈마허입니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으니까요. 생명 존중! 타자에게는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존재하는 모든 건 사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의 힘을 쏟는데 말입니다.
시간은 내가 속상하게 사는 것을 눈치 챘는지 관대하게 훌쩍 지나가 주었습니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리더군요. 꿈도 희망도 없이 세월에 밀리던 어느 날 거울 앞에 섰습니다. 참으로 초라했습니다. 그 초라함은 환경을 탓하며 내가 만들어낸 인생이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크고 품위 있는 도자기 그릇이나 질펀한 뚝배기, 막사발들이 그들 나름대로 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새삼 나를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욕망했을까요? 아니면 물극필반 이었을까요? 외면할 수 없는 욕망이 꿈틀거렸습니다. 어, 이게 뭐지? 짓눌린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끔가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무엇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예요. 내 안에는 은근히 고스락이 되고 싶은 욕망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타인의 시선은 감옥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그들도 내 눈길을 의식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삶의 파문을 절대로 일으키지 않았어요. 따라서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은 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나 아닌 사람들을 보면서 꾹꾹 눌러 온 욕망의 안주머니에 숨겨진 보석이 언뜻언뜻 보였습니다. 그것을 꺼내는 데는 참으로 큰 용기와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숨죽이고 있는 욕망의 꿈을 일으켜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대짜에의 욕망, 무한팽창과 크기로 질주하는 세상에서 비켜나 하찮게만 생각했던 종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진국이 담기는 보배로운 집이었더군요. 이 양념들은 큰 대접이나 접시 같은 그릇에 담으면 볼품이 없지요. 맥도 모르고 진맥하는 엉터리 한의처럼 그야말로 몰풍경, 몰상식이지요, 종지에 담아야 제격이니까요. 나름의 제 몫이 있는 것을 그동안 환경 탓만 하고 못난이 짓을 퍽 하였습니다. 작고 못생기고 쓸모없다고 치부하며 산 세월이 참 안타깝습니다.
음식도 오행의 원리에 따라 단맛, 매운맛, 신맛, 쓴맛, 짠맛을 요구하게 되는데요. 그중에서도 입맛을 맞추는 것은 단연 종지에 담긴 간기가 아닐까요? 간기는 다른 것들과 접속을 통해 생성과 변이를 거듭합니다.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매개 역할을 하지요.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이 내용물과 뒤엉켜 금세 입에 착 들러붙는 감칠맛을 냅니다. 존재 자체가 옅은 화학의 조미료가 아니라 전통으로 숙성된 천연 진액입니다. 음식 맛을 돋우고 증폭시켜 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내려 주셨다는 만나 같은 것입니다. 내가 없는 밥상은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뭔가 텅 비어있는 듯한 허전함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종지가 놓인 밥상은 아무리 쥐코밥상이라도 격식을 갖춘 듯 눈이 환해진답니다. 나는 어쩌면 음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는 운명적 연인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양나라 때의 화가 장승유가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금방이라도 검은 구름을 헤치고 날아오를 듯 몸통, 비늘, 발톱 모든 부분이 살아 움직이는 듯 그렸다지요. 그러나 완성으로 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한 가지 눈동자가 빠졌던 게지요. 안료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그 용이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랍니다. 종지에 담긴 양념들은 화룡점정 눈동자를 그렸던 바로 그 안료입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음식을 만들었어도 종지의 양념으로 마무리를 해주지 않으면 미완에 그쳐요. 마치 문장 끝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글이 완성되듯이, 패션의 완성을 신발로 마무리하듯이, 음식에서도 종지에 담긴 간기가 마지막으로 들어가야 제맛을 낸답니다. 맹맹함에서 꼴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밥상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알아채는 사람은 아마도 틀림없는 재치꾼일 것입니다.
나는 홀로서기도 할 수 있지만, 단독자로서 개성보다는 타의 것에 흔연히 섞이어 더 깊은 맛을 내고 싶습니다. 모래알처럼 겉도는 것이 아니라, 한 살로 찰지게 어울려 약선藥膳이 되기를 희망해요. 혼자보다는 다른 것에 섞이어 은이 나게 만드는 조력자, 얼마나 멋있는가요. 줏대 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주체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나의 속살인 양념을 다른 이에게 서슴없이 주는 넓은 아량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나 여기 있다고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미덕을 갖춘, 없어서는 안 되는 입속의 혀 같은 존재지요. 혀는 입을 벌리기 이전에는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서 고갱이가 되어 꽃을 피웁니다. 혀가 움직여줘야 씹을 수 있고 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온몸에 피돌기 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나무로 치면 뿌리가 되겠지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상의 줄기와 잎을 성장시킵니다. 뿌리가 부실하면 열매를 기대하기 힘들겠죠. 종지의 양념들도 똑같은 역할을 하지 않나요.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녹여 제 몫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내적인 힘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네요. 세상엔 드러내놓고 자선을 하는 부류도 있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숨은 손이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자기 본연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 아닐까요.
그러니까 情의 마음으로 타의 것들과 함께하는 자리이타의 삶이 참 좋아요. 홀로보다는 사랑으로 손잡아 짝을 이루고 싶습니다. 독불장군처럼 유별나게 굴지 않고 필요로 하는 곳에 섞이는 것이 즐겁습니다. 타인에게 빛이 나게 하는 자타의 공생에 주저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아무 데나 덤뻑덤뻑 섞이는 것은 꺼려져요. 소탈한 것 같지만 함부로 대하는 것에는 민감하거든요. 섬세하지 않으면 강한 개성은 본의 아니게 때론 악마처럼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답니다. 잘 사용하면 쾌, 잘못 사용하면 망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듬뿍담뿍이 아니라 한 자밤이나 한 꼬집을 주문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매무새나 놓인 환경이 뭐 대수라고 자기 부정에 많이도 시달렸습니다. 매서운 세월이었습니다. 온몸이 꽃처럼 활짝 피는 시절에도 고개를 숙였으니까요. 나 같은 존재는 감히 꿈같은 것은 꿀 수 없는 처지라고 각인해 버렸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사양길에 접어들 무렵에서야 벽감에서 나와 세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혁신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이루어지는가봅니다. 외딴집 골방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종지가 밥상에 자주 등장할 것을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참 신통하고 대견합니다. 일찌감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귀한 존재로 살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네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추의 ‘꽃’ 시처럼 말입니다. 그저 쪼끄만 그릇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날 종지는 꽃이 되었습니다. 와! 내가 이렇게도 쓰일 곳이 많다니 새삼 놀랍고 뿌듯하네요.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조급해지는 마음은 삶을 돌보게 합니다. 꽃필 계절을 놓치고 남들보다 뒤늦게 피워 올린 탓에 삶이 언제나 저잣거리처럼 분주하네요. 갇힌 삶을 거부한 발걸음이 경쾌합니다. 늦게나마 정체성 찾아 종지로, 종지의 양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즈음에는 깜냥도 아닌데 밥상의 가운데에 놓여 사람들의 손길이 들락날락하네요. 간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주목하십시오. 나는 간을 맞추고, 음식의 맛을 돋을새김하는 종지입니다. 나는 무연자비입니다.
[이정숙] 수필가. 2001년 『수필과 비평』신인상, 등단.
국제펜한국본부 전북위원장, 한국미래문화 부위원장.
온글문학 회장, 수필가비평작가회장, 전북문협 수필분과위원장 역임.
* 『계단에서 만난 시간』『꽃잎에 데다』『내 안의 어처구니』『지금은 노랑신호등』
* 온글문학상, 작촌문학상, 한글사랑유공자 전북도지사상 등
작가 자신에 대한 덤덤한 서술과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중편 분량의 수필이네요.
다양한 그릇 가운데 자신을 ‘종지’라고 매우 겸손하게 한풀 내려놓네요. 그 역설이 오히려 쿵하고 가슴에 큰 반향을 불러옵니다. 종요롭지 않게 보아왔던 '종지'였는데, 이 글을 읽고 그 요긴한 쓰임새를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아름다워라, 숭고하여라 종지여!
작가의 평시 모습은 밥과 고기, 과실로 한가득인 넉넉한 함지박이었어요. 행사나 모임에서 베풀고 솔선하는 모습은 늘 감탄을 불러왔어요. 맵시, 솜씨로 모임을 풍성하게 아우르는 견인차 역할을 앞장서서 자처하시죠.
사람 사이에 종지의 역할이 참 소중하네요.
첫댓글 음식의 맛을 돋을새김하는 종지입니다.
저와는 남매지간 같습니다
정자 돌림이시니...
이해숙 선생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봄날에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