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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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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복음<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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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905 니코 2026.10.02 21:26 2026년 10월 3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0,17-24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니 마귀들까지 복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시면서도, 기쁨의 자리를 바로잡으십니다. “영들이 복종하는 것(성과·힘)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음’이 참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곧 ‘하느님의 심장에’ 새겨졌으니 말입니다.
그러고는 보기 드문 장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아버지를 찬미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신비를, 당대의 석학이나 종교 권위자가 아니라 ‘철부지들’ ―어부와 세리처럼 단순하고 작은 이들― 에게 여셨습니다.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합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지식만으로는 하느님을 거머쥘 수 없고, 낮고 열린 마음에만 그분이 당신을 여십니다.
영성 주간의 눈으로 보면 이 말씀은 한 주간의 완벽한 매듭입니다. 영성 주간이 가르친 모든 것 ― 작아짐, 어린이 됨, 단순함, 낮아짐, 혼자가 아님― 이 여기 ‘철부지에게 드러내심’ 안에 모입니다. 영성은 똑똑한 이가 ‘이루어 내는 업적’이 아니라, 작고 열린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이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화요일 대천사 축일에 열린 그 눈으로, 이제 우리는 작은 것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새겼듯, 하느님의 깊은 것은 영리함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받음의 기쁨은 성령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성과와 힘’을 기뻐하는가, ‘하늘에 적힌 내 이름’을 기뻐하는가? 나는 똑똑함으로 하느님을 거머쥐려 하지 않는가? 나는 철부지처럼 낮고 열린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는가? 나는 작은 것과 창조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행복한 눈’을 지녔는가?
주님, 성과와 힘이 아니라 ‘하늘에 적힌 제 이름’을 기뻐하게 하소서. 똑똑함을 내려놓고 철부지처럼 낮게 하시어, 당신의 드러내심을 겸손히 받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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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67?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2. 15:48
우리 곁을 찾아오는 성녀 데레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올바름을 완벽히 지켜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통해서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리지외의 데레사: 사랑의 길 우리 곁을 찾아오는 성녀 데레사! 2026년 10월 2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성녀 데레사가 살던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줍니다: 우리 다섯 명의 작은 순례단은 성녀 데레사가 선종한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창가에 가장 가까이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 성녀가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며 예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믿으려 애쓰던 때, 자신의 영혼에 비유했던 덤불 속 검은 구멍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수녀님이 데레사의 선종 이야기를 들려주던 중 갑자기 말을 멈추시더니, "손님이 오셨네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 모두에게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수녀님의 시선을 따라 창가를 바라보았는데, 그곳에서 아름다운 주황빛과 노란빛의 나비를 보았습니다. 때는 4월 3일이었는데, 프랑스 북부에서는 나비가 나타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습니다. 수녀님이 "내보내 주세요, 내보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창가에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창문 걸쇠를 열려고 했지만, 구조를 잘 몰라 계속 애를 쓰고만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제가 공중에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했습니다. 분명히 땅에 서 있었지만, 현존과 기쁨, 사랑과 힘이 넘쳐나는 황홀한 체험을 느꼈습니다. 머리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제 뒷모습만 볼 수 있었기에, "무슨 일이에요? 창문을 여세요. 나비가 나가고 싶어 해요! 나비가 나가고 싶어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제가 창문을 열었고, 나비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가 돌아서자 다른 이들이 제 얼굴이 창백하다고 말했습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라고 제가 물었지만, 사실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순간 데레사 성녀가 함께 있었던 겁니다. 성녀 데레사는 선종하기 전에, 천상에 있으면서도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 우리가 성인들의 기적을 믿든 믿지 않든, 데레사를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는 어떤 기적 같은 이야기가 다 있는 듯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합니다. 저는 그녀가 수백만의 사람들 삶 안에 현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과학"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 이 여인을 통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제가 성녀 데레사의 수도원에서 체험한 일은, 제가 참으로 믿고 또 오래 전부터 전해 온 메시지에 대한 확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작은 길"은 불완전함의 영성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히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랑 안에서 행동할 때, 그것이 바로 "작은 길"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랑과 일치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곧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가톨릭 성인들은 영웅적인 순교의 본보기가 되었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내가 완전하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도록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그 완벽함을 추구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성녀 데레사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저를 그 잘못된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성녀 데레사, 곧 "작은 꽃(Little Flower)"을 발견했을 때, 저는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 작은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매일 저는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기회를 갖습니다. 무례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저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며, 저 자신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Catherine F. Reference [1] Story of a Soul: The Autobiography of St. Thérèse of Lisieux, trans. John Clarke, 2nd ed. (ICS Publications, 1976), 263. [2] Story of a Soul, 187. Adapted from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 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y Traeger (Orbis Books, 2018), 233–23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꽃들은 우리에게 작은 사랑의 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곧 성녀 데레사가 가르쳐 준 ‘작은 길’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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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3 05:05
- 체득
욥기의 끝부분입니다. 마침내 욥의 입에서 참회의 고백과 함께 자기의 눈으로 주님을 뵙게 됐음에 대한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이 고백은 그제 우리가 읽은 욥의 절규와 같이 봐야 합니다. 그제 욥은 이렇게 절규했었지요.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그러니까 우리말의 체득입니다. 체득(體得)이란 몸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귀로 들어 알고 머리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제 욥은 귀로 들어왔던 하느님을 자기 몸으로 보겠다고 했는데 이제 드디어 자기 몸으로 하느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까지 뭐가 있었습니까? 몸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종기로 한시도 몸의 고통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고통과 씨름했을 때 욥은 몸이 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몸으로 뵙겠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깨어있었던 것입니다. 깨어있는 의식, 이것은 주님께서 늘 깨어있으라고 하신 그것 아닙니까?
몸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괴로움에 함몰되어 있지 않고, 의식은 그럴수록 하느님을 뵈어야겠다고 깨어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저도 지난 몇 달 종기가 많이 나서 괴로웠습니다. 나이 현상이라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가려움증을 주신 것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 머리를 가시로 찌르는 고통이 있었고, 그걸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빌었을 때 주님께서 가시로 찔러 바오로가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깨닫게 된 얘기가 생각이 나면서 가려울 때마다 가렵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로,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현재적 손길로 느끼려고 했습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축일을 코앞에 두고, 저로서는 프란치스코 뮤지컬을 매일 보면서 이 묵상을 합니다. 프란치스코도 몸으로 주님을 본 것이라고. 그것이 오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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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68?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3. 05:13
제자들이 전한 진리는 고발의 말씀이 아니라, 치유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사도직이 곧 사탄, 곧 "고발자"를 패배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빛을 지닌 자"라는 뜻의 루치페르(Lucifer)라 불렸지만, 결국 어둠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실낙원]원의 저자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탄; 그렇게 불리리라. 그의 옛 이름(루치페르)은 더 이상 하늘에서 들리지 않는다." "사탄"이라는 단어는 "고발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대부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발하신다고 생각하며 자라오지 않았나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따져서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낳아 주시고 극진한 사랑으로 길러 주시며 한없이 용서해 주시는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의식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시고자 하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기쁨의 소식이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비참해진 상태를 가엾이 여기시며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misericordia, 곧 자비입니다. 요한의 묵시록은 종말의 환시 속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자가 내쫓겼다.'"(묵시록 12,10). 이미 예수님 제자들의 사도직 안에서 사탄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진리의 말씀이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진리는 신학 강의나 철학적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고 말하여라." (루카 10,9).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전한 진리는 고발의 말씀이 아니라, 치유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말씀이 아니라, 세워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착각으로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졌다(죄의 의미) 하더라도 다시, 또다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애쓰시는 어버이로서의 하느님의 마음이 바로 그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것이고요! 루가 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심각함에 치우친 이들에게 기쁨은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논리적이고 통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카가 전하듯,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루카는 또한 제자들 역시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가득 찼다고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3,52).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 다음으로 기쁨을 언급합니다 (갈라티아서 5,22). 어린이들, 그리고 사물을 단순하고 참신한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언제나 곁눈질하며 전략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영에 자신을 맞추시듯, 기쁨과 큰 환희 속에서 외치셨습니다."라고요.... 예수님의 이 기쁨은 우리가 무언가 선하고 대단한 일을 해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가지시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나'에게 큰 신뢰심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더더욱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진심어린 신뢰심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어린 자녀들에 대해 가지는 부모의 마음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어버이요 사랑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는 프란치스코가 기쁨을 살아가는 삶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한번은 프란치스꼬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슬픈 기색을 보이는 어느 형제에게 말하였다: '사람 앞에서 슬픈 기색을 하며 낭패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하느님의 종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항시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죄는 당신의 방에서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하느님 앞에서 울고 신음하십시오. 형제들에게 돌아올 때는 슬픔을 없애고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도록 하십시오.' … '형제들은 겉으로 우울하고 슬픈 위선자의 모습을 하지 않도록 명심할 것이고, 오히려 주님과 더불어 기뻐하며 명랑하고 즐거워해야 하며 분에 맞는 품위를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첼라노 2생애 12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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