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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2018년 3월 26일 촬영.
우리가 그의 시, 한 줄도 기억하진 못해도
이상(본명,김해경)은 그의 이름 앞에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시인임엔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보들레르로 기억 되기를 원 했던 그는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7년 일본 땅에서 27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는 자전적 단편 소설도 몇 편 남겼는데 그 중에 <봉별기>를 올립니다. 문화의 향기에 함 취해 보시지요.
봉별기
1
스물세살이오 - 三월이오 - 咯血(각혈)이다.
여섯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藥 한 재 지어 들고 B라는 新開地(신개지) 閑寂(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寒燈(한등) 아래 밤이면 나는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이 나는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長鼓(장고)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錦紅(금홍)이다.
<몇 살인구 ?>
體大(체대)가 비록 풋고추만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살?
많아야 열아홉살이지 하고 있자니까
<스물 한 살이예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쎄 마흔? 서른 아홉?>
나는 그저 흥! 그래 버렸다. 그리고 팔짱을 떡 끼고 앉아서는 더욱더욱 점잖은 체했다.
그냥 그날은 무사히 헤어졌건만
이튿날 畫友(화우) K군이 왔다. 이 사람인즉 나와 弄(농)하는 친구다.
나는 어쩌는 수 없이 그 나비 같다면서 달고 다니던 코밑수염을 아주 밀어 버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가 급하게 또 금홍이를 만나러 갔다.
<어디서 뵌 어른 같은데>
<엊저녁에 왔던 수염 난 양반, 내가 바루 아들이지. 목소리까지 닮았지> 하고 익살을 부렸다.
酒席(주석)이 어느덧 파하고 마당에 내려서다가 K군의 귀에 대이고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어때? 괜찮지? 자네 한 번 얼러보게.>
<관두게, 자네나 얼러보게.>
<어쨌든 여관으로 껄구 가서 짱껭뽕을 해서 정허기루 허세나.>
<거 좋지>
그랬는데 K군은 측간에 가는 체하고 피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부전승으로 금홍이를 이겼다.
그날 밤에
금홍이는 금홍이가 經産婦(경산부)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언제?>
<열여섯살에 머리 얹어서 열일굽살에 낳았지.>
<아들?>
<딸>
<어딨나?>
<돌만에 죽었어.>
지어 가지고 온 약은 집어치우고 나는 전혀 금홍이를 사랑하는 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하나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금홍이에게 노름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금홍이가 내 방에 있거나
내가 금홍이 방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대신...
禹(우)라는 불란서 유학생의 遊冶郞(유야량)을 나는 금홍이에게 권하였다.
금홍이는 내 말대로 우씨와 더불어 <독탕>에 들어갔다.
이<독탕>이라는 것은 좀 음란한 설비였다.
나는 이 음란한 설비 문간에 나란히 벗어 놓은 우씨와 금홍이의 신발을 보고 언짢아하지 않았다.
나는 또 내 곁방에 와 묵고 있는 C라는 변호사에게도 금홍이를 권하였다.
C는 내 熱誠(열성)에 감동되어 하는 수 없이 금홍이 방을 犯(범)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금홍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禹, C 등등에게서 받은 十圓紙幣(십원지폐)를
여러 장 꺼내 놓고 어리광 섞어 내게 자랑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백부님 소상 때문에 귀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정자 곁으로 석간수가 졸졸 흐르는 좋은 터전을 한 군데 찾아가서
우리는 석별의 하루를 즐겼다.
停車場(정거장)에서 나는 금홍이에게 십원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금홍이는 이것으로 전당잡힌 시계를 찾겠다고 그러면서 울었다.
2
금홍이가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했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
금홍이는 겨우 스물한살인데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금홍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살 먹은 少女로만 보이고
금홍이 눈에 마흔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기실 스물세살이오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나믄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絢爛(현란)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세월이-
일년이 지나고 8월,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
금홍이에게는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왔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잠만 자니까 금홍이에게 대하여 심심하다.
그래서 금홍이는 밖에 나가 심심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심심치 않게 놀고 돌아오는 -
즉 금홍이의 狹窄(협착)한 생활이 금홍이의 향수를 향하여 발전하고 비약하기 시작하였다는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게 자랑하지 않는다. 않을 뿐만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금홍이로서 금홍이답지 않은 일일밖에 없다. 숨길것이 있나?
숨기지 않아도 좋지.
자랑을 해도 좋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금홍이 오락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가끔 P군 집에 가 잤다.
P군은 나를 불쌍하다고 그랬던가시피 지금 기억된다.
나는 또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즉 남의 아내라는 것은 정조를 지켜야 하느니라고!
금홍이는 나를 懶怠(나태)한 생활에서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우정 姦淫(간음)하였다고
나는 호의로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흔히 있는 아내다운 예의를 지키는 체해 본 것은 금홍이로서 말하자면
千慮(천려)의 一失(일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실없는 정조를 간판 삼자니까 자연 나는 외출이 잦았고 금홍이 사업에 편의를 도웁기 위하여
내 방까지도 개방하여 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하루 나는 제목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 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웃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이렇게도 못나게 홀아비가 된 내게 몇 사람의 친구가 금홍이에 관한 불미한 까십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으나 終始(종시) 나는 그런 취미를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금홍이와 남자는 멀리 과천 관악산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내가 쫒아가서 야단이나 칠까 봐 무서워서 그런 모양이니까 퍽 겁쟁이다.
3
인간이라는 것은 임시 거부하기로 한 내 생활이 기억력이라는 敏捷(민첩)한 작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달 후에는 나는 금홍이라는 성명 三字(삼자)까지도 말쑥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두절된 세월 가운데 하루 길일을 卜(복)하여 금홍이가 왕복엽서처럼 돌아왔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금홍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초췌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맥주와 붕어과자와 장국밥을 사 먹여가면서 금홍이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금홍이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고 울면서 나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나도 그만 울어 버렸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달지간이나 되지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헌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한에도 위로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良識(양식) 아래 금홍이와 이별했더니라.
갈 때 금홍이는 선물로 내게 베개를 주고 갔다.
그런데 이 베개 말이다.
이 베개는 이인용이다. 싫대도 자꾸 떠맡기고 간 이 베개를 나는 두 주일동안 혼자 베어 보았다.
너무 길어서 안 됐다.
안 됐을 뿐 아니라 내 머리에서는 나지 않는 묘한 머릿기름 땟내 때문에 안면에 저으기 방해된다.
나는 하루 금홍이에게 엽서를 띄었다. <중병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 고,
금홍이는 와서 보니까 내가 참 딱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역시 며칠이 못 가서 굶어 죽을 것 같이만 보였던가보다.
두 팔을 부르걷고 그 날 부터 나가서 벌어다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오 - 케 ㅡ>
人間天國(인간천국)- 그러나 날이 좀 추웠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안일하였기 때문에 재치기도 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두 달? 아니 다섯 달이나 되나보다. 금홍이는 홀연히 외출했다.
달포를 두고 금홍이는 홈식(향수)을 기대하다가 진력이 나서
나는 器皿什物(기명집물)을 뚜들겨 팔아 버리고 이십일년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와 보니 우리집은 老衰(노쇠)했다. 이어 불초 이상(李箱)은 이 노쇠한 가정을 아주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 동안 이태 가량...
於焉間(어언간) 나도 노쇠해 버렸다. 나는 스물입곱살이나 먹어 버렸다.
천하의 여성은 다소간 매춘부의 요소를 품었느니라고 나혼자는 굳이 신념한다.
그 대신 내가 매춘부에게 은화를 지불하면서는 한 번도 그네들을 매춘부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이것은 내 금홍이와의 생활에서 얻은 체험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이론같이 생각되나 기실 내 진담이다.
4
나는 몇 편의 소설과 몇 줄의 시를 써서 내 衰亡(쇠망)해 가는 심신 위에 치욕을 배가하였다.
이 이상 내가 이 땅에서의 생존을 계속하기가 자못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여하간 허울돟게 말하자면 망명해야겠다.
어디로 갈까. 만나는 사람마다 동경으로 가겠다고 호언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에 관한 전문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학교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단식인쇄술을 연구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5개 국어에 능통할 작정일쎄 어쩌구 甚(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 까지
虛談(허담)을 탕탕 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보다. 그러나 이 헷선전을 안 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여하간 이것은 영영 빈 털털이가 되어버린 李箱(이상)의 마지막 공포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겠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여전히 공포를 놓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자니끼 내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다.
"긴상" 이라는 이다.
<긴상(이상도 사실은 긴상이다) 참 오래간만이슈,
건데 긴상 꼭 긴상 한 번 만나 뵙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긴상 어덯거시려우>
<거 누군구. 남자야? 여자야?>
<여자니까 일이 재미있지 않으냐, 거런말야>
<여자라?>
<긴상 옛날 오쿠상>(아내)
금홍이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나타났으면 나타났지 나를 왜 찾누?
나는 긴상에게서 금홍이의 숙소를 알아 가지고 어쩔 것인가 망설였다. 숙소는 동생 일심이 집이다.
드디어 나는 만나보기로 결심하고 일심이 집을 찾아가서
<언니가 왔다지?>
<어유- 아제두, 돌아가신 줄 알았구려! 그래 자그마치 인제 온단말씀유, 어서 들오슈>
금홍이는 역시 초췌하다. 생활전선에서의 피로의 빛이 그 얼굴에 여실하였다.
<네눔 하나 보구져서 서울 왔지 내 서울 뭘하러 왔다디?>
<그리게 또 난 이렇게 널 찾어오지 않었니?>
<너 장가 갔다더구나.>
<얘 디끼 싫다.그 육모초 겉은 소리.>
<안 갔단말이냐, 그럼?>
<그럼.>
당장에 목침이 내 면상을 향하여 날아 들어왔다. 나는 예나 다름없이 못나게 웃어 주었다.
술상을 보았다. 나도 한 잔 먹고 금홍이도 한 잔 먹었다.
나는 영변가를 한 마디 하고 금홍이는 육자배기를 한 마디 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生(생)에서 영이별 이란, 결론으로 밀려 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네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云云
위 사진들은 홍건익의 가옥사진입니다.
홍건익 가옥은 1936년에 건립된 가옥인데 그 이전에는 19세기에 역관으로 활동했던 고영주와 그 형제들이
거주 했던 집 터 입니다.
조선시대 중인(中人) 계급에 속했던 역관은 통역과 번역에 관련된 일을 담당했던 관직입니다.
서울시에서 필운동의 오래된 한옥 구입과정에서 (구)토지대장을 통하여 1934년 홍건익이
이땅을 매입하기 전에 이 땅은 1912년에 역관 고영주의 집으로 등재되어 있었음이 밝혀 졌습니다.
조선말 역관인 고진풍은 아들 4형제(고영주 1840생, 고영희 1849생, 고영선 1850생, 고영철 1853생)를
두었는데 모두 역관이었습니다.
그 중 막내인 고영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푸드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자 1883년고종이
답례사절로 파견한 보빙사에 역관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다녀 왔습니다.
또 고영철의 아들 고희동(1886년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화가로 프랑스어 역관으로도 활동 했습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의 대문.
함박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골목 길에서,
시린 손을,
찔러 넣은 바지 주머니 속의,
온기에 녹이며
달빛 아래 잠든 그녀의 집
창문가에서 맴돌았습니다.
그 겨울에 얼어 버렸던 소리가,
이제 무시로 녹아 가슴속에서 뽀도독 소리를 내는군요.
아직도 내 맘은
그 곳에 있습니다.
노천명의 문간방,
창 밖 흰 눈 쌓인 골목길에 그림자가 서성입니다.
행복한 눈물의 그림자입니다.
길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 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위 글은 납북작가 김기림(1908~ )의 글입니다. 위 글은 시''일까요? 수필''일까요?
수필 같은 시, 시 같은 수필이 넘처 이제는 장르의 구분이 모호한 시대입니다. 위 글은 발표할 당시에는
수필로 발표했으나 지금은 시라고 부릅니다.
길에 여러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길은 길일 뿐입니다.
망향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학림사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굴레 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리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 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마을
나뭇짐엔 함박꽃을 꺽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 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고향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낮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꽃을 꺽다 나면 꿈이었다
노천명.
박노수미술관입니다. 이제 입장료가 3,000원이나 되었네요.
박노수미술관은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의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 준
집으로, 화신백화점과 간송미술관 보화각을 지은 건축가 일송 박길룡이 설계 했습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모두 서촌과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