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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갖게 하자
김태현 변호사
최근 EBS다큐 ‘인구대기획-초저출생’ 방송에 등장한 조앤 윌리엄스 캘리포니아 법대 명예교수가 큰 화제가 됐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싼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라는 자막이 붙었다. 그 뒤에 윌리엄스 교수는 “그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년 예산 수조 원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은 늘 최저치를 갱신했다. ‘아이를 갖고 싶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난임 치료 지원, 육아수당, 육아휴직, 공공 어린이집, 주택청약에서 자녀 가점, 다자녀 가정 학비 지원 등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 한쪽에는 ‘아기를 갖고 싶어도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원인불명으로 시험관 시술에 계속 실패해 정자나 난자의 기증을 받길 원하지만, 대한산부인과학회 윤리 지침에 의해 그 길이 막힌 부부들이다. (물론 비혼자에 대한 생식세포 기증과 시험관 시술, 그리고 대리모에 관하여도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정자나 난자의 기증을 받을 필요가 있는 부부들에게 초점을 맞추겠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법대 명예교수인 조앤 윌리엄스. EBS 방송화면 갈무리
윤리지침으로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어느 난임 부부의 경우
어느 날 오랜 기간 난임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아이를 갖는 데 실패한 한 부부가 법률 자문을 구했다. 그들은 남성 난임을 원인으로 수년간 시험관에 도전했지만, 정상적인 염색체를 가진 배아를 생성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부부는 아기를 갖고자 하는 열망에 난임병원 의사에게 정자 기증을 받아서 임신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난임병원 의사는 산부인과학회 윤리 지침에 따르면 정자 기증은 오직 남편이 무정자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며 만약 남편의 정액 안에 정자가 단 한 마리라도 존재한다면 기증 받는 게 금지돼 있다고 답했다.
다른 난임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혹시 난임병원 의사들이나 산부인과학회를 상대로 법적인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 부부는 이미 6년 넘게 난임을 치료하며 난자를 9번이나 채취했다. 총 배아 15개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단 한 번도 정상 염색체를 가진 배아를 얻지 못했다면, 정자 기증 등 다른 방법을 충분히 고려해 볼만 한데도 산부인과학회와 난임병원 의사들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기회를 박탈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사이 아내가 마흔을 넘었고, 이제 가임기간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초조함을 내비쳤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비록 산부인과학회가 비혼자에 대한 시험관 시술을 거부해서 인권위가 그들에게 윤리지침 개정을 권유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심지어 법률상 부부 사이에 정자 수증에 대한 명백한 동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회 멋대로 정자 기증을 통한 시험관 시술을 제한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제24조 제1항 전단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배아생성 의료기관은 배아를 생성하기 위하여 난자 또는 정자를 채취할 때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에 대하여 난자 기증자, 정자 기증자, 체외수정 시술 대상자 및 해당 기증자‧시술 대상자의 배우자가 있는 경우 그 배우자(이하 “동의권자”라 한다)의 서면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위 규정인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서는 제20조 제2항에서 ‘난자 또는 정자를 기증받아 배아를 생성하는 경우’에는 몇 가지 동의 서류를 더 구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생식세포를 기증하는 자의 기증 동의서 및 기증받는 자의 수증 동의서 등이 그것이다.
결국 법과 시행규칙을 종합해 해석해보면, ‘난자 또는 정자를 기증받아 배아를 생성’하는 것은 별다른 조건 없이 법률적으로 허용된 행위이다. 단지 부부 사이의 명시적인 합의, 그리고 기증자와 수증자 사이의 서면동의서가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윤리지침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돼 있다.
라. 정자 수증자의 조건
1) 비가역적인 무정자증으로 판단된 남성불임
2) 심각한 유전 질환 또는 염색체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
3) Rh 항원에 감작된 Rh 음성 여성에서 남편이 Rh 양성인 경우
4) 기타 정자 공여 시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경우
언뜻 보기에도 법률보다 조건이 몇 배나 엄격하다. 비록 ‘기타 정자 공여 시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경우’라는 규정이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두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1), 2), 3)의 규정이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경우만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4)의 규정 역시 그와 비슷한 정도의 엄격함을 가지고 해석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로 국내 난임병원 중 남편의 정자가 1), 2), 3)의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데 4)의 규정을 적용해 정자 기증을 통한 시험관 시술을 해준다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 나에게 법률 자문을 구한 그 부부와 내가 함께 알아본 바로는 그렇다. (혹시 다른 사례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제보를 부탁드린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갖게 하자
결론적으로 학회는 이들 부부에게 법률상 보장된, 정자 기증을 통해 배아를 만들고 임신할 권리를 윤리 지침으로 박탈하고 있다. 이익단체인 학회가 설정한 윤리 기준이 법률상 보장된 국민의 권리보다 더 앞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들 부부에게 당장 법률적으로 취할 수 없는 조치가 없다고 조언했다. 난임 치료 거부를 진료 거부(의료법위반)행위로 보기 어렵고, 학회는 국가기관이 아니어서 헌법소원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회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자니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결국 해법은 국회가 입법을 통해 ‘부부의 합의가 있다면 생식세포를 수증할 수 있다’고 선언해주는 것뿐이다. 우리 사회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갖고 싶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 아닐까?
현재 난임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험관 시술의 근거 법률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유일하다. 그러나 위 법률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에 관하여 정하고 있어서 난임 치료에 관한 부분은 제22조 내지 제28조, 7개 조에 불과하다. 난임 치료 지원에 매년 엄청난 예산을 쓰고,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인 지금, ‘난임치료 지원에 관한 법률’을 별도로 제정해 그 안에 난임 치료에서 할 수 있는 행위와 할 수 없는 행위를 규정해 두는 것은 어떨까. 이를 통해 법률상 보장된 국민의 권리가 누군가의 자의적인 ‘윤리’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저출산 문제의 해결에도 한 걸음 진척이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저출산’에 일조하는 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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