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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안긴 신에게 내가 왜 감사해야 하지?”
이 글의 주제로 영화의 대사를 인용해 보았다. 무슨 영화인지 잘 기억이 안 난다. X-File로 유명한 데이빗 듀코브니와 한때 톰 크“루저”의 부인이었던 미미 로저스 주연의 영화로 심판의 날에 여주인공이 휴거를 거부하고 지옥행을 결심하면서 뇌까린 말이다.
(며칠 전에 생각이 났다. [Rapture/이브의 선택 또는 휴거]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만큼 신인동형설에 들어맞는 신의 형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각 신들은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하여 절대적인 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다른 일에 대해선 인간과 다름없다. 제우스의 바람기는 자신과 배우자인 헤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폴론은 다프네의 사랑을 얻는데 실패했으며, 헤파이스토스는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으면서도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공처가였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현상들을 하나씩 맡아서 주관하면서 또한 인간들이 가진 성정/관념이나 제도들을 한 두 가지씩 대표하기도 한다. 바람둥이인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충실한 가정”을 주관한다는 것은 드라마 발생장치로서 정말 기막힌 배치인 것이다.
이러한 신들이 행하였던 일들은 그저 상대방 혹은 인간에게 좋다/안좋다의 의미만 있지, 그 자체가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평가를 내릴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신들은 그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본능과 직관에 충실했을 뿐이나 말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사실 신화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의인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동쪽의 사막지대에서 태동한 각종 유일신교의 신들은 양상이 다르다. 물론 이들도 질투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등 인간의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 결과로 축복과 재앙을 번갈아가며 인간에게 내린 적은 있다. 하지만 이 신들은 기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만물을 창조했으며, 언제 어디에나 있고, 또한 모르는 것이 없는, 말 그대로 전지전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대-기독교-이슬람의 신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전지전능함과 절대선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유대의 신은 처음부터 그런 존재가 아니라 단지 유대민족의 수호신으로 그려졌으나, 포로기를 거치면서 외래의 신의 모습과 관념을 차용하고 적용하면서 현재와 같은 절대적인 신의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지전능과 선함은 때때로 양립하지 않게 된다. 특히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고난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신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은 선하다”고 주장한다면 “피조물에 대한 관대함”은 역설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따르면 신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할 때(혹은 창조 이전에) 이미 세상을 파멸시키고 사악한 자들을 멸망시키며, 새로이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인간(14만 4천명)을 미리 예정해 두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물론 계시록을 그저 상징문학 정도로나 여기는 기독교 신자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도 계시론적 세계관(신관)이 보여주는 권선징악적 주제, 즉 고통과 고난을 통한 거대한 선(善)의 완성이라는 주제를 완전히 거부하진 못한다.
피조물들이 겪는 고통과 고난은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면 악마, 사탄(이것들도 피조물이긴 마찬가지지만)같은 절대악의 존재와 사탄의 사주나 유혹으로 인해 인간이 저지른 범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신의 전지전능함과 선함이 유효하고 양립한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고민을 철학자들이 부여한 용어인 “악의 문제”라고 하자.
유대-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도 이 “악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바 있다.
“신은 악을 막을 생각이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의사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악하다. 신은 의사도 있고 능력도 있는가? 그럼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다신론자였을 에피쿠로스(B.C. 341~270)의 고민처럼 사실 악의 문제는 유일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악의 문제는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종교들이 신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하거나 선악에 대한 기준을 다소 모호하게 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어느 정도 피해갔다.
그러나 계시문학 하의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종교적 믿음에 있어서 이성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신앙지상주의(fideism)자들 중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전지전능과 절대선이 양립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을 주장한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앙지상주의를 주장한 점과 여성에 대한 태도에 한정하여 평가할 경우 지랄맞은 인간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럼 여기에서 전지전능과 절대선의 양립이 과연 가능한가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기독교적 “악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A. 신은 전지하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
B. 신은 전능하시다. 따라서 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악을 제거하실 수 있다.
C. 신은 절대선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악을 제거하려 하실 것이다.
D.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고통과 고난, 그리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이 존재한다.
E. 따라서 A, B, C에 해당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A, B, C 중에서 한가지 이상은 신의 속성과 관련이 없을 것이다.
사실 에피쿠로스 등 다수의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A, B, C의 양립은 불가능한 것으로 논증되었지만, 교부철학에서 스콜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중세 철학자들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의 전지전능과 절대선 중 어느 한가지 이상이 부정되므로 곧 (기독교적) 유신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A, B, C 중에서 한가지만이라도 포기하는 것은 소위 정통 기독교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죄, 타락, 대속, 부활에 이어 종말과 구원이라는 일관된 예정적 코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를 중심으로 한 이 예정적 코드를 부정하는 신학사조도 존재한다. 이들은 원죄, 종말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의 대속과 부활, 그리고 구원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그저 신앙고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가톨릭의 경우 지옥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신과의 소통이 끊어진 상태 혹은 내면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예정”을 부정한다면, 예수는 그저 일개 독특한(당시로서는) 도덕주의자에 불과하며, 그의 언행들도 대체로 일차원적이고, 또한 대부분이 표절과 재현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대량학살, 독단적 사조의 범람, 부조리의 방치라는 역사에서 신의 잘못을 면책시키고 인간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게 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잘못이지 신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 “결과적으로는” 다를 바 없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A, B, C를 양립시키기 위한 중세철학자들의 시도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진행의 편의를 위하여 이 글에서는 때때로 고통과 고난을 “악”과 등가인 것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궁극적이고 거대한 선을 위해 악은 필요하다“
이 주장은 악의 문제를 정리한 것에서 D를 부정하는 것이다.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악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 주장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신의 원대한 계획과 창조는 “궁극적이거 거대한 선”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입각하여 자주 제시되는 예는 신을 부모로, 인간을 자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린 자식은 아무 것이나 입에 넣고는 한다(아이가 차도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을 예로 들 수도 있다). 이때 부모는 자식이 아무 것이나 먹지 못하도록 가르친다. 왜냐하면 상하거나 해서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일 수도 있고, 잘못하면 목에 걸려 질식사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식의 입장에서는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섭섭해 하고, 그래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떼를 쓰게 된다. 하지만 부모는 단호하게, 필요하면 약간의 체벌을 가하면서 함부로 주워먹지 못하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깊은 뜻도 모르고 아이는 부모의 제지와 체벌을 거저 자유의 박탈과 고통의 부과로만 여긴다.
정리하면 자유에 대한 약간의 침해와 약간의 체벌로써 궁극적 선에 해당하는 자식(인간)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것이며, 자식(인간)은 부모(신)의 큰 뜻을 모르고 섭섭하게만(악하게만) 여긴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 더 정교하게 철학적으로 논증한 것이 바로 자유의지 옹호론(free will defense)이다.
궁극적인 선을 행복이라고 할 때, 불행은 궁극적인 악이 된다. 고통과 고난도 불행에 속한다. 그리고 선에는 동정심, 용기, 용서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들은 또한 행복이라는 궁극적이고 거대한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정심을 발휘하려면 남의 고통이 필요하고, 용기를 발휘하려면 고난이 필요하다. 또 용서라는 선을 행하려면 상대방의 악행 또는 실수와 이에 따른 자신의 고통과 고난이 필요하다. 동정심, 용기, 용서라는 선을 행할 것인지, 시기, 질투, 도망, 자살, 포기 같은 악을 행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며,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상 인간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신은 인간이 로봇처럼 율법과 도덕을 따르기보다는 선한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궁극적 선에 이르는 것을 더 높게 보신다.
이러한 자유의지 옹호론에 따라 기독교인들에 의해 널리 선전되는 “얼굴마담”으로는 앨버트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프란찌스꼬 데 아시시 등이 있다. 아프리카에 기아와 질병이 없었다면 슈바이처 박사가 굳이 아프리카에 갈 이유가 없으며, 인도인들이 모두 풍족하고 건강했다면 마더 테레사는 보통의 수녀들과 다름없는 형태의 삶을 보내거나 다른 곳에서 성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란 견해이다.
그러나 특정인의 선행이 편협하고 어슬픈 독트린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유의지 옹호론은 슈바이처나 테레사의 선행에 비해, 아돌프 히틀러의 600만 유대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수천만에 달하는 사상자 발생 같은 너무나 혹독한 비용이 더 자주 소요되었다는 점을 설명(옹호)하지 못한다(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매우 부풀려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소 400만명 이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증거로 입증된다).
그나마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는 요시프 스탈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숫자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혹독한 비용들에 속하는 이디 아민이나 폴 포트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면적인 월남전을 촉발케 한 세력들은? 남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가 1/50 수준으로 줄어든 것(1/200이라는 설도 있다)은 “도대체 어떤 선을 위해서”인가?
대항해시대 캡틴 쿡이 섬에 상륙할 때마다 했던 말, “저 야만인들에게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정의의 힘을 보여주자”에서 보인 것처럼, 단지 정의에 대한 자의적 해석, 신이 내려준 힘이라는 독단적 판단의 결과일 뿐일까?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변명은 고통과 고난의 총량, 처벌의 가혹함 같은 것은 무시하고,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치나 관점에 대한 것에 치중하고 있다. 신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우셨기에 그렇게 거대한 악이 창출되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으며, 결국 히틀러나 스탈린이라는 인간의 잘못이자,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국민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솝우화 중에 폼나게 생긴 왕을 내려 달라는 개구리들의 요구에 황새를 왕으로 내림으로써 황새에 개구리들이 잡아먹혀 몰살을 당하게 된 것은 개구리들(그들의 자유의지)의 책임이지 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비극을 막을 능력이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 이외에는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며, 결국 신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이 되먹지 않은 변명은 간단하게 반박된다.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말살하기로 결심하는 것 자체를 신이 막을 수는 없다. 히틀러의 자유의지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의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신은 히틀러가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정한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나찌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격하기 전 날, 선봉부대 조리병들의 손에 조금 약한, 다만 설사하기에는 충분한 식중독균을 슬쩍 묻히는 겸손한 기적을 일으키셔도 되고, 신께서 좀 허세를 부리고 싶으시다면, 독일 기갑부대가 가는 경로상에 지진을 일으켜 땅이 갈라지게 함으로써 탱크가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거창한 기적을 일으키셔도 된다. 이런 류의 기적을 바이블의 설화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역사에서도 남발하셨던 신이지 않으신가?
그렇게 해도 히틀러는 결국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그럼 아예 히틀러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국가사회주의당이 선거 초반에서의 불리한 판세를 한 번에 뒤엎게 해 준 중요한 연설을 앞둔 히틀러에게 감기바이러스를 슬쩍 넣어 편도선을 공처럼 부풀려만 주셨으면 될 일 아닌가? 이거 절대로 히틀러가 자유의지를 갖는 것에 대해 신이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왜 신은 그다지 쓸모없는 데에는 기적을 남발하시면서, 중요한 일에는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신이시여~ 당신은 히틀러의 회심(회개)을 너무 오래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 뉘렌베르크 재판의 한 판사
“악이 없다면 우리는 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주장은 주로 감리교 계파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의 직무유기 혐의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하곤 하는 것으로 이 주장의 변형 혹은 예문은 많다.
“물에 빠지거나 빵이 목에 걸려봐야 공기의 소중함을 알지요.”
“교통사고로 입원해 봐야 교통법규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요.”
한편 조금 더 세속적인 것도 있다.
“한 번 차여봐야 옆구리가 시리다는게 진정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어요.”
“도둑맞아 봐야 문단속이 왜 필요한지 알지요.”
그런데 이렇게 선과 선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해, 혹은 선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변형은 다소 심각하게 다가설 것이라고 믿는다.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어봐야 신의 위대함과 공의로움을 알지요.”
“태풍과 홍수로 수천명이 죽어봐야 도시의 죄악과 타락을 각성하게 되지요.”
다소 심각해질 것이라는 "내 믿음"과는 달리 인도양 연안에 닥친 쓰나미와 뉴올리언즈를 휩쓸어 버린 카트리나를 두고 버젓이 신의 심판을 입에 담을 정도로 위의 변형을 당연하게 여기는 목사들이 있었다. 이런 목사들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조차도 동의하지 않거나 침묵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나는 그래도 기독교인들이 “신이 인간에게 선이 좋은 것임을 각인시켜 주기 위한 교육법 치고는 상당히 심했다”고 생각하리라 "믿는다".
지옥은 악행을 예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악인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지옥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 두 개의 질문을 구별하여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예방적 차원에서 하는 공갈협박은 실제로 행해지는 가혹한 처벌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신은 그저 무인도 하나를 하늘에 올린 뒤에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놓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굳이 고통과 고난을 부과하지 않아도 충분하며, 필요하다면 약간의 체벌로도 충분하다. 어린 아이가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해 야구방망이로 아이의 엉덩이를 100대씩 치겠다는 것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 글의 첫머리에 썼던 영화대사를 다시 써본다.
“인간의 삶에 그렇게 많은 고통을 안긴 신에게 내가 왜 감사해야 하지?”
“고통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고난이라는 관념에 입각한 윤회의 업과 통하는 이 주장도 악의 문제에 대한 신의 면책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이 인간의 타락과 불성실함과 질투와 다툼에 대한 응징이라면, 불성실한 애인으로부터 에이즈에 감염되어 고통을 안게 된, 그러나 지극히 착하고 성실한 사람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긴 제너의 우두법이나 수술시 마취하는 방법이 개발된 뒤에 보였던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반응은 “고통과 질병은 신의 공의에 따라 악한 자에게 가해지는 징벌이며, 이를 없애려는 것은 신에게 불경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에 의한 매독, 천연두 정복 같은 질병구제 사업들은 모두 신에 대한 심각한 불경죄인 셈이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였을까? 사실 이들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강력하고 확고한 근거가 있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던 시절 음란의 죄를 저질렀음을 장년이 되어 눈물로 참회하며 고백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후예들이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아기들의 고통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원죄라는 개념을 개발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원죄의 전달과 함께 조상의 죄악이 누적되어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과연 원죄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타고 유전되는 것일까? 그런데 원죄는 영혼의 죄였다. 따라서 부모가 성교하고 수태가 될 때마다 신이 일일이 아기들의 영혼에 죄를 주입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에 이런 관음증 환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 이런 식의 사설들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다지 의미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필자의 경우 과거 한동안 베네딕트회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선천성 정신지체아들과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사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대체로는 지적 능력을 상실한 정도지만, 어떤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도 있었다. 함께 갔던 성실하고 순박한 신자들이야 어떤 사명감과 만족감 등에 즐거이 봉사를 하였겠지만, 나는 가면 갈수록 그 아이들의 눈을 차마 마주칠 수가 없어서 결국은 봉사활동을 접고 기부금만 내게 되었다. 차라리 그들이 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어떤 분노나 구역질도 느끼지 않고 즐거이 봉사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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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찰스 고어 주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28년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그레트홀에서 고어 주교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공개토론에 대해 무엇이든 알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1929. 2. 12에 행해진 이 공개토론의 주제는 ‘기독교의 주장은 옳은가’임)
존경하는 카펜터씨, 당신이 문의하신 그 토론을 할 때 안타깝게도 고어 주교가 제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날 일 중에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여섯 살 난 제 아들이 유양돌기를 앓아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곧바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는 점과, 토론에 참가했던 고어 주교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이 ‘고통이라는 것은 모두 죄에 대한 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1958.11.13)
B. W. Russell, "Dear Bertrand Rus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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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나 악은 신이 아니라 사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주장도 신의 책임을 다른 대상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선으로서의 신을 상정한다면 직무유기의 무책임함은 여전히 남아있다. 에피쿠로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신은 인간에 대한 사탄의 유혹을 막을 생각이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사탄보다 무능한 것이다. 사탄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의사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악하다. 신은 사탄을 말릴 의사도 있고 능력도 있는가? 그럼 도대체 사탄은 어떻게 인간이 타락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가?”
사탄의 존재를 허용한 것은 상기한 자유의지 옹호론과 유사하다.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과 같은 권능을 과연 인간이 신의 도움이 없이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실제로는 기도의 적극성과 진실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은 기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굴복하는 사람도 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포스의 힘은 포스의 어두운 면이 이 불운한 부자에게 가한 유혹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이 주장에 대한 답이 아니라 다음에 나올 주장과 같은 것이다.
“악의 유혹이나 고통과 고난은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는 방법이다”
이 주장의 흔한 예시는 의로운 욥에 대한 신과 사탄의 내기이다. 욥기에서는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사탄이 욥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기는 것을 허용하는 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욥은 때때로 신에게 불평을 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영광스럽게도 욥은 이 모든 시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처자식과 재산과 노예를 보상으로 받는다(이 시험/내기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처자식들과 노예들의 영혼의 행방은 따지지 말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지전능한 신은 이 내기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 여기서 “당연하다”는 말이 중요하다. 이 당연함은 시험이 불필요함을 뜻하며, 따라서 고통과 고난은 신이 욥(인간)에게 부당하게 가한 셈이 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의 말미에 나오는 “시험에 들게 (방치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란 말이 무색해진다.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악은 인간이 (기도로써) 신에게 다가가도록 해준다”
이 피학대음란증과 다름없는 주장은 종종 다음과 같은 격언으로도 표현된다.
“난파선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
난파된 뒤에 열심히 기도하고 구조되어 살아난다면, 설사 그것이 요행이었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예전의 불신과 불경을 참회하고 신에게 귀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특히 가족이 다 죽고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 그가 무신론자나 배교자가 될 가능성은 훨씬 크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불경에 대한 징벌이라거나 신의 시험이라느니 한다면 그는 아마도 살인충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가족을 잃는 것만큼 큰 고통도 그리 많지 않다. 한편 생존자가 가족들의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신에게 자신의 행운을 감사해 하기만 한다면 그는 축하보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대한민국 기독교계에 툭하면 광고용으로 제시되는 어느 목사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나아가 양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열렬한 선전에서 죽은 아들의 억울함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 그 목사가 과연 자신과 두 아들(친자와 양자)의 이야기가 사람들에 의해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정당함”의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내켜할 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 목사가 자신의 일을 신의 정당함의 근거로 인식한다면 그는 인간말종이다. 그 목사는 어디까지나 “저는 용서라는 바람직한 말씀에 따르고자 하나이다”라고 했지, “하느님께서 아들을 잃는 고통을 주셨으나 저의 신앙은 그럼에도 확고하옵니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전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견지했으면 하는 좋은 관념이지만, 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견지했으면 하는 좋은 관념”이란 말에는 굳이 예수의 가르침 덕분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난파선에서의 기도는 로또를 산 뒤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단지 생명이냐 행운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단지 고통스러워 할 뿐이지, 그것들이 인생과 세상의 큰 조화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물론 기독교 유신론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은 종종 큰 그림 또는 숲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고통이나 악은 그냥 고통이나 악으로 볼 뿐이다. 반면 신은 고통이나 악이 장기적으로는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유신론자들은 주장한다.
이 주장을 보면 영화 메트릭스 2 리로디드의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에 완벽한 메트릭스를, 즉 알 속에서 전지역할을 하는 인간이 오로지 행복과 쾌락만 느낄 수 있도록 결함이 없는 완벽한 세상을 구축했던 아키텍춰는 결국 전지(인간)가 연쇄적으로 폐기(죽음)되자, 이번엔 다소 버그가 있는 메트릭스를 구축하고 이를 조화롭게 만들 요소를 찾아 줄 니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몇 번의 실패로 그때마다 메트릭스는 리셋되었고 새로이 시온을 건설하고 이를 구원할 니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주장은 나아가 종말, 심판, 재림, 구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하늘나라(천국)의 완성, 즉 궁극적인 조화를 위해 신이 마련한 것이라는 셈이다.
과연 그럴까?
몇 년 전에 신의 절대선이 악을 허용하는 것의 모순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어느 기독교 신자가 단 댓글이 있다.
“각 악기가 단독적으로 연주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다지 좋지 않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연습하는 소리는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이올린의 긁는 소리 자체가 고문이기도 합니다. 교향곡의 악보에서 한 악기파트만 들어보면 그리 의미도 없이 소음에 불과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악기들이 지휘자(혹은 신)에 의해 강약과 고저가 조절되면서 조화롭게 연주될 때 완벽한 하모니를 이룹니다. 하나님이 안티들에게 부당하게 보이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휘자가 시원찮으니 소음만 내는 단원을 참아 넘기는지 모르고 넘기는지 모르겠네요. 만약 내가 지휘자라면 계속해서 음정과 박자를 틀리게 하고 악기의 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단원은 그냥 퇴출시킬 겁니다. 하모니를 위해서요. 그리고 오디션 때 철저하게 그들의 실력을 검증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난 잡초는 그냥 뽑아 버리지, 그게 정원과 조화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며 그대로 두는 정원사는 아마 없을 겁니다.”
자유의지 옹호론에서 예를 든 독재자와 학살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살아남은 가족들을 보자. 단편적으로 생각하여 자신이 살아남았음을 신에게 감사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신이 세상의 조화를 위해 홀로코스트를 예비하였다고 한다면 과연 그들은 신에게 감사해 할까? 설혹 그들이 여전히 기독교적 유신론자로 남을지라도, 그것들이 조화를 위해 필요한 고통이라는 식의 신관을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것들을 조화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적 유일신관이 견지하고 있는 “전지전능과 절대선이 양립하는 신”의 이미지를 살펴보고, 또한 그 옹호론들을 검토해 보았다. 이 외에도 조잡하지만 더 많은 주장들이 있는데, 생략하기로 한다.
서구 기독교 신학과 중세 철학의 역사는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로 점철되어 있으나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결국 기독교적 유신론자들의 최후의 선택은 전지전능과 절대선 중 한가지 이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아예 논리적 사유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비주류에 속하는 근대신학의 조류로 나타나고 있고, 후자는 그저 인간의 한계를 들먹이며 “신앙은 믿음의 문제이지 이성이나 합리성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단지 기도로써 구할 일이다” 라고 우기는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후자에 대해선 딱히 응대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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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스압이네요. ㅎㅎㅎ
뭐 일단 긁어왔으니, 여기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하게 밝히자면 저는 작성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 작성자는 자유의지에서 "의지"에 방점을 찍는듯 한데, 무슨 근거로 이런 파편화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가질 능력, 혹은 권한" 그 자체로 봐야죠.
1. 신은 선한가에 대해서?
만약 신이 현세에 실질적으로 개입한다면, 역사상 수없이 많은 신의 물리적 개입이 일어났다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수천년간 그런 경험을 축적한 인간은 결국 스스로 무언가를 추구할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무엇중에는 신이 선하기에 바랄 것으로 기대되는 "선의 실현"도 당연히 포함 될 것입니다. 때문에 로보트처럼 타성에 젖어버린 인류로 만들지 않기 위해 신이 개별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건 모순이 된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2. 신은 전능한가에 대해서?
이미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전능한 권능의 사용에 스스로 일종의 금제를 두었다고 보는것이 맞지 않을까요?
지금 짬을 내서 쓰는 글이라, 눈치보여서 제대로 못쓰겠네요 ㅠㅠ
다른 회원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그건 단순히 기복사상이 결합한 기독교에 불과합니다.
위에서 많은 분들이 언급을 해주셨지만 신은 선한가에 대한 것은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욥기가 위에서 나왔지만 욥기의 결론이나 관련 내용을 다룬 영화 The tree of life를 보더라도 신의 응답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사실이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불행은 찾아옵니다. 일반적으로 기복신앙과 종교가 결합한 한국에서는 신앙심을 가지면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나 불행은 오고 인간은 그것이 왜 그런지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간이 판단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겪으면서 듣고 생각한 사실을 바탕으로 재해석, 재생산을 한 결과이기 때문
입니다. 즉, 신이 선하고 그러기 때문에 죄를 짓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닌 불행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고 인간은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애초에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신이 이 세상을 만드는 그 순간에도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누군가의 해석에 의한 것을 또 재해석하고 왜곡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으로는 신은 개입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서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단순히 판타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나 기타 내용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애초에 이건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성서를 지나치게
축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문학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비유입니다. 한국이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개신교의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서 신이 개별적으로 등장을 하거나 그 전능함을 보여주는 사건에 대해 어떤 행위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된다면 신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은 절대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Great Eastern 그럼 그냥 관찰하는 과학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