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축구 한국과 일본의 3·4위전 경기에서 일본의 0-2 패배가 확정되자 일본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쓰러져 절망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일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메달을, 그것도 라이벌인 한국에 빼앗긴 그들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속 쓰리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일본이 패배하는 순간 단 한 명의 일본인은 환호했다. 누굴까. 바로 홍명보호에서 피지컬 코치로 일하고 있는 이케다 세이고였다.
일본을 꺾고 역사적인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건 홍명보호의 중심에는 한 일본인이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꿈 접은 축구선수, 피지컬 코치로 태어나다
이케다는 와세대 대학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로 일본 대학 선발에 선발될 만큼 전도유망한 축구선수였다. 입단 테스트를 거쳐 잉글랜드 웨스트햄 연습생으로 뽑히며 기대를 한껏 모으기도 했다. 비록 지금의 프리미어리그 출범 전이었지만 아시아 선수가 축구 종주국으로 진출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훈련 도중 큰 부상을 입고 결국 꿈을 접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본 실업무대로 복귀한 이케다는 여전히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고통스러워했지만 “괜찮다. 경기에 나서는 데 지장이 없다”는 코치의 말만 믿고 몸을 혹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9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된 것이었다. 제때 부상을 치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자 더 이상 축구선수로 뛸 수 없던 이케다는 그렇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를 택해야 했다. 대부분의 축구선수가 현역에서 물러난 후 감독 수업을 받지만 그는 달랐다.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해야 했던 이케다는 체계적인 훈련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구단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피지컬 트레이너 교육을 시켜주세요.” 구단에서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가 진학한 도쿄대학교에는 전문적인 축구 교육 시스템은 없었지만 신체 능력 공부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1년 동안 이론을 집중적으로 배운 이케다는 브라질과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남미와 유럽의 체계적인 훈련법까지 습득했다. 그리고 1993년이 되자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에서 열린 도요타컵에 참가하게 된 상파울루의 모라시 산타나 코치가 이케다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었다. 평소 이케다의 능력을 높이 산 산타나는 이듬해 열릴 미국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 코치로 이케다를 추천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나라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 대표팀의 피지컬 코치를 배출했다는 건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 브라질의 유일한 외국인 코치로 월드컵 우승에 일조한 그는 이듬해 브라질식 훈련 방식에 유럽의 방식을 더하고 싶어 AC밀란으로 연수를 떠났다.
이케다 코치는 2007년부터 한국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고 활약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케다 코치와 한국의 인연
이케다 코치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쌓고 일본으로 돌아가 제프 유나이티드를 거쳐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서 피지컬 코치로 명성을 날렸다. J리그에서도 그를 기술위원으로 초빙했고 2002 한일월드컵 당시에는 심판 컨디션 트레이너로 발탁되는 등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4년 운명처럼 홍명보를 만났다. 벨마레 히라츠카에서 뛸 때 홍명보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던 이가 요코하마 F마리노스에서 안정환과 유상철의 통역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홍명보가 잠시 일본에 방문했을 때 이 통역사를 통해 둘의 만남은 성사됐다. 이케다는 아시아 최고의 스타이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홍명보의 첫인상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느껴졌다. 당시 홍명보는 이케다 코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제가 감독이 되면 저를 한 번 도와주세요.” 둘은 껄껄 웃었다.
한국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J리그에서 활약해 이케다 코치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황선홍 감독은 K리그 부산아이파크에 부임하자마자 이케다 코치부터 찾았다. J리그 구단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자 황선홍 감독이 간청했다. “그렇다면 딱 4개월 동안만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 황선홍 감독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이케다 코치는 결국 2007년 11월부터 4개월간 부산아이파크에서 피지컬 코치로 활동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체계적인 훈련과 자상한 성격에 매료된 부산 선수들은 4개월 뒤 그를 붙잡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코치님, 일본으로 가지 않고 여기 계속 계시면 안되나요?” 이케다 코치는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부산 선수들은 직접 돈을 모아 만년필을 선물하며 그를 추억했다.
J리그로 돌아가 우라와 레즈에서 코치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홍명보가 감독이 돼 한국 청소년대표팀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2009년 한국의 U-20 월드컵 출전 3개월 전 홍명보 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제 저를 도와주실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라와에서 피지컬 코치는 물론 아카데미까지 총책임을 맡고 있던 이케다 코치를 소속팀에서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반대했다. “딱 한 달만 도와달라”는 말도 거절했다. 그러자 홍명보 감독은 직접 우라와 구단을 세 번이나 찾아가 사장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결국 우라와 구단에서도 홍명보 감독의 진심에 마음을 열었다. 우라와에서는 아시아 최고의 스타 홍명보가 고개를 숙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케다 코치는 대한축구협회의 엠블럼이 달린 트레이닝복을 입을 수 있었다.
U-20 청소년월드컵을 앞두고 기념촬영에 임한 이케다 코치(맨 밑줄 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청소년월드컵 8강의 숨은 공신
사실 이케다 코치에게 한국은 불편한 나라였다. 그는 와세다 대학 시절 고려대와 친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경기장에서 관중이 던진 맥주병에 큰 부상을 입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반일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축구로 두 나라의 갈등을 푸는 데 미약한 힘이라고 보태고 싶었고 홍명보 감독의 진지하면서도 겸손한 자세에 매료됐다. 한국에 온 이케다 코치는 선진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의 체력과 컨디션을 관리했고 주기적으로 체지방량과 체력을 체크했다. 특히 한국 선수들이 표층근에 비해 심층근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파악한 뒤 심층근 강화를 위해 맞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케다 코치 덕분이었을까. U-20 청소년월드컵에 나선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도 지치지 않는 저력을 선보이며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대회가 끝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를 늘 주시하고 있었다. 청소년월드컵이 끝나고 한 달 뒤 다시 한국에서 그를 찾았다. 이번에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아니라 한국 성인 대표팀이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던 허정무 감독은 유럽 전지훈련을 앞두고 급하게 피지컬 코치를 구하고 있었다. 반데를레이 트레이너가 그만둔 뒤 전세계를 수소문했지만 마땅한 적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케다 코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세계적으로도 능력 있는 피지컬 코치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적임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케다 코치만한 이가 없었다. 하지만 우라와 측에서는 더 이상 그를 한국에 내주지 않았다. 우라와 측에서 강력히 반대해 결국 그의 허정무호 합류는 무산됐다.
이케다 코치와 함께 했던 이들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년월드컵이 끝난 뒤 이케다 코치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당시 멤버로 활약했던 구자철은 홀연히 이케다 코치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물어 물어 겨우 그를 다시 만난 구자철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말 축구를 더 잘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훈련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이케다 코치는 멀리까지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구자철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매달려 그가 가진 모든 경험과 지식을 통해 구자철에게 꼭 맞는 개인 훈련 방법을 전수했다. 구자철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때 배운 훈련 방법으로 훈련을 이어갔다.
홍명보 감독은 이케다 코치를 전폭적으로 신뢰한다. 경험이 많지 않은 홍명보 감독에게는 20년 경력의 이케다 코치가 무척 든든한 존재다. (사진=연합뉴스)
다시 홍명보호에 합류한 이케다 코치
비록 소속팀의 반대로 이케다 코치의 한국 성인대표팀 합류는 물거품이 됐지만 2012 런던올림픽 메달 사냥을 목표로 잡은 홍명보 감독은 이케다 코치가 반드시 필요했다. 홍명보 감독과 일하며 같은 꿈을 꿨던 이케다 코치도 도저히 홍명보 감독의 제안은 뿌리칠 수 없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그가 다시 홍명보호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수들도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 10월 대표팀의 첫 소집 훈련이 파주트레이닝센터에서 시작됐다. 선수들이 홍명보 감독을 기다리고 있던 그 순간 이케다 코치가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소집 훈련을 진두지휘한 건 홍명보 감독이 아니라 이케다 코치였다. 홍명보 감독은 이 체력 훈련을 멀리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케다 코치가 홍명보호에 다시 합류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일본 축구팬들은 그에게 맹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나라를 팔아먹었다”, “어떻게 한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등의 험한 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케다 코치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했다. 올림픽 무대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기 위해 체력을 보완하는 데 집중했고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관리했다. 대표팀 관계자는 "홍명보 감독이 큰 그림을 그리면 이케다 코치가 세심하게 덧칠을 한다“고 했을 정도다. 그렇게 홍명보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와 이케다 코치는 한 배를 타고 올림픽 첫 메달 사냥이라는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케다 코치는 부산 선수들이 선물한 만년필로 쓴 훈련 일지를 들고 있었다.
홍명보호에는 유난히 J리거가 많다. A매치와 다르게 올림픽 대표팀의 경기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강제 차출을 할 수가 없다. 일일이 구단들과 일정을 조율하고 차출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한다. J리그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는 홍명보호는 한국 올림픽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는 관심이 없는 J리그 구단과 차출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홍명보 감독의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이케다 코치가 나섰다. “제가 한 번 해볼 게요.” 이케다 코치는 현역시절 그와 함께 했고 이제는 J리그에서 각 구단의 수뇌부에 자리한 옛 동료들을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 대표 차출은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한다는 이유에서 반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결국 이케다 코치 덕분에 홍명보호는 J리거 차출 고민을 덜 수 있었다.
병역 논란 이후 국내 체류 일정을 거의 다 채워 한국에서 훈련할 수 없었던 박주영도 홍명보 감독의 고민이었다. 가뜩이나 소속팀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해 경기 감각이 떨어진 박주영이 함께 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주영과 같이 훈련하겠다고 나서는 곳도 없었다. 이때도 이케다 코치가 나섰다. 이케다 코치는 오랜 시간 인연을 쌓아온 J2리그 반포레 고후 조후쿠 히로시 감독에게 전화를 해 고후 훈련 캠프에서 박주영 훈련을 담당해 달라고 부탁했다. 들어주기 쉽지 않은 부탁이었지만 히로시 감독은 이케다 코치의 말만 듣고는 직접 구단 사장을 설득해 박주영을 고후 훈련 캠프로 초대했다. 이케다 코치는 이렇듯 늘 홍명보 감독의 고민을 덜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한국의 동메달이 확정된 뒤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홍명보 감독과 이케다 코치. (사진=연합뉴스)
그의 자랑스러운 올림픽 동메달
올림픽 첫 메달 사냥에 나선 홍명보호는 순항했다. 조별예선에서 2위를 기록한 뒤 영국을 제압하고 거짓말처럼 4강에 올랐다. 비록 결승 문턱에서 브라질에 패하고 말았지만 3·4위전에서 승리할 경우 그토록 그리던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바로 3·4위전의 상대가 일본이었다. 이케다 코치가 나고 자라고 세계적인 피지컬 코치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일본이 한국의 상대였다. 코치진과 선수들 모두 3·4위전을 앞두고 전의를 불태웠지만 이케다 코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케다 코치는 그 누구보다도 홍명보호의 동메달을 원하고 있었다. 상대가 일본이라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선수들을 독려했다. “우리 꼭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을 따자.”
그는 박주영이 일본 수비를 따돌리고 통렬한 골을 터뜨리자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 구자철의 두 번째 골을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인 한국의 월드컵 첫 메달 획득이 확정되는 종료 휘슬이 울리자 동료 코치들과 부둥켜 안고 감격을 나눴다. 행여나 이 역사적인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지는 않을까 좌절하고 있는 일본 벤치와 선수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현역 시절 부상을 입고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뛰어 지금도 불편한 다리를 절룩이며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혹독한 훈련을 묵묵히 이겨낸 선수들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홍명보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홍명보 감독과 이케다 코치는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일본 축구팬들은 일본이 패하자 이케다 코치를 향해 격한 비난을 퍼부었다. 글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적을 떠나 3년 넘게 함께 땀흘려온 홍명보호의 당당한 일원으로 이 축제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운명의 3·4위전 상대가 일본이었는데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과 일본이 경기한다는 사실을 떠나 나는 내가 속한 팀이 이기기 위해 준비했다.” 박종우의 ‘독도 세리머니’ 이후 징계 논란으로 떠들썩하다. 이 문제도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하겠지만 이 불똥이 홍명보호의 영광을 위해 함께 노력한 일본인 이케다 코치에게까지 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케다 코치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동메달을 위해 노력한 이다.
이케다 코치(맨 오른쪽)가 애국가와 태극기에 예의를 표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홍명보호의 이케다
수 많은 외국인 코칭 스태프가 한국 대표팀에 다녀갔다. K리그 뿐 아니라 한국 프로스포츠에는 수 많은 외국인 선수가 뛰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례를 할 때 애국가가 나오면 가슴에 손을 얹는 외국인 코치나 선수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애국가가 울리는 동안 이런 의식을 강요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케다 코치는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흘러 나오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다른 한국 코치들과 똑같이 가슴에 손을 얹고 예의를 표한다. 그것도 우리와는 앙숙 관계에 있는 일본인의 행동이라 더 놀랍다. 이제 그는 다시 홍명보호의 일원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케다 코치의 계약기간이 2012년 런던올림픽이 끝날 때까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제 다시 적이 될 수도 있지만 그가 올림픽 사상 한국 축구의 첫 메달을 함께 이룬 코치라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됐으면 좋겠다.
첫댓글 멋지구만!! 정치인들이 문제임
멋지십니다~
우리에게는 영웅의 한명일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반역자가 맞죠...그런의미에서 이케다 코치에게 박수를;
이케다 코치님, 역시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