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람꽃
2023년 3월 7일(화) 맑음, 안양 수리산
어제가 경칩이었는데 안양 수리산 수암봉 계곡에는 아직 겨울이 남아 있었다. 계류는 얼었다. 곳곳이 빙폭이었다.
계곡에 닿은 산자락에는 데크로드 설치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런 계곡에까지 인공구조물이 들어서는 것은 썩 내
키지 않지만 변산바람꽃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면 이해할만하다.
가파른 임도를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계곡 돌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편이 낫다. 변산바람꽃을 일일이 들여다보
노라면 돌길이 험한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 꽃에 납작 엎드려 카메라 들이대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면 여기저기서 꽃들이 자기도 찍어달라고 곱게 단장한 얼굴을 내민다.
사진만 올리면 지루할 수도 있어 김성탄의 「유쾌한 한때」라는 글을 이어서 몇 구절 함께 올린다. 명말청초의
위대한 인상파 평론가인 김성탄(金聖嘆, 1608~1661)은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평석(評釋) 속에서 33절
에 걸쳐 유쾌한 한때라는 것을 열거하고 있다.(임어당, 『생활의 발견』에서)
16. 겨울밤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 방 안이 몹시 추워진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
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땅 위에는 벌써 세 치 남짓 눈이 쌓여 있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7. 나는 오래 전부터 승려 되기가 소원이었다. 그러나 육식을 못한다기에 망설이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승려가
되어도 터놓고 육식을 해도 좋게 되었다고 하자. 자, 그렇게 되면 대야에다가 하나 가득 물을 데워 가지고 잘 드는
면도칼로 여름철이 지나기 전에 깨끗이 삭발을 한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18. 여름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다가 새파란 수박을 올려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19. 신체의 음부에 약간의 습진이 생겼으므로 문을 꼭 닫고는 가끔 더운 김을 쐬거나 더운 물에 담그거나 한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20. 우연히 가방 속에서 옛 친구가 보낸 자필의 편지를 발견한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21. 어느 가난한 선비가 나에게 돈을 꾸러 온다. 그러나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 한다. 아주 괴로우리라 생각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얼마나 필
요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돈을 내주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 길로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만 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있으면서 술이나 한 잔 들고 가는 게 어떻겠소?”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22. 지금 나는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있다. 미풍이 기분 좋게 불어오나 돛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지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바람처럼 빨리 다가온다. 나는 그 배로 가까이 가서 갈고리 쇠를 걸려고 하자 용케 걸린다. 그래서
그 배에도 줄을 던져 그 배에 끌려서 가게 된다. 그리고는 두보의 시를 읊조린다. “靑惜峯巒過 黃知橘柚來(푸른 산
봉우리 지남을 애석해 하고, 노란 것은 귤 유자임을 안다)” 그리고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 이 또한 유쾌
한 일이 아닌가.
23. 한 친구와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찾아와서 적당한 집이 있다고 일러준
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집으로 열두어 개의 방이 있고, 강에 면하여 있고, 아름다운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해준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어떻게 생긴 집인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슬렁
어슬렁 집 구경을 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커다란 빈터가 있고 곡간이 예닐곱 개나 있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제부터는 야채나 참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24.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운 성문이 보이고, 강 양쪽 기슭에서는 아낙네들과
애들이 고향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