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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노동자 배제하고, 기후운동은 연대 않고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노동조합을 찾아갔다. 기후위기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전략이 궁금했다. 그 하나. “우리 노조는 탈핵을 조직방침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조직 가운데 원전 관련 사업장을 조직한 데가 있어요. 노조로선 조직방침의 이행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산하조직은 강하게 반발하고… 당장 일자리 문제가 걸리니까요.”
팔짱 끼고 있는 정부만 바라보는 딱한 처지
“그러면 어떻게 할 작정이죠?”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겠죠. 노조 내부에서 해결할 사안도, 회사 차원에서 노사가 풀 문제도 아닌 거죠. 정부의 에너지정책과 산업정책이 바뀌면서 노동전환정책이 나와야 된다고 봅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부의 정책이 바뀌는 게 선결과제라는 말이었다. “사회적 합의는 노동자도 참가하는 사회적 대화의 결과물인데 그건 어떤 형태로 가능할까요?” “….”
그 둘. 자동차 부품사를 둘러싼 자동차산업의 생태계는 붕괴 직전이다. 내연기관차가 전기차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완성차업체는 공급망의 탄소중립까지 공언하고 있다. 이제 자동차용 소재나 부품도 조만간 무탄소(carbon-free)로 갈 것이다. 얼마 전 볼보나 BMW와 같은 완성차 업체가 탄소중립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산 부품의 구매를 철회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RE100을 선언한 기아와 현대차도 따라갈 것이다. 부품업체가 대응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부품업체로서는 돈도 없지만 더 중요하게는 연구인력이 없습니다. 현대차가 비계열사까지 책임지지는 않을 겁니다. 각자도생하라는 거죠. 저들은 국내에서 무탄소 부품을 못 구하면 해외에서 사오겠죠. 완성차 생산공장을 해외로 빼돌릴 수도 있겠고. 정부가 산업정책으로 지원해야 하는데 산업정책이란 게 사실상 없는 상태죠.” 노동조합으로선 정부와 마주 앉아 산업전환정책과 함께 일자리 정책을 논의해야 하는데 소통창구를 만들 방도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셋. 완성차노조는 어떨까. “우리는 전기차 전환으로 인한 고용불안을 경험하진 않았습니다.” 전기차 전환으로 고용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퇴직이 이를 상쇄했다. 전기차 조립과정에서 고용이 줄었지만 소프트웨어와 같은 IT 부문에서는 인력이 늘기도 했다. “노조도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해 왔는데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처한 고용위기도 함께 대응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죠. 조합원의 일자리만 지키려 든다고 우리를 욕하는데, 하청업체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요? 나서야 하는 정부가 나서지 않는 판에 우리 물량을 떼어줄 수도 없고. 사실 우리 일자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이라 우리도 정부의 산업정책이나 노동정책에 개입해야 한다고 봐요.”
100년 넘게 이어온 내연기관차의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전세계적인 탄소 중립 움직임과 맞물려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은 내연기관차 생산 중단과 전기차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생태계의 변화가 필수적이어서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어야 함에도 윤석열 정부는 노조와 대화할 생각이 없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 강변북로의 배출가스 5등급 운행제한 차량 단속 카메라. 2021.9.7. 연합뉴스 자료사진
‘탄소중립’에서 노조의 참여를 외면하는 정부
그 넷. 지난 7월 11일, 한국노총 전력연맹은 정부가 제정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기본계획)은 무효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그들은 이를 ‘정의로운 전환 소송’이라고 불렀다). 기본계획이 노동자를 배제한 채 구성된 탄소중립위원회에서 수립되었다는 이유였다. 탄소중립법에 따르면 탄소중립위원회는 위원을 위촉할 때 아동, 청년, 여성,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시민사회단체 등 각 사회계층의 대표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탄소중립위원회에 노동자 대표는 없다. “정부는 자기들 입맛에 따라 탄소중립위원회에 노동계 위원을 끼워주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데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죠. 정의로운 전환은 정부의 시혜적 조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법률적 권리입니다.”
노동조합은 기후위기 해결과정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주장한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의 참여가 필수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탄소중립기본법에도 규정되어 있다. 탄소중립위원회는 노동자가 참가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가령 민주노총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물론 탄소중립위원회 참가도 거부했다. 한국노총은 두 기구에 참가해 왔다. 최근 한국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탄압정책에 항의해 경사노위 참가는 보이콧했지만(사실은 정부가 경사노위를 포기했다) 탄소중립위원회에서는 배제되고 말았다. 비제도적인 사회적 대화기구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단됐다. 산자부가 운영하며 양대 노총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 그리고 연구기관이 참가하던 ‘자동차포럼’이나 울산에서 운영되던 ‘자동차산업 노사민정포럼’이 대표적이다. “제가 취임한 지 여섯 달이 됐지만 공무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은 바가 없습니다.” 산별노조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한 간부의 자조섞인 말이다.
어디를 상급단체로 두든 현장노조들은 노조가 정책결정과정에 참가하는 것이 절박하다고 느끼는 데는 차이가 없었다. 민주노총이 이 지점에서 구체적인 참가 형태가 덜 명확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양대 노총 소속노조들의 전망도 일치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조가 정부와 만나자고 한들 그게 먹힐까요?” 그렇다고 노동조합의 투쟁력이 정부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이 바뀌어야 가능하겠죠.”
현장의 요구에 부응해 정부와 어떻게 대화하고 협의할지를 정하는 것은 총연맹에게 맡겨진 과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부가 노조와 마주 앉을 의사가 눈곱만치도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정부와 협의하자고 나서는 건 모양이 깨지는 일이잖습니까?” 그럴까? 정부는 대통령의 사유물이 아니다.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하더라도 정부의 전면적인 철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다들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투쟁을 위해서도 요구사항은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권력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준비는 필요하다.
기후운동도 노동운동의 절실한 요구를 이해해야
기후투쟁의 장에서 사회적 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정부와 합의하려는 시도라고 반박하는 목소리도 듣는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성장주의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를 배제한 아래로부터의 체제전환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인류의 멸종을 막는 과정에서 노동자 일자리 몇 개가 대수냐는 주장은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기본소득을 일자리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고용불안은 눈앞에 닥친 현실인데 대안으로는 미래를 제시하는 격이다(정부가 상용화되지도 않은 탄소포집기술로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주장과 오십보백보다). 기후단체의 일부는 탄소중립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했지만 대안은 흩어졌고 그것을 관철할 힘도 없었다. 탄소중립위원회의 법률적 권한 행사도 막지 못했다. 이념에 갇혀 이념으로 현실을 재단함으로써 결국은 자신들이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된 꼴이 되고 말았다.
이해당사자를 배제하는 정부에 더해 기후운동마저 정책참가를 거부하면서 탄소중립위원회는 이해당사자 없는 탄소중립 거버넌스로 귀결됐다. 덩달아 노동자의 목소리까지 사라졌다. 정부가 탄소중립의 ‘주된 설계사’(a principal architect)라면 기후위기는 정치의 위기를 반영한다. 기후투쟁은 기후정치투쟁이고 그것은 정부를,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바꿔내는 투쟁이다. 이 점에서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은 서로 지렛대가 된다. 그렇다면 왜 기후운동은 노동운동의 절실한 요구에 공감하며 노동운동과 연대를 시도하지 못하는가. 정치의 계절을 맞아 국민을 무시하던 정치가 국민을 무서워하는 정치로 바뀌고 있는데 말이다.
출처 : [박태주 칼럼] 공중에 떠버린 '탄소중립' 논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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