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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관료 11인의 행적을 통해 본 중국사
역사를 탐구하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경제?사상?문화?전쟁 등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살피는 경우가 있고, 후세를 뒤바꾼 중대한 사건에 초점을 두는 경우도 있으며, 당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권력자나 위인 등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경우도 있다. 그간 국내에 출간된 중국사 관련 도서들은 통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전쟁사, 사상사를 바탕으로 하거나 강희제, 옹정제 등 전제 황제를 중심에 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전제 왕조 시대의 중국에서 황제만큼이나 역사의 변화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이 바로 관료였다.
중국 봉건 왕조에서 관료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인 황제를 보좌하는 별들로, 황제에게서 권력을 위임받거나 혹은 몰래 빼앗아 백성들을 다스렸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구중심처에 틀어박혀 있어 평생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황제보다는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료가 더 중요한 존재였다. 황제 입장에서도 관료는 중요했다. 관료들의 도움 없이는 사사로이는 사냥이나 유람 등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공적으로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사회 기풍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가 검소하고 청렴하게 생활하며 그런 인물들을 가까이하면 자연 사회의 기풍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뒤에서 실질적으로 행정과 사법, 민생과 치안을 담당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중국사를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관점이라 할 수 있으며, 역사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범중엄?포청천?화신?임칙서 등 역대 중국의 관료 가운데 대표적인 청백리, 탐관오리 11인의 행적을 통해 중국사를 새롭게 파악한다. 특히 각 인물의 전기적 사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황제를 비롯한 관료들의 이해관계, 정치?사회적 풍조 등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들은 백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흥미롭게 서술한다. 또 탐관오리의 출현을 막기 위해 사용된 여러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정치판에 적용해도 될 법한 내용이 적지 않다.
2천 년 중국사에서 찾아낸 청백리, 탐관오리 열전
관료들은 크게 백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청백리와 재물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탐관오리로 양분되는데, 이 두 세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공존해왔다. 진(秦)의 시황제가 군주 전제제도를 확립한 이래 신해혁명으로 황제가 사라지기까지 2천 년 동안 중국의 역사는 평화와 난리가 반복되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청백리와 탐관오리의 대결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청백리들이 국정을 주도하면 국력이 강해지고 사회가 안정을 찾은 반면, 청백리와 탐관오리가 대립하는 시기에는 국력이 약해졌고, 탐관오리가 조정을 장악하면 나라가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저자는 2천 년 중국사에 그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킨 11명의 대표적인 청백리, 탐관오리의 행적을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아편전쟁의 주역으로만 알려진 임칙서의 치수 전문가로서의 면모, 공정한 판관으로 유명한 포청천의 인간적인 모습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새롭게 밝히고 있다.
판관 포청천.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 인정미 넘치는 모습과 청백리로서의 삶
한때 〈판관 포청천〉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 포청천은 “개 작두를 대령하라!”라는 대사로 대변되는 이미지, 즉 무표정한 검은 얼굴로 선과 악을 꿰뚫어보고 거침없이 판결을 내리는 정의의 화신으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칠협오의』의 무협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기괴한 내용을 날조하여 사건 해결에 중점을 둠으로써 포청천을 마치 동양의 셜록 홈스나 고대의 형사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다면 포청천包靑天(999~1062)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포청천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여, 당시는 물론 후대에까지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관청의 대문을 활짝 열고 백성들을 맞아들여 억울한 사정을 다 말하게 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그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연로한 부모를 모시기 위해 10년이나 출사를 미룰 정도로 가족 간의 정을 중시했다. 그뿐 아니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를 가엾게 여겨 거듭 재혼을 권유할 만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청백리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단주의 지주에 임명된 그는 수재를 다스리는 일을 비롯해, 우물을 파고 양식을 비축하고 학교를 여는 등 여러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단주의 벼루는 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품으로, 과거 지방관들은 늘 조정에 바친다는 구실로 각지에서 벼루를 거두어들였지만, 포청천은 단 하나도 사사로이 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후손들 가운데 관리가 되어 뇌물 수뢰 등으로 죄를 지은 자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죽은 뒤에는 가족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하라”라는 가훈을 남길 정도로 철저한 청백리였다.
관료가 만든 시대, 시대가 만든 관료
저자는 단순히 각 인물의 일생을 묘사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이 당대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살피며 중국사를 좀 더 폭넓게 들여다본다. 예컨대 포청천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며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송나라 역사상 가장 어진 군주이자 너그럽고 신중하게 조정을 이끈 인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며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명 왕조 가정제 때 대를 이어 탐욕을 부린 엄숭 부자가 그런 경우다. 당시에는 황제의 전제권이 너무 컸고, 황제가 나랏일을 관리하지 않았으며, 관리들의 녹봉이 너무 박했고, 사회 기풍이 건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엄숭 부자가 거물 탐관오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대 최고의 탐관오리로 손꼽히는 화신 역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cX-nLSKt_g
황제와 공생한 탐관오리 화신
청 왕조 건륭제 후기의 권신인 화신和?(?~1799)은 만주 귀족 출신으로, 건륭제의 호위 무관으로 있다가 황제의 눈에 들었다. 이후 그는 늘 건륭제의 신변을 지키면서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기술을 익혔고, 그 재주를 십분 활용해 짧은 기간에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1782년에는 호부상서가 되어 재정권을 장악했고, 1784년에는 이부상서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1786년에는 문화전 대학사가 되어 신료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화신은 1799년 가경제에 의해 사사될 때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권을 독점했는데, 권력을 이용해 그가 한 일은 오로지 뇌물을 받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뿐이었다.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교묘한 조작을 통해 국고를 빼돌렸고, 손안의 인사권을 이용해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문어발식 경영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긁어모은 재산이 당시 조정의 20년 세입 이상이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이 엄청난 부정 축재를 화신 한 사람의 탐욕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최고의 탐관 화신과 최고 권력자 건륭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건륭제는 화신의 뒤를 봐주며 화신의 집을 자신의 ‘작은 금고’로 활용했다. 돈이 필요하면 화신이 지불했고, 수입도 모두 화신이 관리했기 때문에 황제는 아무 염려 없이 즐거움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화신도 이 작은 금고의 ‘대총관’ 노릇을 기꺼이 자청했는데, 그래야만 자신이 중간에서 착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공생’ 관계였던 것이다. 이처럼 황제와 탐관오리가 결탁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국가 재정을 바닥낸 결과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새롭게 쓰는 청백리 열전
저자인 사식 선생은 종래의 학설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을 새롭게 평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풍도馮道에 대한 평가 등이 그렇다. 이는 ‘제왕의 이익’에서 ‘백성들의 이익’으로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며, 그에 따라 평가도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4대 10군을 섬겨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힌 풍도를 위한 변명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가 『신오대사』에서 오대 시기에 고위 관리를 지낸 풍도馮道(882~954)를 ‘염치없는 자’라고 평가한 이래 무려 천 년 동안이나 풍도에게 붙은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구양수는 왜 풍도를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풍도가 ‘4대 10군’ 또는 ‘5대 11군’을 섬김으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봉건적 도덕을 어겼기 때문이다. 오대는 총 53년이었는데, 그 사이 무려 13명의 황제가 자리를 주고받았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풍도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살기등등한 ‘새로운 황제’를 맞아들여, 성이 부서지고 백성들이 죽는 대재난을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충성과 절개를 다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인데, 그 결과는 대도살과 파괴였다. 풍도는 첫 번째를 택했고 그 때문에 욕을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도덕 표준은 순전히 전제 황제의 입장에서 제정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그저 몇 명의 군주를 섬겼는가 하는 것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오대 시기에는 백성들을 해쳐 사욕을 채우는 군벌?토비?강도 같은 황제가 1~2년에 한 번씩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관료들이 지조를 지킨다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뿐 아니라 ‘백성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풍도는 오히려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하려고 애쓴 어진 재상이었다고 평가한다. 왕조가 거듭 바뀌는 대혼란 중에서도 지역과 백성을 보전하는 데 힘썼고, 재상으로서 황제에게 충고하며 농민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한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이 밖에 저자는 고대에 이용된 탐관오리의 출현을 막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① 수?당 시대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역대 왕조들은 엄격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통해 과거 제도의 ‘삼공’(공평?공정?공개)을 지키려고 애썼다.
② 바른말을 하는 언관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비리와 부정부패를 단속하고 폭로함으로써 탐관오리를 억제하는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③ 송나라 때는 소소한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라 해도 엄히 처벌하고, 그 사실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겼다.
④ 송나라 때 비리를 저지른 사람은 퇴직한 다음 받는 각종 특혜에서도 한 등급 낮은 대우를 받았다.
⑤ 일부 왕조들은 계몽 활동을 중시하여, 청백리를 위한 공적비를 세우거나 행장을 기록해 만세에 귀감이 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추악한 비’를 세우고 죄상을 기록하여 그 더러운 이름이 영원히 남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