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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김수영은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가 시인임에도 그는 끊임없이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가 시에 반역하는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했고,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가 꿈꾸는 시인의 이상향에 미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심지어 그가 생각하는 시인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인이라면 자신뿐 아니라 동료 시인들에게도 거침없이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우리에게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또한 김수영과 꽤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내내 김수영으로부터 알맹이는 없고 겉멋만 잔뜩 든 시를 쓴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는 김수영이 오만하고 건방져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수영은 그 자신 또한 자신이 꿈꾸는 시인의 모습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김수영이 생각하는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김수영에게 있어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우직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27~28쪽
평생을 어머니와 반목했던 빈센트가 어머니를 용서했던 것도 이 시점에서였다. 서글프게도, 그것은 성공한 빈센트가 어머니를 이해했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을 정신병원에 보내려 한 어머니와 결정적으로 틀어졌던 빈센트는, 자신에게 정말로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깨닫게 되자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빈센트 인생에 단 한 번도 그에게 생계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빈센트에게 있어 그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빈센트가 정신병원에 자기 발로 찾아 들어간 이유는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의 상태가 회복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래왔지만 이제 정말로 그에게 남은 것은 그림 그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 또한 그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그때부터 자기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을 이어 나간다.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49~50쪽
중섭의 곁에서 그를 돕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는 딱 그만큼, 한편으로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이롭기는커녕 해롭기가 독과 같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딱히 이중섭에게만 해당되었던 일이 아닐 것이다. 전쟁이란 본래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내기 가장 쉬운 환경이니까. 전쟁이 끝난 후의 폐허에서 타인을 대할 때 온전한 선의만을 갖고 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법이다. 이중섭 개인에게 있어 불행은,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은 곁에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내칠 수 있을 만큼 그가 약지도 모질지도 세상 물정에 밝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좀처럼 내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80쪽
커다란 덩치에 폭력을 즐기고, 위험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시험했던 헤밍웨이는 내적으로는 매우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것은 그를 알고 지낸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거트루드 스타인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부인 젤더는 헤밍웨이가 실은 겁쟁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헤밍웨이에게 적의를 품고 있긴 했으나 헤밍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므로 허무맹랑한 낭설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헤밍웨이의 평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그를 일컬어 ‘떨리는 감수성과 폭력에 대한 몰두가 이처럼 불가사의하게 결합된 존재가 이 지상에 걸어 다닌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그 밖에도 헤밍웨이를 알고 지낸 여러 사람들, 그의 가족 등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그에게 겉으로 보이는 강인한 이미지와는 상반된 다른 면이 공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떠나기 전에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혼자 남고 상처받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결혼 생활마다 간통을 저질러 아내들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방어했다.---239~240쪽
https://www.youtube.com/watch?v=18Lv0IrVqMM
출판사 서평
어렸을 때는 몰랐던 위인들의 맨얼굴을 마주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통념을 벗어난 위인전 읽기의 즐거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을 삶의 모범이 된 인물들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집어 들었다면, 이 책 《찌질한 위인전》(위즈덤하우스 刊)은 어른이 되어 다시 보는 위인전, 조금은 색다른 시각에서 위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조망한 위인전, 삶의 동력이 되어주는 위인전을 표방한다. 따라서 완벽한 영웅들처럼 굳은 의지와 올바른 신념으로 점철된 위인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찌질한 위인전》은 《딴지일보》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찌질한 위인전’을 재구성하여 엮은 책이다. 김수영, 빈센트 반 고흐, 이중섭, 리처드 파인만, 허균, 마하트마 간디, 어니스트 헤밍웨이, 넬슨 만델라, 스티브 잡스의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때로는 비루하면서 때로는 발칙하기도 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우리 시대의 위인 외에도, 인류사에 손꼽히는 악인이지만 그 역시 자기 안의 혼돈을 이기지 못하고 삶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한 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파울 괴벨스’와 노랫말과 생의 궤적 자체가 하루를 절룩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준 인디가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故 이진원)’에 관한 이야기는 외전으로 실었다.
저자인 《딴지일보》 함현식 기자는 아홉 명의 동서양, 근현대 위인들의 숨겨진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현대적 시각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위인’과 ‘찌질함’을 한데 묶었다. 우리는 완결된 위인들의 생애를 보고 있지만 당시 그들에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와 불안한 미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위인이기 이전에, 결국 그들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각자의 상처, 못나고 변변찮았던 면들을 짊어지고 분투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독자들은 삶에서 느끼는 슬픔과 불안, 절망감과 우울함 등을 조금은 의연하게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라는 뜻을 지닌 표준어 ‘지질하다’ 대신, 이 책에서는 같은 의미가 좀 더 대중적으로 쓰이는 정도와 어감의 차이, 저자의 의도를 고려하여 ‘찌질하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찌질한 위인전’이라 이름 붙였다.
고흐부터 스티브 잡스까지, 위대할수록 더 찌질한 위인들의 맨얼굴!
너무나도 인간적인 위인들의 민낯을 통해
사람을 다시 읽고, 삶을 위로받다!
이 책은 아내를 구타할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속사정, 고흐가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 들어간 이유, 허균의 이름이 조선 왕조에서 지워진 배경, 끊임없이 권위를 조롱하면서도 노벨상을 거부하지 못한 파인만의 속내, 자기애성 인격장애로 좌절과 도취를 반복했던 스티브 잡스의 이면 등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어 보이는 위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위인들이 문학사, 정치사, 과학사 등에 남긴 족적들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나고 훌륭했던 발자취에 가려져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다.
저자는 시대정신에 의해 신격화된 모습을 경계하면서, 비판적이되 인간적인 시선을 견지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다음의 도약을 바라보게 된 위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에게 남긴 어떤 업적이나 작품과 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의 과정 때문일지 모른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위인들의 내면적 상처가 ‘찌질한’ 모습으로 노출되는 과정, 그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도 하여금 인간적인 동질감을 끌어내고 생각지도 못한 위안을 건넨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위인들과 동일화되어 자신의 치부를 고백하다가도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여 웃게 되거나 권위를 조롱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쉽사리 삶과 화합하지 못하는 위인들의 인생을 통해 무엇이 인간의 실체이며, 무엇이 삶의 진짜 모습인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위인들을 향해 던진 연민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위안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