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소리
일요일 낮에 창원에서 거제로 돌아온 구월 첫날이다. 늦은 오후 비가 예보되어 여느 일요일보다 이른 정오 무렵 창원 팔룡동 터미널로 나갔더랬다. 버스는 한 시간 반 달려 거가대교를 지나 고현에 닿았다. 시내버스로 타고 연사 와실로 들 무렵 흐린 하늘에선 참았던 빗방울이 떨어졌다. 가져온 짐 꾸러미를 정리하고 하루를 돌아본 일기를 남겼다. 제목은 ‘구월 첫날’로 뽑았다.
저녁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겠는데 차림은 뭐로 할까 생각했다. 혼밥을 들기 때문에 영양가를 떠나 절차가 간편하고 설거지가 수월해야함이 고려되어야 한다. 기름기가 적어야함은 당연하다. 1인분 쌀을 씻어 밥을 지어도 되겠으나 더 간단한 것이 없을까 궁리하다 부엌 찬장으로 열어보니 여름에 사 둔 비빔면 봉지가 있었다. 전에 먹어보니 하나는 양이 적어 두 개를 끓여 먹었다.
비빔면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하니 설거지야 간단히 끝냈다. 이어 부엌으로 나간 김에 다른 일거리가 없을까 둘러봤다. 찻물로 음용하는 영지와 두릅나무와 칡으로 끓이는 약차를 끓여도 되겠으나 나중에 할 일거리로 남겨두었다. 텔레비전 시청은 관심이 없고 책을 펼치면 좋겠으나 눈이 금방 침침해 와 그럴 수 없었다. 창밖은 비가 부슬부슬 내려 저녁 산책은 나서기 어중간했다.
샤워를 끝내고 잠을 청했다. 나는 초저녁부터 드는 잠에 익숙해 머리를 눕히면 언제든 쉽게 잠에 든다. 저녁 다섯 시 반 잠에 들었더니 열한 시가 되어 잠을 깼다. 아직 날짜변경선도 지나지 않아 새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날짜를 먼저 당겨 구월 둘째 날이 시작되는 셈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이 다세대주택 1층이라 심야나 새벽이라도 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아 좋은 점이다.
아까 잠들기 전 미루어 놓은 약차를 달일 준비를 했다. 창원에서 달여 먹는 재료를 그대로 가져와 쓴다. 주재료는 말린 영지버섯 부스러기다. 여기에 대추가 들고 산수유열매가 든다. 산수유열매는 지난해 가을 함안 자양산 중계소 오르는 길가에 지천으로 달린 것을 따 와 씨를 볼가내고 말렸다. 말린 칡뿌리도 들고 두릅나무와 헛개나무 조각들도 넣었다. 이들도 모두 손수 채집했다.
가스 불을 켜 약재를 넣은 주전자를 올렸다. 센 불에 십여 분 끓여 불을 낮추어 한 시간 정도 달이면 약차가 완성된다. 나는 이 찻물에 함유된 성분이 무엇이고 어디 좋은지 알려고도 않고 그냥 먹는다. 나는 일상에서 커피를 잘 들지 않는다. 누가 박카스를 권해도 병뚜껑을 열지 않고 밀쳐놓는다. 내가 직접 채집한 재료로 끓인 약차는 식혀 냉장고에 두고 시시때때로 음용을 한다.
와실 바닥에 식탁을 겸한 서안에 둔 노트북을 켜 뉴스를 검색하다 몇 줄 글을 쓰고 있다. 좁은 부엌 열어둔 문으로 가스렌지에서는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찻물이 달여질 시간을 가늠해 가스 불을 껐다. 빗방울소리처럼 들려온 물 끓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사방은 다시 고요와 적막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창밖 지상 어디에선가는 귀뚜라미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초저녁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는데 그새 잠시 그쳤나 보다. 귀뚜라미는 풀숲에서도 울고 벽 틈에서도 운다. 풀숲에서 서식하는 귀뚜라미는 비가 오면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빗물에 날개가 젖으면 울림통에 비빌 수 없다. 창밖은 울타리 맡은 원룸 주인이 가꾸는 조그마한 텃밭이다. 잡초 속 부추와 파가 자랐다. 그 풀숲에 귀뚜라미가 숨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찻물 끓는 소리가 사그라지자 귀뚜라미소리는 더 또렷했다. 그런데 어둠이 짙은 창밖엔 빗방울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굵은 비는 아닌 듯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귀뚜라미소리는 잦아들었다. 빗방울은 계속 떨어지지 않고 이내 그쳤다. 귀뚜라미는 빗소리에 날개가 젖었는지 울음소리가 일시 그쳤다. 한 주 내내 비가 잦을 모양인데 귀뚜라미가 짝을 만날 수 있으려나. 1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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